합의 밖에는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선화는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손을 아래로 뻗어내려 발에서 뾰족구두를 벗겼다. 벗긴 뾰족구두 한 켤레는 조수석 바닥에 휙 던져 버렸다.
어쩔 땐 그 뾰족구두가 족쇄 같았다. 열심히 열심히 뛸수록 발가락을 붓게 하는, 선화를 더 고달프게 만드는 족쇄 같을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선화는 그 뾰족구두가 자신을 아름답게 해 준다고 생각했다. 슬리퍼를 신고 걸을 때와 뾰족구두를 신고 걸을 때는 확실히 그 기분이 달랐다. 걸음걸이도 조금은 달라지는 듯했다. 조금 더 높아지는 듯했다. 발뒤꿈치가 뾰족구두로 인해 위로 올려지면서 살이 찔 새 없이 마르고 볼륨감 있는 선화의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아름답게 높여 주는 듯했다.
한기는 선화의 그 뾰족구두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선화는 한숨을 쉬었다.
그대로 차 안에서 잠들어 버리며 어떨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러면 온전히 선화만의 깊은 잠을 잘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혼자가 되고, 가장된 후로는 아주 깊은 잠에 빠져 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밤 늦게 들어가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여유롭게 아침 조깅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바쁘게 씻고, 화장하고, 아들 둘과 간단하게 아침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를 해 놓고, 청소기라도 후딱 돌리고 나면 출근한다. 회사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나면, 저녁에는 이리저리 모임에 참석하기 바쁘다.
한기는 선화를 여기저기 모임에 데리고 다녀 줬다. 한기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 등을 쳐다볼 때마다 먼저 가 버린 남편 생각이 났었다. 그렇다고 그 등에 기대게 될 줄은 예상도 못했다. 어느 순간 선화도 모르게 그 등에 얼굴을 대고 한기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선화는 두 눈을 뜨고 핸드폰을 집어 들고 다시 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손은 운전대를 꽉 잡고, 한 손으로는 스피커폰으로 해 놓은 핸드폰을 꼭 잡고 전화를 걸었다. 걸고 또 걸었다. 받지도 않고 대답도 없는 한기에게 몇 번을 걸고 나서야 시동을 껐다. 허리를 옆으로 굽혀 손을 쭉 뻗어서, 차 바닥에 있는 슬리퍼를 챙겨 신교 차에서 내렸다.
갑자기 옅은 어둠으로 꽉 찬 작은 차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한기는 기름기가 둥둥 떠 있는 해장국을 내려다봤다. 기름기가 둥둥 떠 있는 빨간 국물에 검붉은 선지 덩어리들이 깍둑깍둑 얹어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송송 썰어진 파가 뿌려져 있다. 한기는 먹지 않고 내려다만 봤다.
민기는 해장국 안에 밥을 말려다 한기를 쳐다보며 작은아버지의 팔을 툭툭 쳤다. 작은아버지는 이제 막 해장국 안에 말은 밥을 한술 뜨던 참이었다.
“너 무슨 일 있냐? 싸운 거야? 쫓겨난 거야?”
한기는 쳐다보지는 않으면서 해장국을 떠먹으며 묻는 작은아버지 쪽을 쳐다본다는 게 민기와 눈이 마주쳤다. 민기는 한기와 눈이 마주치자 재빠르게 시선을 내려 피하더니 급히 해장국 한 수저를 떠먹다가 뜨겁다는 손바닥으로 입을 부채질 했다. 뜨겁지도 않냐는 표정으로 잘만 떠먹고 있는 작은아버지를 쳐다봤다.
한기는 해장국을 천천히 반 수저씩 떠먹는 작은아버지를 쳐다봤다. 작은아버지는 항상 뭔가를 조심스레 물을 때면 상대를 쳐다보지 않았다.
한기는 수저를 들고 해장국에 밥을 말았다.
“아니에요. 호진이랑 둘이 코로나 걸렸대요. 격리해야 하니 이번만 시골에서 좀 추석 보내고 오라더라고요.”
한기의 목소리는 덤덤한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민기와 작은아버지는 그런 민기의 미세한 떨림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거 같다. 아니면 그냥 피곤하구나,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민기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일찍 일어나 큰 집에나 따라가지 술은 왜 그렇게 퍼마셔? 사업이 잘 안돼?”
작은아버지는 뻘건 국물의 선지를 떠먹느라 발갛게 물든 입술로 그제야 한기를 힐끔 쳐다봤다.
“요즘 다 그렇죠, 뭐.”
한기의 목소리는 애써 무덤덤한 듯 무뚝뚝하게 내뱉고 있었다.
민기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기가 차 운전석에서 보였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기가 차 운전석에 앉아 두 손으로 핸들을 내리치고 있었다. 꽤 힘 있게 내리치는 거 같은데 그걸로도 분이 안 풀리는지 내리치고 또 내리치고 있었다.
한기의 얼굴은 짜증으로 가득해 보였다. 괴로운 건지 힘든 건지,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봤다. 한기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기의 눈물이 분명히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절대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사람이니 울 수는 있어도 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한기였다.
민기가 아는 한, 한기는 그랬다. 그런 한기가 무덤덤하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별일은 없다는 듯 넘겨 버리고 있다.
한기는 민기가 자신을 힐끔힐끔 곁눈질하고 있는걸 신경쓸 새 없이 해장국을 퍼서 우걱우걱 입안에 우겨 넣었다. 누군가의 눈치나 기분을 신경 쓸 구석이 없었다. 바지 뒷주머니에서는 핸드폰이 계속 진동을 울리고 있다. 끊기면 바로 또 진동이 울리고, 끊겼다 싶으면 또 진동이 울리고 있다. 발신자를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거 같다. 선화일 거다.
선화는 항상 뾰족구두를 또각또각 신고 다니며 자신이 아름다운 여자라고 착가하고 있었다. 깔깔거리며 웃는 목소리로 “내가 어제 많이도 빨아 줬잖아. 기억은 나?”하며 얼굴 하나 안 빨개지고 아양을 떠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였다. 그 거리낌 없이, 부끄럼 없이 발가벗겨지는 가벼움이 있었다. 희진과는 너무 달랐다. 항상 집 안도, 챙겨 입고 다니는 품새도, 호진이를 교육 시키고 케어 하는 수준도, 한기를 내조하는 급도 달랐다. 해외에서 비즈니스 하다 알게 된, 스펙도 명품급인 또래 부사장이 희진의 내조에 한기 보다 희진을 더 칭찬하고 돌아갔다. 한기는 항상 그런 희진 앞에서 자존심이 쪼그라들었다. 한기는 항상 그런 희진 때문에 은근히 구석으로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희진은 그런 한기의 기분과 감정 따위에 눈치란 없었다. 희진은 항상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느라 집중할 뿐이다.
한기는 그런 희진이 걸어 오는 대화를 무시했다. 집에서 애나 돌보고, 살림이나 하고, 요리나 하면서, 바깥일을 뭘 아냐는 식으로 쥐어박듯이 칼로 자르듯 딱 잘라내는 말로 할퀴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말하면 알아?”, “네 또래 여자들 밖에서 영업 잘하고 돈만 잘 번다.”, “애 학원은 뭐 하러 그렇게 데리고 다녀? 그런다고 애가 재벌 되냐? 나는 시골에서 학원 하나 안 다니고 살았어도 돈 벌어 오잖아.”, “그 어그부츠 좀 신고 다니지 마라. 그게 여자냐?”
그런 한기를 선화는 발가벗겨진 민낯 그대로를 애무했다. 다 비치는 얇은 한복의 속옷만 입고 나를 마음껏 안아 보라는 듯 은근한 교태를 부렸다. 한기의 커다랗고 거친 그것을 깔깔대고 빨아대며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부딪겨 왔다. 뾰족구두를 또각또각 거리며 쉴 틈 없이 살아가느라 쌓아 온 벽이 손가락 하나로 톡 건드리니 금세 무너져 안겼다.
한기는 너무 다른 희진과 선화 사이를 오가며 낮과 밤을 따로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로서의 이중생활을 남자답게, 호탕하게, 당연하단 듯이 삼 년을 은밀하게 숨겨 왔다. 희진이가 알게 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었다.
한기는 아버지처럼 희진 앞에서 대놓고 쾌락을 엿보게 하진 않았다. 내가 남자니까 당연한 거라고, 아버지처럼 희진을 옆에 앉혀 놓고 모욕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도 희진은 친밀하도록 바로 옆에서 자신의 화를 숨기고 증거를 철저히 준비한 뒤 한기를 단번에 배신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배신하진 않았었다. 한기의 기억을 그랬다. 그건 배신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도망갔을 뿐이다. 커다란 캐리어 하나 손에 들고 거의 가진 거 없이 스스로 나갔을 뿐이다. 어머니는 그랬다.
그런데 희진은 한기를 내쫓으려 하고 있다. 일 원 한 푼 없이 빈 몸으로 손을 맞잡고 식장을 걸어 들어가고, 희진의 명의로 된 집으로 기어들어가 살았던 한기를 빈 몸으로 내쫓으려 하고 있다. 그래도 십 년이다. 함께 한 집에서 호진이를 낳고 키우며 살아온 게 십 년이다. 한기는 알고 있다. 십 년 정도 살았으면 아무리 그래도 재산 분할을 아예 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기가 빈 몸으로 쫓겨나지 않으려면 합의 밖에는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