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무게에 짓눌려 깨고 싶지 않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화는 다시 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운전대를 꼭 잡은 채 검지손가락이 자꾸만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연결 신호음이 길게 울려도 전화 연결은 되지 않았다. 음성 메시지로 넘어 가 버렸다.
선화는 신경질적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길게 울릴 뿐이었다. 음성 메시지로 넘어 가 버릴 뿐이었다. 전화를 받고 응답해야 할 한기의 목소리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선화는 신호 앞에서 정차한 채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다들 평온해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너무도 명확한 듯 길을 건너는 발걸음마다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주저함도 없었다. 어쩌다 멈춰서 멍하니 쳐다보게 되는 타인들의 발걸음과 표정은 세상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기 위해서만 바둥바둥 바쁘게 움직이던 선화의 발걸음과 또 달라 보였다. 남의 지갑과 주머니에서 나의 통장으로 옮겨지는 돈을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살아간다는 건 생각할 틈이 없다. 겉으로 웃고 있으면서도 속으론 먹고 살며 책임지기 위해 다른 여유를 찾을 틈이 없다. 그저 뛰고, 달리고, 내 속이라도 내 줄 듯 무조건 웃으며 한 푼이라도 내 지갑과 주머니로 옮겨 오게 해야 했다.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선화의 두 눈으로 잣미 멈춰서 단아 내는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과 발걸음과 표정들은 왜 그리 덤덤하거나 여유롭게만 느껴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물론 한두 사람 정도는 빠른 발걸음으로 뛰듯이 길을 가는 사람도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천천히 걸어서는, 그저 그렇게 툭툭 덤덤히 걸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을 듯 아등바등 재촉만 해 대는 발걸음으로는 안 보였다. 일 분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사람과의 약속 시간이 늦을 거 같아서, 하루를 빨리 끝내고 자신만의 틈새 시간을 즐기고 싶어서, 성격이 급해서 빠르게 걸어가는 발걸음으로만 보였다.
한기의 발걸음만은 달랐었다. 죽어가, 쉴 틈 없이 걸어 다니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들 것처럼 이를 악물고 뛰듯이 걸어 다녔다. 이쪽에서 걷고, 저쪽에서 걷고, 겉으로는 항상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라도 더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소리 없는 발악을 했다. 선화는 꼭 자신보다 더한 안쓰러움을 마주하는 거 같았다. 죽은 남편이 생각나 그 손을 잡아 주며 토닥이고 싶을 정도였다. 꼭 껴안아 주며, 그런 우리니까 잘될거라고 함께 웃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선화는 다시 액셀을 천천히 밟기 시작했다. 칠 년이 넘어 가는 흰색 경차의 기동력이 아직은 쓸만했다. 이 시간도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저 흘려보내지는 하나의 시간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다 지나갈 거라고, 지나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고 싶었다.
희진은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제 키가 백삼십 센티미터인 호진의 뒷모습을 운전석에 앉아서 지켜봤다.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랑 잘 거고, 엄마랑 살 거야.”
희진의 두 눈을 물끄러미 마주 쳐다보며 한 호준의 그 말이 희진에게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씁쓸했다. 호진의 일상이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애착이 거의 없었다. 하루에 몇 번씩 표현하는 사랑한다는 말도, 달라붙고 안기는 애교도, 희진에게만 보여 주는 호진이었다.
한 번은 한기가 자신에게는 왜 안 하냐고 호진에게 묻는데 호준은 이유가 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기의 시선을 피해 희진에게 안겼었다. 희진의 품에서 얼굴을 파묻어 버리고 한기와 얼굴 마주치기를 피했었다.
한기에게 호진의 친권과 양육권을 뺏기고 싶지 않은 희진에게 호진의 엄마 바라기가 다행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아이들처럼 집 앞 놀이터에서 아빠랑 공 한 번 차는 것조차 해 본 적이 없는 호진의 평범한 추억의 부재가 안타까웠다. 왠지 쓰렸다. 항상 동네 친구의 아빠들이 같이 공을 차 주곤 했다. 호진이 세발자전거에서 두발자전거로 떼는 것도 호진의 친구 아빠가 한 시간을 잡아 주며 가르쳐줬다. 정말 소소하고 작은 호진의 일상에서 한기는 항상 없는 존재였다. 호진은 그 빈 자리에 익숙해 갔다.
너무 익숙해져서 한기가 어쩌다 쉬는 날 희진의 등 떠미는 요구에 교회라도 같이 갈라치면 호진이 거부했다. 한기랑 그런 곳에 같이 가기 싫다며 희진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마음의 벽을 내보인 적이 여러 번이다. 어린 아들의 마음속에는 남들과 다른, 단 한 번도 가족을 위해 안쪽에서 노력하지 않는 한기에 대한 냉기가 깊었다.
뭐 하나라도 그저 그렇게, 주변의 평범한 가족들과는 소소한 것부터가 너무도 낯선 한기의 다름이 버거웠다. 어떻게든 지켜보려 호진을 챙기는 일과 가정 안의 일들을 빈 곳 없이, 조금이라도 더러운 곳 없이 부지런히 깔끔하게 닦아내느라 희진은 희진 나름대로 안에서 아둥바둥 했었다.
이제는 호진과 희진, 둘만을 위해서 아등바등해야 할 거 같았다.
희진은 액셀을 천천히 밟으며 운전대를 돌렸다. 고용복지센터부터 가야 했다. 결혼 전에 하던 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닥친 코로나 사태로 모든 게 변해 있었다. 한쪽은 무너지고 있고, 한쪽은 더 올라가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올라가는 쪽도 더 올라갈 곳의 끝을 붙잡고 있는 절벽 같았다. 무너지는 쪽도, 더 올라갈 곳 끝만을 붙잡고 있는 쪽도, 양쪽 다 아슬아슬한 시대였다.
희진은 복지 배움 카드로 실질적인 구직을 위한 자격증을 따 보기로 했다. 결혼 십 년이라는 기간 때문에 재산 분할이 불가피하게 됐다. 처음부터 희진의 명의로 친정에서 해 준 집이라 집은 지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다만 전 재산의 십 퍼센트라도 한기에게 분할분을 내줘야 한다고 했다. 당분간은, 오 개월에서 육 개월 정도는 호준이와 변함없는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계속 뭐라도 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살아내기가 빠듯하고 힘들어질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그저 시간만 흘려보낼 수가 없다. 움직여야 한다. 뭐라도 붙들고 해봐야 답이 나올 거 같았다.
희진은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고용복지센터를 향해 차를 몰았다. 지금의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다면 가 볼 생각조차 안 했을 곳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용복지센터이지만 한 번도 발걸음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간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부지런히 드나들어야 할 곳이 되었다.
결혼 전에 하던 일도 마냥 포기만 할 수는 없다. 희진도 마음을 기댈 뭔가가 필요했다.
희진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단 한기와의 법적 관계부터 정리해야 했다. 조정 기일이 이 십삼 일 후였다. 더 빠르게 잡히길 바랬지만, 법원에서 기일을 잡아 주는데 기본 한 달 뒤라고 했다. 삼 주 뒤라는 날짜도 빠르게 잡힌 거라고 변호사가 그랬다.
희진은 붙잡기로 했다. 뭐든 붙잡고 견디어내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누가 봐도 이혼으로 무너져가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한기와 그 여자가 희진과 호진에게 내던진 상처를 그대로 진물이 나도록 짜내기 싫다. 진물이 나기 전에 소독을 해내고 연고를 발라 회복시켜야 했다. 아니, 회복을 넘어 보란 듯이 아물어야 했다.
“아이고, 이게 뭐라니. 술 냄새에 타는 냄새에 뭔 냄새가...”
한기는 눈을 떠 보려 했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꿈틀댄다고 생각했지만 떠지지는 않았다. 분명히 작은 엄마의 목소리였다.
“촛불 켰었어? 방바닥에 들러 붙어 있는 거 촛농 맞지?”
민기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니, 추석 명절에 지 집에서 지 아버지 제사 안 지내고 왜 여기 와서 처량을 떨어?”
작은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렸다. 한기는 두 눈을 떠 보려 했다. 하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한기의 온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기에도 그 무거움에 눌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잠의 무게가 한기를 한껏 짓누르고 있었다.
“싸운겨?”
“그냥 싸운 게 아닌 거 같은데? 엄마도 봤잖아. 차 안에 앉아 있던 형 모습. 이상하다니까.”
“쫓겨난겨?”
한기는 소리치고 싶었다. 다 들린다고, 그만들 하고 방문 닫고 나가달라고 말이다. 러나 입술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한기는 너무나도 무겁게 한기를 짓누르는 잠의 무게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잠의 무게에 짓눌려 깨고 싶지 않음을 한기는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