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아니요. 안 하셨다고요. 그게 아버지한테는 그렇게 중요해요?
“이놈아 일어나, 절 안 하냐?”
누군가 한기를 깨웠다.
“일어나 이놈아, 아버지한테 절 안 하냐?”
목소리는 점점 더 걸걸하니 분명하게 들렸다. 이상했다. 아버지 목소리 같았다. 십오 년 전에 죽어 버린 아버지 목소리가 한기를 깨우고 있다.
한기는 눈을 떴다.
“왜 아무것도 없어? 술이라도 가져와. 술.”
시골 방 안은 여전히 어둠으로 가득했다. 한기는 일어나 앉았다. 눈을 비비고 애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버지가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얼굴만 창백한 게 아니었다. 온몸이 창백했다. 옷도 아래위로 얇고 하얀 모시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
“술이라도 가져오라고, 술?”
한기는 휘청이며 일어나 신발도 안 신은 채 방 밖의 작은 슈퍼에 발을 내딛었다. 핸드폰 불빛을 켜고 종이컵과 소주 두 병, 기다랗고 하얀 초 한 상자를 챙겨 들고 방 안으로 들어 갔다.
한기는 불을 켜지 않았다. 형광등 보다 초를 밝혀야 할 거 같았다. 얼굴부터 온몸이 창백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랬다. 하얗고 얇은 모시옷을 아래위로 거쳐 입은 아버지의 모습이 그랬다. 분명 한기 앞에서 말하고, 표정을 내보이고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어둠이 가득한 방 한가운데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자신한테 절을 하라고, 술을 가져오라고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혼 같았다.
한기는 소주 두 병과 잔 종이컵을 아버지 앞에 내려놓고 주섬주섬 초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촛농을 방바닥에 떨어뜨려 그 촛농 위에 초를 세워서 고정시켰다. 그렇게 초 서너 개를 밝혔다.
한기는 종이컵 두 개를 꺼내 아버지 앞에 한 개, 자신 앞에 한 개를 놓았다. 소주 한 병을 따서 종이컵 두 개에 반씩 따랐다.
한기는 말없이 몸을 일으켜 절을 두 번 했다. 잠을 깨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아버지한테 절 안 하냐?”
십 오년 전에 죽은 사람이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매일 큰 소리로 호령하고 집어 던지던 사람이다. 어머니를 옆에 앉히고 항상 또 다른 여자들을 품에 앉았던 사람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친 어머니란 사람은 그런 아버지에게 질리다 못해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친 어머니란 사람은 그러함을 일상에서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잘 웃지 않았을 뿐이다. 한기가 커 갈수록 한기에게 어머니로서 틈을 내 주지 않았을 뿐이다. 방 두 개뿐인 좁은 시골의 한집에서 매일 가까이 스치며 생활하면서도 마음의 거리가 있었다. 두 눈빛의 거리가 있었다. 손길의 온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기는 느꼈었다. 아버지의 문제가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이라는 걸 알게 된 나이부터 예상했던 거 같다. 친 어머니라는 사람이 언젠가는 아버지의 곁을, 아버지가 유일하게 손대지 않는 한기의 곁을 떠나리라는 것을 말이다.
“네 친 애미는 잘 있냐?”
혼으로만 느껴지는 아버지가 친 어머니란 사람의 안부를 묻는다.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도 그랬다. 항상 옆에 다른 여자들을 끼고 앉아서 술을 마셔도 친 어머니는 친 어머니였다. 친 어머니의 자리는 친 어머니만의 자리여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친 어머니의 자리가 항상 그냥 그대로 채워져 있길 바랬다.
한기도 그랬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걸리지만 않음 된다고 생각했다. 희진의 자리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음 되는 거였다.
“잘 지내시는 거 같아요.”
“재혼했냐?”
“혼자 사세요.”
아버지는 종이컵의 소주를 단숨에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없이 웃기까지 한다. 한기는 그 웃음이 괴기스러웠다.
한기도 종이컵 안의 소주를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고 목구멍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소주를 두 개의 종이컵에 따랐다.
“너는 왜 혼자냐? 내 손주랑 며느리는 같이 절 안 하냐?”
한기는 종이컵의 소주를 다시금 단숨에 마셔 버리고 다 소주를 따랐다. 또다시 종이컵 안의 소주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종이컵에 소주를 따랐다. 가득 따랐다. 넘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득 따랐다.
비어 있는 아버지의 종이컵에도 소주를 가득 따랐다. 넘치지 않을 정도로만 가득 따랐다.
“아버진, 아버지 인생이 좋았어요?”
아버지는 한기의 질문에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한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애써 미소를 짓는 건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데 입꼬리는 웃음 짓듯 올린 채 물었다.
“네 친 애미는 잘 있냐?”
한기는 피식피식 헛 웃음이 나왔다.
“잘 지내시는 거 같다고 말했잖아요.”
“재혼했냐?”
“아니요. 아니요. 안 하셨다고요. 그게 아버지한테는 그렇게 중요해요?”
한기는 얼굴을 좌우로 강하게 흔들어 보이며 강하게, 단호하게, 역정이 난 듯 소리쳤다. 그러더니 아버지의 두 눈을 매섭고 뚫어져라 마주 쳐다봤다. 눈싸움이라도 하듯 움직임 없이 아버지의 두 눈을 쏘아 봤다.
“네가 뭘 아냐? 피곤하다.”
아버지는 팽하니 뒤돌아 앉았다. 얇고 하얀 모시옷을 입은 아버지의 등이 작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두 어깨가 한없이 축 쳐져 있는 느낌이었다. 항상 집 안을 울리며 크게 소리 지르던 그 아버지가 아닌 거 같았다. 거침없이 부시고, 때리고, 집어 던지며 휘젓던 그 굵은 팔뚝이 아닌 거 같았다. 마를 대로 마른나무의 잔가지처럼 얇았다. 한기의 한 손안에 다 잡아 쥘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둠만 가득한 방 안의 가운데서 온몸과 얼굴이 창백하고, 하얀 모시옷을 걸치고 있으면 더 빛나 보이고 더 커 보일 거 같은데 그 반대였다. 작아 보이는 등이 더 작게 오므라드는 거 같았다. 축 쳐져 있는 두 어깨가 더 오그라드는 거 같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시골 방 안에 가득 찬 어둠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한기는 그나마 방 안으로 비춰주며 타고 있는 촛불을 안주 삼아 종이컵에 있는 소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들이켰다. 들이키고 또 들이키고, 소주 두 병이 남김없이 비워지도록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