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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오리 Sep 15. 2024

잠수 10화

희진이 마시고 있는 와인은 와인이 아니었다. 기도였다.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술잔에 따라지는 술이 투명했다. 먹구름이 술잔 안에 빗줄기라도 주룩주룩 부어줄 듯이 투명했다. 아니지, 빗줄기가 이렇게 투명할 수는 없다. 술이니까, 도수가 높은 술이니까, 마시면 마실수록 취하게 만드는 술이니까 투명한 거다.

한 모금, 두 모금,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갈 때마다 목구멍이 타는 듯 따끔거렸다. 아버지가 처음 술을 따라 줬을 때보다 더 쓰고 따끔거렸다.     


“네 목소리만 들어도 혈압 올라. 나한테 전화 하지 마.”     


웃기지도 않았다. 나 없이 지가 호진이를 어떻게 키울 수나 있다고 생각하는지 까불고 있다. 능력도 없는 여자 주제에 하늘 같은 남편이 벌어다 줬던 생활비가 얼마나 귀한 줄도 모르고 까불고 있다. 소장 받고 바로 생활비를 끊었다. 지가 버텨 봤자지 싶어서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십 년을 집 안에서 설거지에, 청소에, 일어나 아침밥이나 차린 거 빼고 뭐 할 줄 아는 게 있다고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

혼자 돈 벌러 다니느라 바쁜 남편한테 집 안과 호진이 일 신경 안 쓰이게 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기껏해야 동네에서 차 몰고 다니며 호진이 픽업하고, 호진이 라이딩 하고, 호진이랑 전시회나 아이들 행사 구경 다니는 게 다녔을 뿐 사회적 인맥도 없는 우물 안 개구리 주제에 어이가 없다.

뭘 믿고 까부는지 술잔을 입안에 털어 넣을수록 그 쓰디씀이 강렬해졌다. 오늘따라 술잔을 비우고, 비우고, 입안에 털어 넣을수록 점점 더 썼다.     


“씨발, 지가 뭘 할 수 있다고. 나 없으면 누가 지를 봐 준다고 건방지게.”     


술병을 술잔에 기울였는데 술잔이 채워지지 않는다. 술병을 아무리 흔들어도 술잔에 채워지는 게 없다. 채워져야만 할 게 채워지지 않고 있다. 술까지 나를 무시하나 싶다.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나를 무시하나 싶다.

한기는 술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술병이 바닥에 퉁하고 부딪혀 박살 났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바닥 위 사방으로 튀며 나뒹굴었다.

사람들이 바닥에서 깨진 술병과 한기를 쳐다봤다. 한기는 킥킥거리며 혼자 웃었다.     


“손이 미끄러져서, 손이. 그리고 술이 없네? 술병에 술이 없으니까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지.”     


한기는 킥킥거리며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웃었다. 주절주절 혼잣말하며 킥킥거리고 있는 한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식당 직원은 재빨리 빗자루를 챙겨와 흩어진 술병 조각들을 쓸어 모았다. 쓰레받기에 조각조각 깨져버린 술병 조각들을 쓸어 담았다.

식당 직원은 한기의 테이블 위에 술병 하나를 슬그머니 갖다 놨다.

한기는 술병을 따서 술잔에 가득 따랐다. 식당에 앉아 있던 주변 사람들이 한 번씩 한기를 슬쩍 쳐다봤다.

한기는 술이 가득 담긴 술잔을 들고 빤히 쳐다보면서 혼자 말을 했다.     


“씨발, 내가 왕이야. 감히 누가 날 무시해. 감히 누가 내 말을 안 들어? 내가 까라면 까는 거지. 법? 법으로 아무리 지랄해 봐. 비싼 돈 처들여 변호사 선임했다고 네가 이긴 거 같지? 네가 뭐라고 날 이겨. 내가 법인데.”     

한기의 입술은 삐뚤어진 채 웃고 있었다. 한기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된 채 취해 있었다. 한기의 두 눈 속에는 오로지 한기 자신만이 가득 담겨 있는 듯 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있어도 없는 듯, 포커스 아웃인 느낌이었다.                         






선화는 한 손에 남편의 사진을 들고, 냉장고에서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맥주 한 캔을 꺼내 들고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베란다 문 앞으로 갔다. 그대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맥주 캔의 냉기가 짜릿하게 느껴졌다.

선화는 무릎 위에 남편의 사진을 내려놨다. 양쪽으로 활짝 열린 베란다 창틀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선화의 두 눈 속에는 밤하늘에는 없는 별들이 가득 담겨 있는 듯 했다.

선화는 한 손으로 캔 맥주를 따서 한 모금 들이마셨다. 다른 한 손으로는 남편의 사진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용히 팝송의 노래 가사를 흥얼거린다.     


“We mass you on your side of the bed, mmm, Still got your things here And they stare at me like souvenirs Don’t wanna let you out my head”                         






잠든 호진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희진은 이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한기가 없이 온전히 호진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직장부터 찾아야 한다. 십 년을 집에서 주부로만 살았다. 맘 카페가 그 지역의 소통과 동네 자영업자들의 광고 활용 공간으로 활성화 되기도 했지만, 남편이 열심히 돈 벌러 간 사이에 브런치 카페에서 돈이나 쓰는 맘충이라는 단어가 유행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희진이 나이 사십, 십 년이라는 경력 단절 아줌마가 되어 보니 제대로된 직장에 이력서를 써넣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나이, 이력서는 얼마든지 내 볼 수 있지만, 잘 쳐다봐 주지도 않는다는 게 현실이다.

코로나가 터지고 삼 년이 넘어가는 일 년 전부터 한기는 술만 마시고 들어오면 희진에게 한숨을 내뱉으며 해 오던 말들이 있었다.     


“요즘 네 나이 또래 여자들 밖에서 돈 잘 벌더라. 영업도 잘해.”     


“너도 이제 나가서 돈 좀 벌어라.”     


호진이와 희진 자신을 위해서라도 돈벌이가 되는 일거리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불이 꺼진 거실로 나와 호진이 잠든 방의 방문을 닫는데 식탁 위 조명을 켜 놓고 식탁 앞에 앉아 있던 아빠가 와인 잔을 들어 보이며 애써 웃어 보였다. 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와 마주 앉았다. 아빠가 내미는 와인 잔을 받아 들었다. 아빠가 따라주는 와인을 받아 천천히 부드럽게 들이마셨다. 취하고 싶었다.     

“두렵니?”     

희진은 아빠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빠는 희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고 계신 거 같았다.

희진은 아빠의 두 시선을 피해 말없이 아빠가 따라주는 와인을 쳐다봤다.      

“다 안다. 지금 네 결정은 절대 후회 없을 내 딸이지만, 보란 듯이 네가 가장으로서 호진이를 지키며 잘 살아갈지 당장은 두려울 거란 거 이 아빠가 안다.”     

희진은 아빠가 따라준 와인을 또다시 천천히 부드럽게 들이마셨다. 빈 와인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아빠의 두 눈을 쳐다봤다. 아빠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애써 두 눈으로 희진을 토닥거리고 있다. 아빠는 와인을 따라주며 희진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너는 잘할 거라고, 넌 잘못한 거 없으니 상처받은 마음과 힘들고 화가 나는 네 속을 털어 버리라고, 잊어버리라고 말이다.

희진이 마시고 있는 와인은 와인이 아니었다. 말없이 희진의 속을 들여다보는 기도였다. 위로하고 토닥거리며 응원하는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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