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것처럼 잠겨 버렸다.
남편의 사진이 웃고 있다. 선화는 그런 남편의 사진을 멍하니 쳐다봤다. 중학생 아들이 절을 올리고 있다. 초등학생 둘째 아들은 그런 형을 가만히 쳐다보고 서서 기다리고 있다. 선화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형이 하는 대로 검은색 티에 검은색 바지를 챙겨 입었다. 형이 향을 피우고 절하는 모습을 유심히도 지켜보며 서 있다.
선화는 다리와 팔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다가도 시선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제사상 위에 올려져 있는 남편의 사진을 정면으로 마주 보다가도 고개가 살짝 다른 곳으로 떨구어졌다.
‘나는 상간녀가 아냐.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러면 안 돼. 난 나를 너무 사랑해.’
선화는 한기 와이프에게 미안함 따위는 갖지 않기로 했다. 상처 준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화 자신만 생각하기로 했다. 솔직히 미안하지도 않았다. 부부 관계의 문제일 뿐이지 선화 때문이 아니다.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해.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선화는 나란히 절을 올리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선화의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선화의 아이들은 이미 팔 년 전에 아빠를 사고로 잃은 아픔을 겪었다. 한기 아이가 겪는 이혼의 아픔은 별거 아니다. 선화의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면 됐다. 선화의 아이들이 이 일로 상처받거나 고통 받지만 않으면 된다. 그 아이는 선화에게 완전한 타인이다. 타인의 아이가 받는 고통과 상처까지 선화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선화가 상간녀 판결만 안 받으면 되는 문제였다. 선화는 남편이 없는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소중한 두 아이를 온전히 키워 내기 위해, 사랑하는 내 자신을 날씬하게 가꾸어 가며 열심히 살아가는 가장일 뿐이다. 잘못한 게 없다.
“언니, 요즘 가정 법원은 민원실 문 열기 전부터 줄 서 있대. 불륜도 많고 이혼도 너무 많아서. 불륜 저지른 년 놈들이 더 뻔뻔한 시대라니까. 지도 아이 키우는 엄마 아빠면서 미안한 게 없어. TV 프로그램에 맨 이혼 관련 프로그램 방송되는 거 보면 몰라? 오죽함 요즘 젊은 애들은 혼인 신고도 안 하고 살다가 싫으면 법적 이혼 없이 헤어진대. 사실혼일 뿐인 거야. 우리 애들 시대가 그렇게 갈 거라 하더라고. 헤어지고 또 금방 새로운 이성 만나고, 어른들이나 우리가 보기엔 너무 쉽다고, 서로 상처만 자꾸 남기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변해가는 시대가 그렇대. 오죽하면 결혼해도 혼인 신고도 안 하고 산다잖아. 싫어지면 서류상 빨간 줄 안 남기고 헤어져야 하니까. 살아 보고 결정하자고.”
희진은 헛웃음만 나왔다. 미쳐 가는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동네 동생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거 같다.
그래도 아니다. 화가 난다. 미안함도 없다니, 뻔뻔하다니, 조금 더 늦게 태어나지 않은 게 나았던 걸까 싶다.
이혼이란 걸 하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그것도 남편의 상간으로 이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다. 희진이 바보였던 거다. 신혼 때부터 왠지 불안하도록 느껴지는 직감이 있었다. 한기가 끼가 있다는걸, 놀고 즐기고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 하는 거 같다는 걸 말이다. 어쩌면 희진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만 할 거 같은 예감을 항상 마음 구석구석에 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정을 잘 돌보면 된다고, 이해해 주는 척 참아 주면 된다고, 그러면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애써 부정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희진의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다 참아 주고 맞춰 주며 버텨온 것일지도 모른다. 백 퍼센트 다 부정만 하기엔 호진이의 존재가 희진 앞에 있었다. 한기를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호진이까지 그 부정 속에 조금이라도 섞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호진이한테 상처를 주게 될까 봐 애써 참아 왔던 거 같다. 희진이가 지키고 싶은 건 희진이 자신만이 아니었다. 호진이었다.
한기가 상처를 준 건 희진과 호진이었다. 그 여자의 아이들은 상처받지 않았다. 한기는 그 여자의 아이들에게는 그 어떤 할큄의 진동조차도 전달한 적이 없다. 그 여자는 자신의 아이들은 상처받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기에 뻔뻔하게 굴 것이다. 한기가 그 여자에게 준 건 방관할 수 있는 권리였다. 희진과 호진에게 할큄과 상처를 방관하며 이차 가해를 할 수 있는 또 다른 이탈의 자유를 준 것이다.
희진은 그게 더 화가 났다. 한기는 이제 호진과 희진의 가족이 아니었다.
한기는 거실 바닥을 굳은 얼굴로 쳐다봤다. 뒤꿈치부터 신발에서 빼내려다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갈기갈기 할퀴어진 째 찢겨 있다. 거실 바닥에 보기 흉하게 박살 난 채 나뒹굴고 있다. 거실 위에 발을 내딛기가 망설여졌다.
매일 출근할 때 걸어 나갔다가 퇴근하면 당연한 듯 돌아오던 공간이었다. 한기의 숨소리와 발걸음이 희진과 호진에게 당연히 부여돼야 하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 안에서 한기의 흔적이 갈기갈기 부서지고 찢기고 있다.
한기는 등을 돌렸다. 대문 손잡이를 꽉 잡고 망설였다. 그 망설임이 자존심을 더 다치게 할 거란 걸 깨달았다.
한기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대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것처럼 잠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