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으로 가득한, 아무도 없는 그 시골 방이 편했다.
한기는 휘청거리며 걷고 걸었다. 차 운전석에 타 시동 걸고도 도저히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앞 차창으로 보이는 도로가 두 겹으로 보였다. 눈을 두세 번 비벼 봐도 한 겹으로 겹쳐 보이지 않았다. 대리를 부를까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한기는 차에서 내려 일단 걷고 걸었다. 걷다가 택시를 잡아 탔다. 자신도 모르게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 달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골의 그 방만 생각났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어둠의 그 방만 생각났다. 그 어둠 속에 누워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도 편히 잠들 수 있을 거 같았다.
외로웠다. 외로웠지만 그 외로움이 싫으면서도 낯설지는 않았다. 낯설지는 않지만 싫었다. 그 싫음 때문에 한기는 더더욱 애정 관계에 매달렸다. 그 관계들이 그 외로움을 완전히 씻겨 주는 건 아니었다. 한 여자를 만나 관계를 하고, 또 다른 여자를 만나 관계를 해도 계속 외로웠다. 뭔가 벗겨낼 수 없는 그림자가 한기를 항상 옳아 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한기 마음대로 벗을 수도 없고, 벗겨낼 수도 없는 씁쓸함이었다. 그 처절한 씁쓸함에 대한 스트레스는 한기를 점점 희진으로부터 밖으로 겉돌게만 했다.
희진은 그런 한기의 문제를 절대 공감할 수 없다. 희진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라온 여자였다. 자신과는 너무 달랐다. 울고불고 징징댈 장인어른과 장모님과 뒤에 있었다. 그렇다고 희진이 그런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일일이 징징대고 다 털어놓는 성격도 아니었다. 희진은 참고 참다가 자신의 인내심에 한계가 바닥으로 내리친다 싶을 때만 터트리는 성격이다.
어찌 보면 한기가 희진의 한계를 바닥으로 내리 끌어 내린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 해도 또다시 버림받는 기분은 더럽다.
“아저씨 세워 주세요. 토할 거 같으니까 잠깐 내려 주세요.”
택시는 갑자기 다리 위 고속도로변 옆에 차를 세우고 깜빡이를 켰다. 한기는 차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다리 난간 위에 섰다. 허리를 숙이고 헛 구역질을 했다. 입안에서 토사물은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굵은 가래만 바닥 위에 뱉어 냈다.
한기는 다리 아래, 말없이 흐르고 있는 한강 줄기를 내려다봤다. 순간 속에서 뭔가가 솟구쳐 올랐다.
“내가 얼마나 죽어라 사는데, 내가 얼마나 이 악물고 열심히 사는 줄 네가 알아? 씨발, 알긴 뭘 알아 니 까짓 게.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남자가 살다 보면 그런 거지. 너는 얼마나 깨끗하고 잘났다고? 돈 벌 능력도 없는 게 애 데리고 나 없이 얼마나 버티겠다고.”
한기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말없이 흐르는 한강 줄기를 내려다보며 목이 발개지고 얼굴에 힘이 들어가도록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리고 미친 듯이 웃었다. 아니다. 그냥 보기엔 두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큰 소리로 웃어 재끼는 거 같은데, 웃는 건지 울먹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알아? 네가 외로운 내 속을 몰라준 거지 나는 잘못한 게 없어.’
한기는 외롭다고 말하는 게 싫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외로워서 끊임없이 관계를 즐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 관계 속에서 뭔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아니다, 한기도 모른다. 어쩌면 한기는 그 관계들 속에서 뭔가를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래도 누군가의 신음 소리 속에서, 누군가의 숨 소리 속에서 살아 있다는 걸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그 느낌이 외로운 한기의 끝을 붙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고 버티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한기는 다시 택시에 올라 탔다. 택시 기사는 룸미러로 한기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빠르게 차를 몰았다.
한기는 등과 머리를 기대고 앉아 두 눈을 감았다. 속이 부글거렸다.
희진은 문자 메시지를 여러 번 확인 했다.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분명히 집에서 나간다고 했다. 이혼해 줄 테니 조정으로 합의 하자고 돼 있다. 그래도 십 년 동안 가정을 위해 열심히 돈 벌어 생활비 벌어다 줬으니, 몇 천만 원은 줬으면 좋겠단다. 친권이랑 양육권 넘길 테니 면접 교섭권은 합의해 달란다.
희진은 한기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그대로 캡쳐 떠서 변호사에게 전송했다. 그리고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거실은 희진이 웨딩 사진 액자를 갈기갈기 찢어서 팽개쳐 놓은 그대로였다. 희진은 청소기와 스팀 청소기를 꺼내 들고 청소부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칠십오 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구입해 버릴 수 있는 건 다 쓸어 담았다. 다 정리하고 싶었다. 한기와 살던 이 집에서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 길로 바로 가서 부동산에 집을 내 놓았다.
희진은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나오면서 계산하고 또 계산 했다. 한기와 이혼 소송을 하고 돌아 보니 남은 건 희진의 명의로 해 놓은 주택 담보 대출금을 갚아야 했다. 아직 직업이 없는 희진이 직업을 찾고 경제력을 가질 때까지 대출금부터 전부 상환 해야 했다. 그래야 호진이랑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일 원 한 푼도 없이 빈 몸으로 희진과 결혼하고, 집부터 결혼식에 신혼여행까지 전부 희진의 친정 도움으로 진행해 빈 몸으로 들어와 산 한기였다. 일 원 한푼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변호사가 그랬다. 십 년을 같이 살았기 때문에 재산 분할 문제로 못해도 십 퍼센트라도 줘야 한댔다. 집 팔아서 대출금 갚고 한기에게 최소한의 금액으로 계산해 단 삼천에서 사천만 원이라도 주고 나면 희진과 호준에게 얼마나 남을지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결혼 전 일했던 곳 선배들에게 전화부터 해 보려 한다. 피치 못하게 당분간은 친정에 손도 벌려야 할 거 같다. 호진이 케어 문제로 친정 부모님의 협조도 구해야 할 거 같다. 십 년을 주부로만 살았다. 쉽지 않을 거란 거는 안다.
싑지 않아도 더 이상 한기랑 같은 집에서 얼굴 보고, 그 숨소리 들으며 살다 간 희진과 호진의 미래가 망가질 것만 같았다. 희진의 숨소리가 점점 땅속으로 꺼져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한기는 온기가 전혀 없는 시골 방바닥에 등을 대고, 발을 쭉 뻗은 채 누웠다. 불도 켤 생각이 없었다. 짙은 어둠으로 가득한 그 시골 방이 좋았다. 아무도 없는 그 시골 방이 차라리 곤히 잠들기 편했다.
한기는 그대로 그 어둠의 방 안에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