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야 남자인 거야. 남자가 그렇지, 안 그래?
한기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김한기? 내 아들, 내 새끼. 남자는 다 해도 돼. 그래야 남자인 거야. 남자가 그렇지, 안 그래?”
아버지의 호탕하면서도 걸쭉하게 내뱉던 그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항상 남자, 남자 하던 분이다. 남자니까 다 해도 된다, 남자니까 당연히 그런 거라고 했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쳐맞지 않은 한기였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의 폭력에서 한기는 자유로웠다.
“네 엄마가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사는 거야. 여자가 집에 있으면서 남자가 뭘 하든 그러려니 해 주면 되는 거야. 그래야 남자가 바깥에서 당당하게 큰 소리 치고 다니는 거야. 이 아버지가 네 엄마랑 한주가 미워서가 아냐. 이 아버지는 남자니까, 우리 아들 김한기도 남자니까.”
아버지는 그렇게 한기가 중학교 때 한기에게 술잔을 내어 줬다. 한기가 맛본 첫술 잔은 목구멍을 화끈하게 태울 정도로 따끔했다. 첫맛부터가 쓰고 화끈거렸다.
아버지는 한기에게 처음부터 소맥과 폭탄주까지 권했다. 맥주는 벌컥벌컥 들이마시면 시원했다. 뒤에 남는 배부름이 배 속에서 무겁게 부글부글할 뿐이었다.
아버지에게 지기 싫어 다 받아 마셨다. 두 눈 부릅뜨고 잃어가는 정신을 붙들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버텼다. 화장실에서 가서 토하고, 또 받아 마시고, 화장실로 달려가 또 토하고 받아 마시며 첫술을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폭탄주는 꼭 아버지 같았다. 욱하면 터지고 폭주해 머리속이 빙글빙글 돌도록 실성하게 만드는 아버지 같았다.
어머니와 한주를 향한 아버지의 거친 손버릇이, 발길질이, 집어 던짐이 한기도 좋았던 건 아니다. 그저 방관 했을 뿐이다. 폭탄주를 닮은 아버지의 뇌관을 한기는 그저 같은 남자로서 참견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봐온 아버지의 모습을, 남자는 다 그런 거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을, 한집에서 그냥 받아들이며 살아왔을 뿐이다. 어머니도, 한주도, 그런 아버지를 싫어하면서도 참고 참았다. 어머니와 한주가 아버지의 볼품없고 작은 직사각형의 그 시멘트 집에서 짐을 싸서 나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대들지 않았다. 그냥 받아 들이며 하루하루를 살아 갔었다.
아버지의 작은 땅덩어리 위, 그래도 집이라고 지어진 작은 직사각형 안에서 그냥 살아가는 게 하루하루였다. 서로 다 아는, 아무것도 없는 시골 흙바닥에서 크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좁았다. 뻔했다.
TV를 볼 때마다 언젠가는 저 도시 속으로 올라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을 뿐이다.
“아버지, 남자라서 남자라면 다 그런 거라면서요?”
희진은 한기가 선화와 통화한 내용을 블랙박스에서 확인하고 나서 한기를 벌레 쳐다보듯 했다. 한기를 쳐다보는 두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조차 거부했다. 희진만 거부하는 게 아니었다. 언제나 희진의 껌딱지였던 호진이까지 희진 옆에서 자야 한다며 한기를 돌아 보지 않았다.
한기는 선화를 그냥 남자로서 만났을 뿐이다. 남편으로서 만난 게 아니다. 한기는 희진의 남편이었지, 선화의 남편이 아니다.
결혼할 때부터 돈이 없었던 건 한기의 잘못이 아니다. 좁고 뻔한 시골에서 도시로 혼자 올라와 ‘김한기’라는 석 자를 인정 받기 위해 남자로서 모임도 다양하게 많이 참석했다. 남자로서 ‘김한기’라는 석 자로 성공 못하면 어쩌나 싶은 고민만 한기의 뇌관 속에 가득했다.
남자는 사회 속에서 자신이 인정받는 희열과 통쾌감 속에 살아 가는 사냥꾼이다. 사냥꾼을 사냥꾼답게 살아 가면 된다.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건가?
“아버지가 그랬는데, 아버지가 나한테 말한 게 맞는데. 내가 뭘 잘못한 건데? 대체 내가 뭘 잘못해서 나를 외면하면 안 되는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거부하는데? 왜?”
한기의 두 손은 주먹이 쥐어져 있다. 그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두 눈은 빨갛게 충혈이 됐다.
한기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빠르고 비트 있게 울려 퍼지는 아이돌의 댄스곡이다. 납골당 안의 고요함이 깨져가고 있었다. 한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벨소리가 끊어질 때까지 아버지의 사진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서 있었다.
벨소리가 끊기는가 싶더니 또다시 울렸다. 한기는 받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를 보러 온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핸들을 돌려 엑셀을 밟아 찾아온 곳이 아버지가 있는 납골당이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통화 연결음만 들렸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며 음성으로 넘어 가려 했다. 선화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통화를 해야 했다. 만나야만 했다.
“전화 받으라고, 전화를 받으란 말야.”
선화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한 손으로는 앞치마를 꽉 움켜잡고 있었다.
“언니.”
방문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심호흡했다.
“언니. 갈비찜 해 놓은 거 어딨다고 했지?”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선화는 안에서 잠근 방문을 열었다. 웃어야 했다. 여동생 앞에서 선화는 웃어야만 했다.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사라졌다. 한기는 납골당 입구와 주차된 자신의 차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선뜻 발길이 닿는 곳이 없었다. 누구를 만나야 술잔이라도 나눌 수 있을지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데, 누구라도 만나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술잔이라도 기울여야 하는데, 아버지 제사를 지낼 곳도 추석 음식을 먹을 곳도 어디인지 모를 뿐이다.
텅 빈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희진과 호진은 들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10년 동안 어김없이 새벽에 혼자 일어나 준비해둔 추석 음식으로 시아버지의 제사상을 차리던 일을 이제는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캐리어를 싸 들고 처가로 간 다음 날 낮에 집에 들렸었나 보다. 한기가 사무실에 있던 시간이었다. 처가에서 사 준 제기들이 칠십 오 리터짜리 하얀 쓰레기 봉투에 가득 담겨 버려져 있었다.
퇴근해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 층 현관 입구로 걸어가다가 제기가 담긴 칠십 오 리터짜리 하얀 쓰레기 봉투를 봤다. 한기는 혹시나 했다. 집에 들어가 제기가 진열돼 있던 싱크대 하단 서랍장을 열어 보고야 알았다. 하단 서랍장 안에 쌓여 있던 제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만 덩그러니 서랍장 안 구석의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