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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단편) 기억 저편, 그 첫사랑

그가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다.

by O Ri 작가



“할머니 진짜 그런 분 없어요. 제가 지금 정말 바쁘거든요. 이 번호로 전화 그만 하세요.”


아무래도 차단해야 할 거 같다. 바람 난 남자 친구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핸드폰 번호를 바꾼 지 3개월이다. 그 전에 이 번호를 쓰셨던 분이 3일에 한 번은 꼭 전화를 걸어 대시는 할머니의 남편분이셨나 보다.


“너 어디 사냐?”


나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어폰을 빼는 손짓보다 빨리 제출해야 할 기획안을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너무 바빴다.


“부림동이요.”


한숨이 나왔다. 내가 왜 계속 순순히 대답해 드리고 있는지 아리송하다.


“부림동 어디?”


“한신 아파트요. 됐죠? 할머니 저 진짜 바쁘거든요. 죄송하지만, 이제 할머니 번호 차단 해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서팀장 기획안 아직이야?”


“아뇨, 다 됐습니다. 지금 보냅니다.”


나는 기획안을 부장님의 업무 mai로 전송시켰다. 나는 그제야 두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대로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려 대던 두 손에 힘을 뺐다.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두 눈을 떴다. 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쳐다봤다.


“너 누구니? 그 사람 옆에 있어?”


“그 사람 죽었니?”


나는 ‘흠,’ 하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그 할머니의 번호를 차단 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더는 그 할머니의 전화를 계속 받을 수 없다. 일을 해야 한다. 나는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커리어가 나보다 화려한 연상녀에게 꽂혀 배신한 그 얼굴을 머리속에서 지우고 내 자신이 당당해지고 싶었다. 그런 내 일상으로 그 할머니의 전화가 삐져 들어왔다.





“그래서 차단 했어?”


“했지, 했어. 자꾸 나한테 옆에 있냐고, 아니면 죽었냐고, 너 누구냐고 하시는데.”


나는 캔을 집어 들고 남은 맥주를 다 들이켰다. 아쉬워서 캔을 들고 거꾸로 털었더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에이 참, 퇴근하고 집 앞 편의점 앞에 앉아 캔 맥주 한 잔 따고 들어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잘했어, 잘했어. 어여 들어가. 내일 보자.”


영미는 전화를 후딱 끊어 버렸다.


“아, 이 지지배. 그래. 친구보다 남친이라 이거지? 이씨.”


나는 에휴, 하고 작은 한숨을 내뱉고 일어났다.


“너도 정신 차려. 그 남자랑 평생 갈 거 같냐?”


나는 손을 내 저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쓰레기를 정리하고 집을 향해 걸었다. 캔 맥주 하나만 마셔도 살짝 휘청거리는 내 두 발을 가로등에 의지해 걸었다.





“누구시라고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너 어디 사냐?”


“부림동이요.”


“부림동 어디?”


“한신 아파트요.


나는 아차 싶었다. 너무 바빠서, 부장님께 기획안 내야 하는 정신 없음에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오신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싶다.

이상한 거 치고는 너무나도 점잖게 생기신 신사분이 말끔하게 클래식 양복을 챙겨 입고 값비싸 보이는 차의 뒷문을 열고 있다. 차에서 내린 분은 너무나도 고상해 보이고 고와 보이는 할머니였다.


”너냐?“


할머니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아파트 동 건물을 올려다봤다.


”이런 곳에 숨어 있는 거야? 가자. 그 사람한테.“


나는 손으로 내 머리카락들을 헝클어트렸다. 미쳐 버릴 거 같았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치매에 걸리셔서요. 실례가 된다는 건 알지만 집 안에 그쪽 가족들만 있는 거 확인만 하면 안 되겠습니까?“


”당연히 제 집이니까, 아니 우리 부모님 집이니까 저희 가족들만 있죠. 제가 왜 처음 보는 저 할머니한테 저희 집안을 확인시켜 드려야 하냐고요?“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맥주 기운에 휘청거리는 다리로 어딘가 눕고 싶었다.


”어여, 들어가자. 그 사람한테 안내해라.“


그때 내 앞으로 또 다른 SUV 고급 외제차가 다가와 정차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내 또래로 보이는 성규는 재빨리 할머니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나는 그 젊은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깔끔하고 고급져 보이는 핏 좋은 양복 차림에, ‘뭐지 저 얼굴은?’ 싶도록 잘 생겼다. 짧고 단정하게 정리된 헤어에, 다부지면서도 날씬하게 잘 빠진 전체적인 핏에, 적당히 그을린 채 관리 잘 된 피부에, 할머니에게 팔짱을 끼며 짓는 미소가 빛이 났다.

”할머니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 나랑 집에 가요.“


”안 가. 나는 그 사람만 확인하면 된다.“


”아, 그래요. 그래. 가시죠. 들어가시죠. 들어가세요.“


나는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 성규를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뭘 어쩌자는 건 아니지만 그냥 괜히 할머니 핑계로라도 잠시 붙잡아 두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의 표정은 벙해 있었다. 이 뜬금없음이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해 보려는 표정이었다. 갑작스럽게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살짝 휘청거리는 두 발걸음으로, 딸이 연락도 없이 모시고 들이닥친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아, 잠시만요. 저희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옷을 좀.“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와 할머니를 부축하고 있는 성규의 옷차림을 조심스레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서 나온 엄마와 아빠는 어쩌다 정말 모임이나 초대에만 입고 나가는 정장을 차려입고 나왔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두 손을 입에 대고 킥킥거렸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들어와 거실을 둘러보며 뭔가를 열심히 찾는 눈이더니 묻지도 않고 온 집안을 다 휘 집고 다니며 확인하셨다. 그분이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없네. 진짜 없네. 왜 없어?“


할머니는 넋 나간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앉으셨다.


”너무 실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저희 할머니가 아프셔서요.“


성규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머리를 가리키며 정중하게 죄송해했다. 성규의 얼굴 전체에서 느껴지는 민망함과 어쩔 줄 모르는 정중함의 죄송함이 엄마와 아빠를 더 예의를 차리게 했다.


”아구, 뭐 누구나 말못할 사정은 있는 거지. 그,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사정이 그렇다는데 뭐.“


엄마랑 아빠는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나 배고프다. 배고파. 아줌마 밥 차려.“


할머니는 갑자기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문질러 보이며 허공에다 대고 호통치듯 내질렀다. 성규는 난처해하며 할머니 앞에 다가가 무릎을 구부리고 할머니와 눈을 맞추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할머니,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배고프시면 집에 가서 아줌마한테 밥 차려 달라고 하자.“


”아유, 괜찮아요. 어르신 뭐 좋아하세요. 찬이 평범하고 별거 없긴 한데 괜찮으면 드시고 가세요. 여기와 앉으세요, 어르신.“


엄마는 주방으로 가서 재빨리 식탁에 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망설이며 서 있는 성규에게 아빠는 괜찮다며 손짓을 했다. 아빠는 난처해하는 성규와 할머니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식탁 앞으로 모셨다.


”제 방 구경할래요? 할머니 식사 드실 동안 딱히 할 일 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며 할머니 뒤에 서 있는 성규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성규는 그제야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의 방은 전체적으로 하늘색이었다. 벽지도 하늘색, 천장의 벽지도 구름이 그려져 있는 하늘색 벽지다. 침대 보도, 침대 이불도, 침대 위의 베개도 하늘색이다. 노트북과 만화책이 잔뜩 꽂혀 있는 책상과 옷장만 화이트였다. 한쪽 벽에는 천장에서부터 줄을 달아 놓았다. 그 줄에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의 성장 과정 사진이 나란히, 차례대로 대롱대롱 달려 있다.

성규는 내 방에 들어와 잠시 쳐다보고 서 있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피식 웃었다.


”왜요?“


”아, 미안해요. 어릴 때 알던 씩씩하고 멋진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하늘색을 너무 좋아해서. 아마, 지금쯤 자신의 방을 이렇게 꾸며 놨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상에 잠긴 듯한 성규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으로 꾸미지, 자기가 좋아하는 색으로 꾸밀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봤는데...“

”남자라고 안 했는대요.“


”아!“


나는 성규가 나의 성장과정 사진들 앞으로 다가가는 걸 지켜보며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했나 봐요? 짝사랑? 첫사랑?“


”첫사랑이라고 해 두죠.“


”몇 살이세요?“


”33살입니다.“


나는 반가웠다. 나는 벌떡 일어나 성규 옆에 써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도 33살, 동갑이네요. 악수나 하죠.“


그런데 성규가 내 어릴 적의 어느 사진 앞에 멈춰 서서 움직이질 않았다. 뭔가를 확인하거나 찾는 사람처럼 그 사진에서 두 눈을 고정시켜 버렸다.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서지윤?“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성규는 갑자기 내 쪽으로 틀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래서 휘청거렸다. 성규가 그런 나의 허리를 한 손으로 받쳐주었다. 우리는 두 눈이 마주쳤다.


”나 모르겠어? 하성규.“


나는 머릿속으로 그 이름은 되뇌이고, 되뇌었다. 하성규, 기억났다. 이제 막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작고 귀엽기만 했던 귀공자 스타일의 빛이 났던 전학생이었다. 너무 곱고 귀여워서 내가 보디가드처럼 지켜 줬던 그 남자애다.

학교에서 예쁘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왈가닥이고 싸움을 잘했던 나를 건드릴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나는 모범생에 반장이었다. 그런 내가 운동장 한복판에서 ”너 내가 찍었어. 앞으로 내가 지켜 줄게.“라고 선언 했던 그 하성규다.


”기억났나 보네?“


그가 웃고 있다. 나를 내려다보며 빛이 나는 미소로 웃고 있다. 내 기억 저편에 고이 간직해 뒀던 그 시절의 내 첫사랑이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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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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