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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움 Feb 12. 2024

고마워, 나에게 와줘서

한결같음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기에

2008년 12월의 어느 저녁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정식으로 사귄 지  달이 지났을 때였다.(그 시대에는 '사귀자'는 말이 있어야 비로소 연애가 시작되었다, 고 한다.) 퇴근이 더 늦던 나를 매일 기다리며 서 있던 그의 예쁜 미소를 만나는 순간이 너무 기다려져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시절이다. 이 날도 퇴근 후 우리 회사 앞에서 나의 퇴근을 기다리던 그와 데이트를 했고 카페에 비치되어 있던 냅킨에 서로의 장점을 써보았다. 쓰다 보니 너무 웃기고 재미있었던 거다. 서로에 대한 지금의 생각이 바뀌면 업데이트해보자며, 들고 왔고 그렇게 그 냅킨은 16년째 우리 집 서재에 있는 책상에 박제되어 있다. 첫 신혼집에서는 이 책상이 거실에 자리 잡고 있어 이 냅킨 위 우리의 행각은 우리 집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의 이목을 끌었고 함께 상대의 좋은 점을 놀리는 듯, 진심인 듯 적어보며 웃음을 주는 순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내가 남편의 장점을 쓴 메모 (왼쪽), 남편이 나의 장점에 대해 쓴 메모 (오른쪽)

  







"우리 행복이, 사랑이가 나 같은 남자 만나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건 자기 입으로 직.. 언급하는 게 아니라, 같이 살고 있는 내가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처럼 가족이 우선이고, 자상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남자 만났음 해서."

"그건 인정, 그렇지만! 우리 행복이, 사랑이는 더 좋은 남자 만나야지. 오빠보다 훨씬 다정하고 이해심 넓고 돈도 엄청 많은...! 아무튼 자기애, 자신감 충만한 점은 높이 살만해."


본인 입으로, 그것도 무려 우리 딸들이 자기 같은 남자를 만났으면 한다는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모습이 얄미워서 핀잔을 주긴 했지만, 사실 살면 살수록 괜찮은 남편인 건 맞다. 16년 전에 썼던 저 냅킨 위의 그의 장점들은 나의 정서상의 업 앤 다운에 따라 꼴 보기 싫은 점으로 변모되기도 했지만, 시기적, 상황적 이슈를 제외하고 본다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남편으로서는 물론이고 아이들의 아빠로, 사위로, 장남으로서 그는 정말 한결같다. 그리고 지난 1월, 호주에서 열린 행사에서 직업인으로서의 그의 애씀과 성실함, 책임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행복이 4살 무렵, 아빠와 단둘이 부산여행 중 (왼쪽&가운데), 장인어른과 한잔하는 사위(오른쪽)






휴, 사진도 찍어두고 기록해 두길 잘했다. 기록은 기억보다 정확하고 확실하기에...




<나의 감사일기 중에>

# 2020. 04. 20
3. 항상 예쁘다고 해주는 남편한테 고맙다.
요 며칠 오빠한테 짜증 내고 틱틱거렸던 게 미안하다. 오빠가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오빠한테 내 속상한 마음, 미워할 수밖에 없는 마음 좀 알아달라고 저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묵묵하게 내 곁에 있어줘서 (너무 묵묵해서 더 짜증 났지만..!) 고맙다.
아무리 피곤해도 애들이 하자고 하는 거, 내가 부탁하는 거 잘 들어주고, 퇴근하고 돌아와서 뭐 먹고 싶다면 바로 사다 주고... 노력하는 남편이 고맙다.
(감사일기니 고마운 것 우선으로 적어야 한다.... 적어야 한다...!!ㅋㅋㅋ)
아무튼, 오늘 아침은 다시 평온한 아침으로 돌아왔다.
오빠 고마워!!


# 2020. 04. 30
3. 운동 갔다 오니, 오빠랑 아이들이 집 청소를 하고 있다. 깨끗하게 정리되고 있는 집에 오니 참 좋다. 내 생각 많이 해 주고, 배려해 주려고 노력하는 남편에게 고맙다.


# 2020. 05. 17
2. 오빠가 참 좋다.
사랑하는 내 남편, 잘해줘야지.
오빠 고마워♡



찌릿했던 첫 만남, 심쿵했던 세 번째 데이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줬던 연애와 신혼의 나날들...

싸울 일이 뭐가 있을까 싶던 우리는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던, 결혼의 끝을 생각할 만큼의 크나큰 시련과 마주하며 서로에 대해 실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했던 지난한 시간들도 지나왔다. 그 고통스럽던 날들을 지나오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보인다. 2024년 2월에도 여전히 고마운 그에게, 그토록 받고 싶어 하던 편지 한 장 못 써준 지난 생일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나의 마음을 표현해 본다.



마워, 나에게 와줘서

고마워, 나에게 와줘서

고마워, 나에게 와줘서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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