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물욕) (2)
책과 멀어진 고3을 지나 스무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한 나는 말 그대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신나는 캠퍼스라이프를 즐겼다. 미약한 흥미만 가진 채 (사실상 성적 맞춰) 선택한 전공은 그럭저럭 들을 만 했고, 왕복 4시간의 통학을 피하기 위해, 교내 기숙사를 목표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기숙사에 들어온 이후에는 딱, 잘리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신나게 놀았다. 그니까.. 신나게 술을 먹었다는 얘기다. 고삐 풀린 망아지에게는 책 볼 시간이 없었다. 정확히는 책에 마음을 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아주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책과 멀어져갔다.
그랬던 내가 다시 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약 3년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겨울서점’님의 영상을 보게 된 이후이다. 현재 (23.10.27) 기준으로 약 27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계신 대형 북튜버 겨울님은,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진정한 ‘책 덕후’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력을 뽐내는 분이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겨울님의 영상을 틀어두고 지내길 n달이 되었을 즘 느닷없이 나는 ‘책을 사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휩싸인다. 그래. 중요한 건 책을 ‘읽고’ 싶은 게 아니라 ‘사고’ 싶었다는 거다. 내가 가진 보통의 취미들은 대개 그 취미를 즐기기 위한 무엇인가가 ‘사고’ 싶다는 물욕에서 출발한다. (스스로도 좋지 않은 습관임을 알고 있지만 일단 사람이 그렇게 생겨먹었다. 오만 취미를 즐기게 된 지금은 그런 마음을 자제하고자 노력중이긴 한다.) 그렇게 그 ‘사고 싶은’ 마음이 결국 책 구매로 이어졌고, 두 권의 책을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 구매한 책이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 + 증언들 세트’ 인데, 후속작인 증언들이 2020년 1월에 출간되었고 구매 당시 신간이었던 것을 고려했을 때 이제야 (2023년 10월) 시녀이야기를 읽어보겠다고 자취방으로 가져온 나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변명해보자면 ‘사고’ 싶었던 욕구는 구매하고 나니 바로 충족되었고, 욕구가 충족되자 다음에 읽지 뭐~ 하며 미루게 되고, 미루다 보니 진짜 바빠지면서 시간이 없어지는.. 그런 순으로 머리에서 잊혀져갔다. 그렇게 가라앉은 독서(구매)욕은 약 1년 반 가량의 시간이 흐른 후, 학교 도서관에서 국가근로를 하며 서서히 재점화되고 있었다.
요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①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타의적으로 책을 많이 접하게 된 것이 하나이고 ② 유튜브 ‘민음사TV’를 발견한 것이 또 하나이다. ‘민음사TV(이하 민팁)’는 현재를 기준으로 구독자 15만이 넘는 큰 채널이다. 이 채널을 보면서 남의 직장생활을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일인지 처음 알았다. 언젠가 사람들은 모두 관음의 욕구를 가지고 산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민팁은 ‘책’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생산해내는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보여준다는, 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꽤나 매력적으로 느낄만한 컨텐츠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여하튼, 여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나도 그 매력에 빠져버렸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처음엔 그저 재미로 보기 시작하던 게, 점점 책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조금 더 날것의 표현을 써보자면.. 굉장히 있어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맞아, 나는 있어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책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있어 보인다는’ 것은 당연히 물질적 풍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책을 가까이 하는 일상을 살아가고, 그것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독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었다. 사소하게는 사용하는 어휘부터 더 크게는 사고의 깊이까지, 그들은 10년이 넘도록 일관성 있는 두뇌를 가지고 살아가는 나와 달리 꽤 멋진 ‘어른’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민팁을 보며 마케터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혹시라도 운이 좋아 이 글을 관계자분들께서 보게 된다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어릴 때부터 나는 성인이 되고 싶었다. 성인이 되면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시작할 수 있고, 나의 행동과 말에 무게가 생길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미성년자를 벗어나는 게 ‘어른’이 된 것은 아님을 깨달은 건 스무살이 된 직후였다.
스무살의 나는 그저 합법적으로 음주를 즐길 수 있고, 학교에 결석해도 엄마에게 연락이 가지 않는, 그냥 그 정도의 사람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새내기의 눈에 비치던 선배가 되고, 대학생의 눈에 비치던 사회인이 되면서 지금의 나는 한 가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건 바로.. 난 아직 애라는 거다. 응애.
다시 앞선 내용으로 돌아가서- 민팁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필사도 시작했다. 필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인스타그램에서 빼곡하게 글씨가 적혀있는 노트를 찍은 본 것이었지. 그게 참 멋져보였다. (생각해보면 인스타그램은 참 사람들의 ‘있어 보이고 싶은 욕구’를 잘 건드리는 SNS인 것 같다.) 그렇게 한동안 노트와 펜, 책을 들고 다니는 삶을 살았던 때도 있다.
‘필사’라는 취미를 가진 다른 분들은 어떤 방식을 선호하는지 잘 모르지만 일단 나는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면 바로 옮겨 적는 필사를 좋아한다. 마음에 드는 문장에 체크를 해 두었다가 한 번에 몰아서 필사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방식은 처음 그 문장을 읽었을 때의 감동이 덜하고 괜히 깜지 쓰는 기분이 들어 선호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하는 방식이 무조건 옳다는 건 아니다.) 동시에 필사를 해 나갈 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책을 읽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데 있다. 한 번이라도 필사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필사라는 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행위이다. 특히 좋은 책일수록 (받아 적고 싶은 내용이 많아지니까) 하나의 책을 완독하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결국 약간의 후달리는 마음을 안고 빠듯하게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게 내가 하는 필사라는 훌륭한 취미의 아쉬운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