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는 숫자의 메이커 부대에 배치를 받았고, 종교활동 시간에 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았다며 십자가 증표를 편지 속에 보내 주었다. 행군이나 혹한기 훈련 시 받았던 전투식량을 안 먹고 나 맛보게 해 준다며 휴가를 나오면 한두 개 건네주기도 했으니 한편 감동이었으나, 부담이 되었고 이럴수록 제대까지는 함께 해주는 것이 의무라 여겨져 편치 않았다.
전화도 비교적 답답하지 않게 왔고, 편지도 매일 써주니 그의 군대 일상의 대부분이 공유되었다.
행복했다. 글로 마음과 시간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가끔씩 섞여오는 사진 한두 장은 그리움을 더욱 짙게 해 주었고, 애틋함은 날로 커져갔다.
더 행복한 건 그가 없으니 오히려 나의 생활도 안정을 찾아갔다. 연애 때문에 소홀했던 내 일상에 신경 쓸 수 있었고, 단순해진 스캐쥴로 만족도 높은 연애가 되었다.
남자 친구를 군대에 보낸 여자들을 곰신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고무신의 줄임말'이다.
당시에는 남자친구가 속한 사단의 곰신카페에 가입하면 갖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곳을 통해 같은 분대의 동기나 선, 후임 곰신과 알게 되거나, 새로운 남자와 사랑에 빠진. 일명 고무신 거꾸로 신게 되는 고민 상담이나, 휴가 나온 남친이 소홀하게 대해서 서운함을 토로하는 고민, 남친 부모님과 면회를 같이 가는 '체험 시댁 현장'을 찍거나. 특정 데이에 간식 소포를 보낼 때 신박한 간식템을 공유하기도 하는 명랑 발랄하고 깜찍뽀짝한 갖가지 스토리가 넘치는 커뮤니티가 있었다.
나도 그곳에서 남친과 같은 계급, 같은 분대의 곰신에게 카페 채팅을 몇 번 받게 되었다. 그녀는 자대 일정을 잘 모르고 있었고, 남친에게 전화가 자주 오지 않는 것이 최대 고민인지라 내게 정보를 묻거나 내가 위로를 해 주는 관계였다.
들어보니 이들은 입대 한 달 전 불같은 사랑을 했고, 그 기억으로 기다림을 선택한 여자던데 대체 그 여자 남친은 누구길래 이 멀쩡한 여자를 아프게 할까? 남친에게 전화 오면 그 남자에 대해 좀 물어볼 참으로 남친 이름 좀 알자 했다.
그렇게 알게 되었다. 내가 위로해 주던 그녀가 내 남친의 또 다른 여친이었다.
그에게 전화가 온날. 다짜고짜 물었다.
"너 희경이 알아?" 그가 대답을 못한다.
알고 보니 부대에서 두 여자에게 편지와 간식 소포 받는 대스타가 되어 계셨다.
죽 쒔는데 개 줄까?
그간 호시탐탐 노리던 도망칠 기회야 제니야! 마음의 소리다. 나는 그와 결혼을 하게 되면 어쩌지?라는 순진함으로 계속 만나도 항상 걱정이 되었다. 양가의 반대는 당연히 예상되었고, 그의 부모님은 본인 자식도 내치셨는데... 자신이 없었다. 희경아 네가 쟤를 계속 만나봐.
바람이라니? 말없이 병역거부로 감옥을 갔던 날보다 더 큰 원망스러움으로 가득 차서 풀리지 않는 분노가 되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증스러울 수 있을까.
부. 셔. 버. 리. 겠. 어.
어떻게 하면 그를 부대 안에 있을 때 피 말릴 수 있을까? 이 사악한 궁리를 하는 나는 당장 싸대기 날리러 이번 주말에 부대에 면회를 쳐들어가기로 한다. 나도 참 열정적인 여자였다. 도저히 조용히 끝낼 수가 없다.
친구가 알려주었다.
"너 여자가 언제 제일 예뻐야 하는지 알아? 그건 바로 헤어지는 날이야~"
널 이제부터 언니라고 부르마. 아침 일찍 여는 미용실 가서 머리에 힘주어 컬을 넣고 강렬한 새빨간 재킷에 체크 스커트를 입고, 그간 받은 편지와 선물을 다 싸서 곤란해지게 줘버리고 오자! 그리고 뺨을 한 대 쳐버리는 거지! 포천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도착한 포천의 가을 하늘은 한동안 기억날 만큼 아름다웠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한 폭의 풍경화였고,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치면 차가운 기분에 좀 더 그의 뺨을 찰지게 쳐 내릴 수 있겠구나! 다짐되었다.
야외 면회소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이 너무 예뻐서 잠시 내가 여기 왜 온 건지 잊을뻔하면,
잠자리가 머리에 앉다가 어깨에도 앉아주며, 예쁜 하늘을 그만 올려다보게 해 주었다.
잠시 후, 또 얼굴이 반쪽이 된 그가 왔다. 싸 온 짐을 그가 앉는 찰나에 재빨리 일어서서 얼굴에 던져버렸다.
"미친놈. 너 나한테 정말 왜 그래?" 작게 말했어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눈에 보이는 게 없다.
등짝을. 어깨를. 주먹으로 있는 힘껏 마구 내리쳤다. 꿈쩍도 없이 내 주먹을 다 맞고 있어도 내 분이 풀리지 않는다. 이제 대망의 싸대기만 날리면 되는데...
"됐다... 불쌍한 놈... 너 앞으로도 계속 그따위로 살아..."
싸대기 대신 일어나서 숨죽여 앉아 있는 그놈 뒤통수 싸늘히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우르르 쏟아져있는 편지를 가져가 달라고 애원하였고, 너 나한테 쓴 거 주워서 한통한통 다시 읽어보라며 그렇게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에 난 아마 많이 울었을 테지만 그의 뺨을 때리지 않고 온 것은 이상하게 후회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그에게 편지가 한통 왔는데, "네가 나 쓰다듬어 준 게 너한테 뺨을 맞았을 것보다 더 아팠어."라는 말이 있었다.
"이게 또 개소리네" 편지를 찢고 그렇게 지겹고 지겨운 첫 연애가 막을 내렸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를 따라, 친구를 따라.
종종 교회에 나갔다.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상형의 기준이 최소한이라도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과 진심을 배려 없이 대하지 말아야 할 것과.
누군가에게 상처와 배신을 당했어도 나의 성장으로 삼는 법.
그래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나에게 좋은 사람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는 것을 위안 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거짓과 배신으로 상처 주지 않아야겠다는 다짐과
어차피 사랑이 변한다면, 애초에 인격적인 사람과 사랑을 시작하자는 생각으로
만남의 기준이 세워졌다.
그날 집에 와서 "엄마는 내 기도 뭐라고 해?" 물어보았다.
"제니 항상 만남의 축복 주시라고 기도해. 누구를 만나도 축복이 되라고."
그때는 몰랐는데, 이 잘못된 만남이 어쩌면 내게 꼭 필요했던 만남의 축복이었지 싶다.
23년이 지난 이 기억을, 담담히 추억하며 써 내려갈 수 있는 지금의 안정을 준 우리 남편.
이 글을 언제고 본다면, 노여워 말아요 :)
난 이렇게 성숙해져서 자기를 알아보았고, 주님 안에서 당신과 함께 누리는 모든 것이 행복임을 고백합니다.
이별 Tip) 지금 누군가와 헤어지고 싶은 연애 중 이신가요?
A4용지 길게 반 접어 보세요!
그리고 한쪽은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한쪽을 계속 만나야 하는 이유를 써보세요.
답을 찾게 되실 겁니다!
사진 출처 -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