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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영화: 아프리카, 여행자의 멘탈 붕괴

이런 일 겪어 봤어?

by 불드로

# SCENE 1.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손님, 비행기는 이미 떠났는데요.”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직원의 태연한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곳은 세네갈. 파리-다카르 랠리의 종착지이자, 베테랑 여행가인 나의 멘탈이 산산조각 난 출발지였다.

아프리카 여행은 원래 어렵다. 까다로운 비자, 비싼 항공권,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 나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네갈은 도착 첫날부터,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내게 시련을 퍼부었다. 그날 하루 동안 벌어진 기가 막힌 참사들의 기록이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제작한 아프리카 르네상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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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1. 유령 호텔 공항에서 호텔을 찾아가는데, 구글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호텔이 없었다. 몇 번을 헤맨 끝에 찾은 호텔은 간판 하나 없이 굳게 닫힌 철문만 덩그러니 있었다. 간판 없는 호텔이라니. 이것은 앞으로 닥쳐올 혼돈의 서막에 불과했다.


참사 #2. 과거로 달리는 택시 감비아 비자를 받기 위해 택시를 탔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그런데 기사는 내비게이션과 정반대 방향으로 자신 있게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아니잖아!” 나의 절규에도 그는 “내가 가봤어!”라며 우겼고, 결국 도착한 곳은 몇 년 전 이전한 옛 대사관 주소였다. 하루를 통째로 날렸다.


참사 #3. 검은 훈장 허탈한 마음에 숙소로 돌아오는 택시. 앞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 순간, 뽀얀 내 흰색 셔츠에 검은 기름때가 선명한 훈장처럼 새겨졌다.


참사 #4. 신기루 한식당 꼬인 하루를 위로하기 위해 삼겹살에 소주를 찾아 나섰다. 구글 지도를 믿고 3km를 걸어 도착한 곳엔, 식당 대신 흙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아, 구글마저 나를 버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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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5. 역류하는 저녁 식사 우여곡절 끝에 찾은 한식당에서 소주 두 병으로 울분을 삼켰다. 기분 좋게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30년은 족히 됐을 법한 고물 택시의 F1급 난폭 운전에 결국 참지 못하고 길바닥에 저녁 식사를 모두 반납하고 말았다. 셔츠는 기름때와 토사물로 뒤범벅이 되었고, 나는 2km를 터덜터덜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내 모습은 처량함 그 자체였다.


# SCENE 2. 클라이맥스: 유령 비행기

최악의 하루가 지나고, 나는 드디어 감비아로 떠날 준비를 했다. 출발 전날, 항공사에서 ‘오후 4시 비행기가 7시로 지연되었다’는 친절한 안내 메일까지 보내왔다. 하지만 이곳은 아프리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항에 2시에 도착했다.

7시 출발이라는 말을 믿고 라운지에서 여유를 부리다 출발 40분 전에 게이트로 나갔다. 그런데 비행기가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감비아행 비행기 어디 있나요?” “그 비행기요? 5시 반에 떠나서 벌써 도착했겠네요.” “네? 7시 출발이라고 메일까지 보내놓고 무슨 소리예요!” “우리는 5시 반에 출발한다고 방송 계속했는데요? 못 들은 당신 잘못이죠.”

적반하장이었다. 상황을 보니, 승객이 일찍 모였다고 그냥 출발해버린 것이다. 안내 메일을 믿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항의 끝에 겨우 이틀 뒤 비행기 표를 구했지만, 감비아 호텔 예약과 모든 일정이 날아갔다. 영혼이 가출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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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3. 쇼생크 탈출, 그리고 자유

이틀 뒤, 다시 찾은 공항.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나를 붙잡았다. “이틀 전 출국 도장은 있는데, 입국 도장이 없네? 팁 좀 주면 해결해 줄게.”

나는 체념했다. 이 혼돈의 땅에서 더 이상 싸울 에너지가 없었다. 얼마간의 팁을 쥐여주고 마침내 감비아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고레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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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여버린 일정 덕분에 우연히 들른 ‘고레 섬’. 수백 년간 2천만 명의 노예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나갔던 ‘노예의 집’ 앞에 섰다. 그곳에는 넬슨 만델라의 말이 적혀 있었다.

“자유란 단순히 쇠사슬을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향상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노예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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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글귀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나도 드디어 아프리카를 탈출하여, 자유를 얻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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