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논리의 동물을 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기억할 일이다. 우리는 감정의 동물, 편견으로 마음이 분주하고 자존심과 허영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 데일 카네기
"쌤은 자존심이 쎈 편이라고 생각해요 아님 아니라고 생각해요?"
같은 과목을 담당하던 P쌤이 내게 물었다. 그러고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렇게 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내 대답은 사실 궁금하지 않았다는 듯 "아니, 난 쌤 자존심 엄청 강하다고 생각해. 특히나 지식적인 부분에서는!" 하고 답정너인 그녀는 홱 돌아서 버렸다. 갑자기 무슨 봉변인지, 그녀가 왜 그러는지 처음엔 알 수가 없었다.
중학생일 때 만났던 선생님께서 차리신 학원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했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이 다가올 즈음 도와달라는 선생님의 요청에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선생님과 함께 했던 것이다. 보통 처음이라는 것은 설렘, 호기심, 두려움 등 여러 감정이 함께 하는 일이지만 내 경우엔 걱정이 앞섰다. 성격상 만족할 만큼 준비되지 않은 일은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20살 대학 새내기가 고작 4살 차이 나는 중3 아이들 앞에 서려니 강의 연습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 첫 제자들이 지금 마흔 언저리다. 세월 참.) 첫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내심 불안했던 선생님은 내 강의를 엿듣고 계셨는지 "너 처음 아니지? 엄청 잘하는데?" 하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렇게 날마다 일취월장이라며 다독여주신 선생님 덕분에 강의에 대한 매력과 보람 그리고 자부심을 느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학기 중에도 내 학업스케줄에 맞출 수 있는 학원에서 강의를 이어갔다. 학생이 할 수 있는 알바치고 시간당 페이가 나쁘지 않았기에 계속했던 부분도 있었고, 덕분에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을 수 있어 감사했다. 다만 취업에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당장 쓸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 보니 좋은 기회들을 여러 번 놓치고 결국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졸업하고도 학원 강의 일을 했었다.
그녀는 내가 강의 일을 한 지 5년 차가 되던 즈음 들어갔던 학원에서 먼저 자리 잡은, 이를 테면 직장 선배였다. 처음 그녀는 살뜰하진 않아도 잘 대해주려 노력했었다. 그 마음의 하나였는지 자신이 만들었던 테스트지를 필요하면 사용하라며 복사해 주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받아두었지만 5년 차인 나도 나름의 스타일이 있었고 컴퓨터를 이용해 작성한 것은 물론 직접 쓰고 그려서 만든 자료도 웬만큼 있었기에 사용할 일은 딱히 없었다. 어느 날은 아이들 쪽지 시험을 볼 요량으로 문제집 한 권의 부록을 참고하여 추가 자료를 만들고 있었고, 그런 나를 바로 옆에 있던 그녀가 힐끗 거리며 보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만든 테스트지로 쪽지시험을 보고 나와 채점을 하고 있으니 그녀는 " 어, 내가 준 테스트지 썼구나!" 하는 것이다. "네? 이거 제가 OO교재 참고해서 만든 건데요?".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닌데, 맞는데' 하는 생각을 하는 듯 살짝 당황한 느낌이었지만 웃던 얼굴에서 급격히 냉랭해졌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민망했을 수 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고, 한 글자 한 글자 내 손으로 직접 쓰고 그려서 만든 시험지를 그녀의 평안을 위해 당신의 것이었다고 말을 바꿔주기엔 억울했다.
그 후로 한동안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냈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듯 아닌 듯 내게 거리를 두었고 며칠이 지난 뒤 자존심이 세니 마니 하는 말을 내게 던졌던 것이다. 황당했고 기분이 상했지만 불편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갈등 관계를 견뎌내기 어려워하는 내가 편하고 싶어서였을 테다.수업시간, 개념 설명 후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동안 익숙하지 않은 종교 모임에 가려 급하게 퇴근할 그녀에게 주려고 마음 바쁜 와중에 쪽지 같은 편지를 썼다.
' 선생님 혹시 지난번 일로 마음이 상하셨나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혹여 그랬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중략) 서로 쌓아두는 것 없이 잘 지내고 싶어 제 입장을 먼저 말씀드려요.'
누군가는 그것이 사과의 편지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사과라기보다 엉킨 매듭을 풀기 위한 시작이었고, 답으로 그녀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나름의 노력을 한 두 번 더 했지만 틀어진 그녀의 마음은 돌릴 수 없었고 나 또한 더 이상 애쓰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결혼 준비를 하던 내게 웬일로 그녀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미 내 마음도 돌아선 뒤라 반갑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이 많았던 나는 그녀까지 마음에 둘 여유가 없어 별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내 결혼식에 그녀가 참석한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학원 사람들 모두를 초대한 것이지만 그녀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기에 의외였다. 그래도 축복해 주는 자리에 와 준다니 내심 고마웠고 나보다 세 살 많다더니 언니인 건 맞네 했다. 결혼식을 올렸던 웨딩홀은 지역 내 새로 오픈한 곳이었고 셰프가 직접 눈앞에서 요리를 해 주는 그 당시 흔하지 않은 뷔페가 함께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식비가 비싼 편이었다. 결혼식에 와서 편하게 식사하시고 가라고 학원 사람들에게 얘기했지만, 비싼 식비에 일부 보태자며 강사들 사이에서 인당 얼마씩 모아서 축의금을 내자고 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온다던 그녀가 안 온다고 했고 결국 그녀는 나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녀의 절친 강사와 함께.
살아오면서 자존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부부간에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 하고 서로의 역린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는 보았다. 남자에게 역린은 마음 가장 바닥에 있는 자신만의 지키고 싶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라는 것도. 운동하지 않아도 근육이 잘 붙는다고 했었고 결혼 후에도 한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한의원에 가보니, 생긴 건 여자라도 몸이 남자라서 그렇다던 그녀의 자존심을 내가 건드렸던 것일까. 그녀의 물음에 그다지 세지 않은 것 같다고 대답했던 나였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오해받고 싶지 않았고 지고 싶지 않았던 나의 자존심 때문에 오랫동안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그녀의 오해에도 그렇다고 대답하고 대신 그녀와 편하게 지냈다면 내 자존심은 괜찮았을까. 아마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이겨보려 했을 것 같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 자신도 몰랐던 내 모습을 그녀는 보았던 건지 혹은 선배이자 언니인 자신에게 맞춰주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듯 보였을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자존심 : 자기에 대해 일반화된 긍정적인 태도. 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 - 위키백과
극악무도한 범죄자조차 자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며 단지 자신을 방어했을 뿐이라고 믿는다고 한다. 하물며 보통 사람은 더더욱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데일 카네기는 책을 통해 말했다. 아마 자존심이 자신을 보는 긍정적인 태도이고, 자신을 보호하며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장치로 있기에 그런 것일까 생각해 본다. 아직 철학적인 사고와 고찰이 부족하여 글을 끝마칠 마땅한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40년을 넘게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경험을 했다지만 여전히 나는 융통성이 부족하기에 더 많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나를 알아가고 그것을 통해 조금 더 둥글둥글 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며칠 전 찍은 남쪽나라 매화이다. 내겐 아직 얄미운 그녀도 나도 이 꽃을 보는 동안은 행복해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