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스러운 어머님과 그녀의 딸
이름도 얼굴도 말투도 예쁜데 전교 1등에 리더십도 갖추었고 더해서 친구들에게 인기까지 있는, 그야말로 엄친딸인 중1 서희. 와중에 외동이었다. 당시만 해도 외동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외동에 대한 선입견이 있던 나는 서희가 더 특별해 보였다. 어머님과 상담을 할 때면 어떻게 아이를 이렇게 예쁘게 키우셨냐는 질문이 나도 모르게 나오지만, 부족함 많은 당신의 아이를 예쁜 눈으로 봐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우아하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차분히 말씀하셨다. 두 손을 배꼽 언저리에 살포시 포개서 올리고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는 서희를 볼 때마다 나중에 나도 저런 딸이 있다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실감할 것 같았다.
모델 같은 모녀
하얀 피부에 머리는 작고 몸은 말랐으며 키는 큰, 딱 모델 같은 모습의 채아. 말수는 적었지만 조용조용 꼭 필요한 말은 하는 차분한 중2. 결혼을 준비하던 시기에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함구하고 있었지만 옆 반 담임강사에게 들었다며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하던 채아가 어머님께 말씀을 드렸었나 보다. 수업 시작 전 죄송하지만 잠시 학원 밖으로 나와주실 수 있냐는 채아 어머님의 메시지에 정문 앞으로 나갔었다. 그곳엔 무심코 지나가는 행인들과 빨간 스포츠카 옆에 서 있는 날씬한 모델 외엔 누구도 없었다. 아직 오지 않으셨나 두리번거리는 내 앞으로 그 스포츠카 옆 모델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채아 어머님이시란다. 조용조용 꼭 필요한 말씀만 차분히 하시고 결혼 선물을 드리고 싶었는데 폐가 될까 봐 죄송함 무릅쓰고 나오시라 하셨다며 예쁘게 포장된 시계만 넘겨주시고 그 스포츠카를 타고 금세 사라지셨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쳐다보게 되더라. 타고난 것인지 관리의 힘인지.
유치원 원장님과 막내딸
아이들과 지내는 일을 하다 보면 생각이나 몸이 조금 천천히 늙는 것 같다. 많은 학교 선생님들과 유치원 선생님들에게서 보았어서 그렇게 믿고 있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지만 가끔 인간 말종 같은 것들을 빼면 확실히 다른 직업군보다 순수함이 남아 있고 동안들도 많은 것 같다. 누군가는 아이들의 영한 기운을 받아서 그렇다고. 하물며 유치원 원장님은 평소 말투까지 조금은 귀여우시기도 하더라. 딸아이를 보내고 싶었던 유치원이라 대기까지 걸었지만 결국 정문에 발도 들이지 못한 곳이었다. 그곳 원장님의 늦둥이 딸을 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 만났다. 그전에 만났으면 지인찬스가 왔을까, 괜히 아쉬웠다. 희주는 누가 봐도 막내딸이었다. 그것도 유치원 선생님의 말씀을 아주 잘 들을 것 같은 뽀얀 얼굴에 아이 같은 말투를 하는. 중2 때 만나서 고1까지 보았지만 그때까지도 엄마에게 안겨서 잔다고 했다. 아이 같지만 예의는 깍듯하고 반듯했고 귀여웠다. 무엇보다 약속을 잘 지켰다. 수능을 보고 나면 꼭 연락을 드리겠다는 약속을 잊고 있던 어느 날 희주에게서 장문의 톡을 받아 감동이었다.
열심히 사시는 어머님과 단기, 중기, 장기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딸
안정적인 직장이 있지만 젊은 나이부터 당뇨와 고혈압이 있어 관리가 필요한 남편을 챙기느라 바쁜 어머님이셨다. 매일 정해진 식단을 준비하려 한식 조리기능사를 비롯 여러 자격증을 가지고 계셨고 운동은 철저하게 시각과 시간을 지켜 하셨었다. 자신의 일에도 소홀하지 않으셨고 아이도 꼼꼼하게 챙기셨다. 코로나도 아닌 시절에 효민이가 들고 오는 물병에는 매일 다른 종류의 차 혹은 약물이 들어 있었고 간식을 주어도 아무거나 받아먹지 않았었다. 시험 준비 기간이면 효민이와 어머님께서 생활 패턴을 같이 한다고 했다. 효민이가 선생님이 되어 설명을 하는 방법으로 복습을 하면 어머님은 학생이 되어 주셨고, 암기 과목을 공부할 때는 어머님께서 선생님이 되어 하나하나 물어봐 주신다고 하셨다. 중2 아이가 나도 잘 못하는 꼼꼼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어 '와~' 하는 감탄이 터져 나오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점은 불안이 높기에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게 행동하며 안정감을 얻는 경우였다. 다행히 대학 2학년이 된 지금은 특기인 계획 세우기를 통해 많은 경험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감정을 느껴보며 불안도 줄고 새로운 것에 도전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예의를 밥 말아 드신 어머님과 불성실한 아들
잦은 지각과 결석, 매번 핑계 대며 해오지 않는 숙제와 바르지 않은 수업 태도. 다른 아이들 보기에도 계속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부모님께 조심스레 전화를 드렸고 '그 또래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얼마나 잘해야 하는 거냐'는 말을 돌려받았다. 어느 날은 지나가다 들렀다며 약속 없이 학원에 찾아오셨고 내가 수업 중인 동안 다른 선생님께서 상담을 해주셨다고 했다. "제가 상혁이 엄마걸랑요. 우리 애가 태도가 안 좋다고 해서 와 봤는데, 뭐 다른 애들은 엄청 잘하는가요? 그 맘때 남자 애들이 다 그러지 우리 애 정도면 착한 거잖아요. 그런 문제로 더 전화하지 말라고 전하세요. 제가 좀 바쁘걸랑요. 가볼게요." 이렇게 말씀하시곤 휙 가 버리셨다고..
이혼한 아빠와 욕이 일상어인 아들
"그래도 엄마가 있을 때는 제가 힘들 때 위로도 해주시고 잘 챙겨주셨었는데, 아빠는 엄마랑 이혼하시고 더 엄하게만 하세요." 담배 냄새 가득 찌든 정수의 머리를 품에 안고 한참을 함께 울었다. 정수 어머님은 가까운 곳에서 다른 사람과 새로운 가정을 꾸려서 사셨고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하신다고 했다. 남매를 맡으신 아버님께서는 원래도 차가우셨지만 이혼 후 혼자서 일과 살림, 아이들까지 돌보느라 지치셨던 것인지 따뜻함을 잃어버리신 듯 보였다. 중3이었던 정수는 "확 씨, 척추를 반으로 접어버릴라!" 하는 말을 화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내뱉었고 욕설은 습관이었다. 정수가 입을 열 때마다 내 정신이 파괴되는 기분이랄까. 한 살 터울의 여동생은 엄마 없는 티가 많이 났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에 떡진 머리카락, 깔끔하지도 정돈되지도 않은 교복. 순하고 착한 아이였지만 늘 자신감 없이 움츠려 있어 보여 짠한 마음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정수가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참 많이 반가웠다. 그 기쁨도 잠시, 결국은 20대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동안 허탈한 기분으로 지냈었다.
돈은 많지만 바쁜 가족과 자기만 아는 덩치 딸
지역 내 여러 개의 마트와 편의점을 운영하시느라 아빠와 엄마는 물론 고모, 이모, 할머니까지 집안 어른들 모두 항상 바쁜 집이었다. 유일한 아이인 중 2 한 덩치 하는 주현이는 순전히 돈으로 키워졌다. 그래서일까 다른 이들의 입장을 헤아릴 줄 몰라 아이들을 자주 괴롭혔다. 괴롭혔다는 시선은 주현이 이외의 사람들이 보는 관점이고 주현이는 단지 장난일 뿐이었다고 했다. 한 번은 주현이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학원 2층 현관 앞에 드러눕더니 엄마에게 전화해서 119를 부르라고 난리를 쳤다. 급하게 오신 부모님은 황당한 상황에 당황하시며 죄송하다는 말씀을 연거푸 하시곤 주현이를 데리고 가셨다. 바쁘셔서 그렇지 상식적인 분이시구나 했는데,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주현이가 체중을 줄여야 해서 헬스장엘 다닐 예정인데 학원 시간표와 맞지 않으니 학원 시간표를 바꾸라고 하셨다.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의 학원 시간표를 주현이 때문에 바꾸기는 어렵다고 하자 그전까지 당당하지만 상냥하던 태도를 바꿔 학원과 선생님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주현이의 언행들이 이해되어 씁쓸했다.
무서운 아이
초6, 예비중으로 큰 덩치에 비해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 귀여운 아이였다. 말수가 적어 존재감이 크진 않았지만 성실하게 잘 적응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태도는 틀어지고 친구들과 작은 시비도 붙고 출석은 꼬박꼬박 했지만 숙제는 전혀 해오지 않았다. 몇 번의 다독임과 조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찬이는 불성실했고 어느 날은 혼을 내기도 했다. 민찬이를 혼내고 상담실에서 나오는 내게 다른 강사들은 조심하라고 얘기했다. 대체 뭘 조심하라는 거냐고 물으니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는 불안한 아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수업에서 만나는 내내 늘 불안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어딘가에 집중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동자와 조용하지만 부산스러운 움직임. 민찬이는 할머니와 살고 있었다. 의처증이 있던 민찬이의 아빠가 이모와 엄마를 죽이고 아빠 자신까지 죽이는 모습을 현장에서 민찬이가 보았었단다. 그런 아이를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운 남은 가족들은 물론 사회에서조차 돌보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학원도 원장의 배려로 무료로 수업을 듣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널리 알려지기 전이기도 했고 정서적인 부분의 중요성이 지금보다 약하던 시기였다. 그렇다 해도 누구 하나 나서서 민찬이를 케어하기 쉽지 않다 보니 거의 방치된 아이의 뇌와 정서는 민찬이는 물론 주변인들까지 불안으로 잠식되게 만들고 있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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