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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Mar 13. 2024

여보, 세탁기는 돌릴 줄 알지?

짐을 싸야 하나 다시 풀어야 하나


작년, 남편이 일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 집에서 에너지를 충전한다던 장난기 많은 그는 매분, 매초가 한숨이었고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나도 한숨이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살 아들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웃음이 자꾸 사라지고 있는 집을 아이가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남편에게 말했다. 낚시를 가든 혼자 여행을 떠나든 나가서 마음을 다스리고 오라고. 사랑하는 남편이 안타까웠지만 나는 엄마니까. 내 새끼를 지켜야 했다. 나도 남편도 더 이상 집안에 한숨과 무거운 공기가 들어오지 않도록 노력했다. 1년 후 다행히 일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고 그제야 싱가포르에 놀러 오라는 오랜 친구의 초대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여섯 살 남자와 서른여덟 살 여자는 싱가포르에서 조금 긴 여행을 시작했다.   


예정된 이별이었다. 우리는 이별의 날짜에 빨간색 동그라미를 그려두었다. 우리가 이별을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게.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지 않게.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든아, 아빠 안 보고 싶겠어?"

"보고 싶겠지~ 아빠도 같이 가면 안돼?"

"아빠는 회사 가야지~ 흑흑. 가서 아빠 보고 싶다고 울지 말고 엄마 말 잘 듣고 혼자 다니면 절대 안 돼!"

"응! 걱정하지 마 아빠. 내가 엄마 손도 잘 잡고 다니고 아빠 보고 싶어도 안 울게."


 이든이는 금세 자기 짐을 챙기러 방으로 들어갔고 온 얼굴 가득 서운한 아빠만 그 자리에 남았다. 한 달간의 이별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설렜고 남편은 걱정인형이 되었다. 이든이가 여섯 살이었던 2019년 6월, 우리는 싱가포르로 떠났다. 싱가포르에서 돌아올 때 방콕 여행도 계획되어 있었기에 가는 비행편도 방콕을 경유하도록 발권했다. (경유항공권이 더 저렴한 것은 진리인 데다, 방콕 여행까지 할 수 있으니 놓칠 수 없다.) 다른 동남아 나라들보다 비행시간이 조금 더 길어 한 번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경유로 아낀 비행기값으로는 내 얼굴보다 큰 갈릭크랩과 칠리크랩을 양손 가득 들고 우걱우걱 먹어야지. 무게를 재는 저울 따위는 보지 않으리. 경유가 대수랴. 입꼬리가 올라간다.





tip  아이와 엄마가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하고(힘들어하지 않고) 장기 여행이라 여행경비를 절약하고 싶다면 적당한 경유 항공편도 추천한다. (물론 장기여행일 경우에 해당된다. 여행기간이 짧을 경우에는 생각하지도 말자. 시간이 돈이다. 비행기 타는 것을 힘들어하는 경우에도 생각하지 말자. 최종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집이 그리워지게 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장거리 여행일 경우 중간에 한 번 쉬어갈 수 있기도 하고 머무는 시간이 짧다면 공항에서, 시간이 길다면 공항밖으로 나가 그 도시를 잠시 여행해 볼 수도 있다. 항공사별로 무료 시티투어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으니 비행기를 예매하기 전에 미리 확인해 보자. 경유지에서 며칠을 머무르는 것도 가능하니 일정을 잘 맞춘다면 두 나라를 여행할 수 있다.

 





서른여덟 살 여자 하나와 여섯 살 남자 하나의 한달살이 짐은 생각보다 많았다. 커다란 트렁크 하나와 조금 작은 트렁크 하나를 거실 가득 펴놓고 이것저것들을 담는다. 꼭 필요한 것만 챙기는데도 왜 이리 많은 거지? 물가 비싼 싱가포르에서 하루 세끼를 다 사 먹을 수는 없다. 우리는 장기여행자가 아니던가. 이든이가 간단히 아침으로 먹으면 좋을만한 비비고죽들과 국들을 몇 개씩 비상식량으로 챙겼다. 물론 싱가포르에도 한인마트가 있어 한국 레토르트 식품들을 판매하고 있겠지만 한국보다 더 비쌀 게 틀림없다. 가져갈 수 있으면 모두 가방에 넣어야지. 밥을 잘 먹지 않을 때를 대비한 우유들, 신발도 하나만 신고 다닐 수 없으니 샌들 하나, 예쁜 슬리퍼도 하나, 조리도 하나, 운동화는 부피를 많이 차지하니 신고 가야지. 겨울이 아니라 여름 나라인 것이 천만다행이다. 작은 여자와 더 작은 남자의 옷과 신발들은 작아서 다행이다. 키가 조금이라도 더 컸다면 어떡할 뻔했나. 정말 다행이다. 작으니 좋은 점도 참 많다. 작은 것도 많이 모이면 커진다는 것을 그땐 왜 알지 못했을까. 부피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아 자꾸 넣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가방이 꽉 찼다. 아직 넣을 게 많은데. 한 달 동안 심심할 수도 있으니 아이가 그림 그릴 스케치북 여러 권, 다양한 색상의 색연필들, 스티커북, 이쯤이면 이민 가방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잘 닫히지 않는 가방을 남편이 온몸으로 겨우 닫았다. 무게를 재어보려 하자 남편이 말한다.


“이걸 어떻게 닫았는데. 이제 못 빼. 필요하니까 다 넣었을 거 아니야. 그냥 다 가져가고 오버차지 내.”

“많이 비쌀 텐데. 얼마나 오버되려나?” 

(내심 귀찮기도 했고 뭘 뺄지 고민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미 떠나기 전날이고 가방을 싸는데 필요한 체력은 카드값이 빠져나가고 난 후의 통장잔액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 P는 떠나기 전날 짐을 싼다.)


무게를 재보는 순간 가방을 모두 열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외면하고 잠을 청했다.



출처- pixabay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짐이 반이다. 분유나(모유만 먹었던 이든이는 먹어본 적 없지만) 기저귀를 챙겨야 할 나이는 아니지만 필요해서 챙기고, 없으면 불편하니까 챙기고, 혹시 모르니까 또 챙기다 보면 내 몸보다 짐이 무거워지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형제가 있거나 또래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서도 잘 놀 수 있을만한 아이템들을 갖고 가야 엄마도 아이도, 비행기에서도 카페에서도 서로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아이와 비행기를 탈 때 챙기면 좋은 것들 - 막대사탕(기압차이로 인해 귀가 먹먹하고 아플 수 있는데 사탕을 먹으면 침이 삼켜져 도움이 된다), 스케치북, 필기구, 스티커북, 숨은 그림 찾기, 미로 찾기. 아이가 좋아하는 인형, 목베개, 간식, 편안하고 따뜻한 옷이나 덮을 것(기내는 생각보다 온도가 높지 않다. 대부분 담요가 서비스되지만 간혹 돈을 내고 이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챙겨가면 요긴하게 쓰인다.) 항공사에 미리 확인해서 차일드밀 신청이 가능하다면 차일드밀 신청하기- 일반식보다 먼저 서비스될 뿐 아니라 항공사별로 간식박스를 주기도 한다(싱가포르 비행에서는 차일드밀을 신청했더니 간식이 가득 들어있는 틴케이스를 선물 받아 이든이가 몹시 아끼며 좋아했다.)



간식이 가득 들어있는 틴케이스



이든이는 6살 때부터 비행기 타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때에 맞춰 먹을 것을 주고 간식을 골라먹는 재미도 있고 그림을 그리고 모니터로 영화도 보았다.(기내에서 따로 패드를 보여주진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가 어릴수록 한꺼번에 모든 아이템들을 꺼내면 안 된다. 하던 것을 지겨워하거나 재미없어할 때 하나씩 새로운 것을 꺼내주어야 한다. 간식을 한 번 줬다가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주고, 그림을 충분히 그려서 지겨워졌을 때쯤 스티커북을 주고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내 패를 모두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꺼내기 쉬운 가방 하나에 아이에게 필요한 용품들을 모두 넣고 발아래에 두자. 비행시간 내내 누구보다 든든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떠나는 날 아침이 되었다. 새벽 4시까지 잠이 오지 않아 남편에게 편지를 쓰며 뒤척였다. 얼마 자지 못해 정신이 멍했다. 비행기에서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데 실감은 나지 않고 남편 혼자 두고 가면서 너무 좋은 티도 못 내겠고 혼자 있을 남편이 신경 쓰이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아내도 아들도 아빠를 자꾸 쳐다본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걱정인형은 묵묵히 짐을 차에 싣고 공항을 향해 달렸다.    

  

신경 쓰지 말자고 해놓고 여자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방 무게부터 재 보았다. 20kg 가까이 초과가 된다. 맙소사. 이제야 트렁크를 들어보니 들리지도 않는다. 사전 신청도 아니고 공항에서 결제하는 금액은 입이 떡 벌어진다. 공항 한쪽 구석에서 캐리어를 펼쳤다. 우유와 비상식량들을 덜어냈다. 샴푸와 린스, 치약까지 모두 꺼냈다. 한 달이나 외국 여행을 가봤어야지, 그래 선크림도 가서 사면 되지. 내 화장품을 뭐 바를 시간이나 잘 있겠어? 여보가 나는 생얼이 예쁘댔잖아. 가서 읽을 한국 책도 두 권이나 더 뺐다. 무게를 재어보니 이제는 자리가 남지만 더 이상 넣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히 무겁다. 남편은 짐을 찾고 또 공항에서 카트에 싣고 하려면 몇 번 들어야 할 텐데 들 수 있겠냐고 더 빼라고 했지만 옷은 더 못 빼. 안 돼. 남편과 꼭 안으며 예쁘게 헤어지고 싶었는데. 내가 바라던 공항에서의 이별모습은 이게 아닌데. 이미 틀렸다. 우리는 수하물 무게 맞추기에 진이 다 빠져나갔고 남편은 편의점 비닐봉지 여러 개를 무겁게 손에 들고 있었다. 우리는 분명히 짐을 쌌는데 짐을 풀었다.      



든든한 동반자 - 이런 가방이 하나 더 있었다



하얗게 불태운 셀프무게체크를 마치고 체크인을 위해 카운터로 갔다.






티켓팅을 하러 가서 당당하게 가방을 저울에 올렸다. 오케이 통과. 여권을 보여주었다. 빨리 비행기티켓 주세요. 현기증 나니까요. 그런데... 왜 한참을 보고 나를 보고 옆의 직원까지 소환한다. 왜요. 왜 그러시는데요.

 

“저기 고객님, 비행기 못 타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뭐 라 고 요?”   

"Excuse me?"  


남편에게 밥 잘 챙겨 먹고 있으라고 눈물을 예쁘게 머금으며 손을 흔들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비행기를 못 탈 수도 있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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