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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Apr 04. 2024

용과부터 먹고 시작합시다

외모에 반했는데 성격까지 좋네?


 아침에 눈을 뜨고 이든이의 아침을 준비한다.


한국에서와 별다를 것 없는 아침이지만 괜히 침대에서부터, 일어나기 전부터 소풍 가기 전날의 아이처럼 몸이 가볍다. 아니, 사실 몸은 무겁지만 들뜬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뇌의 착각이다. 어디를 갈까? 무엇을 먹을까? 아니야 걱정을 왜 해. 여긴 집 앞만 나서도 새롭고 길가에 파는 빵을 사 먹어도 재미있는 싱가포르잖아.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나서보자.



 


사과, 배, 귤이 아니라 색다른 과일로 시작하는 아침이다. 이름부터 멋지고 예쁜 dragon fruit(용과)은 일단 색깔도 모양도 취향저격이다. 찐한 핑크 또는 자줏빛을 띄며 여의주 같기도 누구는 백제금동대향로를 닮았다고도 한다. 적당히 두꺼운 껍질을 살살 벗겨내면 하얀색 혹은 껍질과 같은 붉은색의 과육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새까맣고 작은 씨가 콕콕콕 많이도 박혀 있다. 흔히 생각하는 과일에서 기대되는 맛이 나지는 않는다. 적당히 키위 같은 식감에(그러고 보니 안에 검은 씨가 콕콕 박힌 것도 키위를 닮았다.) 달지도 안달지도 않은 그 맛. 평소 달거나 새콤한 맛을 몹시 즐기지만 이 은은하고 과하지 않은 단맛에 빠져 버렸다. 먹으면 먹을수록 입안에 단맛이 맴돈다. ‘외모에 반했는데 성격까지 좋네?’가 바로 이 용과의 매력이다. 물론 맛이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이므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셔널 포스트의 기사에선 용과의 맛을 ‘화려한 외형에 비해 아무것도 없는 맛’, ‘인생을 포기한 듯한 맛’ 등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몹시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극호이다. 자줏빛의 예쁜 용과에 반해 매일매일 용과를 먹었다. 안도 밖도 모두 빨간, 모습과 마음이 똑같은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안도 겉도 네가 좋아하는 찐 핑크야. ’ 마음이 놓인다.





속과 밖이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빨강과 노랑을 잘 섞어서 만든 오렌지의 겉모습처럼 알맹이가 똑같은 사람. 웃고 있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말고 웃지 않더라도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한 사람. 아무 말 없이 같이 있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좋다. 물론 만나자는 약속을 잡을 때부터 시작해서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는 수다를 함께할 때도 있다. 서로 오디오가 겹치기도 하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야기의 흐름도 쿵하면 짝하고 받는 토크궁합도 잃을 수 없다. 그런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을 쉬지 않아도 다 좋다. 장바구니에 넣을 때부터 손질을 하고 접시에 올리고 포크로 찍어 입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온통 용과가 좋다.






간단하든 푸짐하든 용과와 함께하는 아침을 먹고 천천히 집을 나선다. P의 계획은 그날, 혹은 전날 저녁에 세워지기도 한다. 또는 아무 계획 없이 나선들 또 어떠하리. 싱가포르에 오기 전 한국에서 여러 곳들을 찾아보고 저장도 했었지만 어디 인생이 계획대로만 흘러가겠는가. 저장해 놓은 것 자체를 잊거나 생각났더라도 어디에 저장했었는지를 잊거나 하는 거지. 대부분의 P들이 말하는 것처럼 너무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그날 마음이 닿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바쁠 것 없이 지내고 싶었다. 한국에서 매일같이 한숨을 쉬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 떠나왔지만, 지쳐있던 마음까지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보고 싶던 친구와 마주하는 시간이 감사했고 이렇게 사소한 일상들을 함께 나누는 일이 행복했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았다. 카페 창가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는 일도. 멀리 떨어진 거리만큼 나누지 못했던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일도. 또 어느 날엔 조금 무거운 이야기들을 꺼낼 수 있어서 좋았다. 놀이터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이든이를 바라보는 일까지도 모두 꿈만 같았다. 생각 속에 있던 장면들이 실체가 되는 일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지만 상상보다 훨씬 더 따스했다.



 


오늘은 너로 정했다. MRT를 타고 시티홀에서 내려 내셔널 갤러리로 향했다. K는 길치인 친구가 영 미덥지 못했는지 학원을 가는 길에 갤러리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뜨거운 해가 내리쬐지 않는 황금길로만 안내하며 말이다. 부채로 뜨거운 해를 가리고 잔다르크처럼 앞장서 걷는 그녀는 여리여리한 민트색 롱플레어원피스를 입고 금색 조리를 신고 있다.


"안 바래다줘도 된다니까. 혼자 찾아갈 수 있어."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이 날씨에 헤매면 이든이 힘들어서 안돼."

"이제 알 것 같다니까~ 아, 근데 너 조리 왜 이렇게 예뻐? 원피스랑 너무 잘 어울리잖아."

"그지 예쁘지? 이거 세일할 때 산 건데 너무 마음에 들어. 안 어울리는 옷이 없다니까. 우리 내일 쇼핑하러 갈까?"

"좋지 좋아."





이런 이야기의 흐름이 K도 나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10불짜리 에코백 하나를 고르면서도 우리는 깔깔깔 넘어가며 신중에 신중을 기했고 5불짜리 파우치도 서로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골라주겠다며 세상 심각했다. 혹여나 지문이라도 묻을까 하얀 장갑을 끼고 물건을 꺼내 보여주는 반짝반짝 조명의 상점이 아니더라도 괜찮았다. 우리가 이미 반짝반짝 빛나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갔으니.







- 일주일 늦은 연재 죄송합니다. 다음화는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에서 공짜로 즐기기 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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