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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Apr 16. 2024

반지 만들어주는 남자

엄마가 미안해


 한 달 동안의 여행,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살기를 하고 싶었다. 살고 있지 않은 나라에서 혹은 낯선 도시에서 살아보는 것. 관광명소들을 좇아 찍고 옮기는 바쁜 여행이 아니라 다 보지 못하더라도 느긋하게 온전히 집중하고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 가면 꼭 가야 하는 곳보다는 가고 싶은 곳들을 먼저 찾았다. 아무 계획이 없는 날엔 천천히 일어나 소시지를 굽고 계란 프라이를 한다. 이든이와 아침을 먹고 나면 용과와 파파야로 입가심을 하고 오전 수영도 한바탕 한다. 느지막이 나가서는 동네 산책을 하고 길을 지나다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커피와 오렌지주스, 초콜릿케이크도 하나 주문한다. 종알종알 거리며 다른 그림 찾기를 하는 이든이를 바라보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검은색 헤드폰을 끼고 탄탄한 다리근육을 뽐내며 조깅을 하는 남자, H라인 스커트에 기린다리같이 쭉뻗은 하이힐을 신은 커리어우먼, 커다란 해바라기가 가득한 끈원피스에 둥근 라피아 햇을 쓴 관광객 모녀들을 선글라스 너머로 관찰했다. 바빠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걷고 뛰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는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





갈 곳을 실컷 적어두고는 메모한 수첩을 집에 두고 나오는 대문자 P이지만 그녀에게도 위시리스트는 있다. 이든이가 딱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한국에서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매년 아이들의 방학기간에 맞추어 '칠드런스 비엔날레'라는 무료 체험 전시회를 연다. 게다가 지금이 바로 그 기간이다. K와 헤어지고 이든이 손을 잡고 당당히 내셔널갤러리로 들어갔다. 리셉션에 가자 친절한 직원이 어떤 순서로 관람하면 좋을지와 각 전시장에서 할 수 있는 체험들을 설명해 주었다. 대부분의 체험과 전시가 무료였는데 별도 요금을 받고 있는 곳을 가지 않고 무료전시관만 돌아도 충분히 재미있게 놀 것들이 많다며 지도를 챙겨주었다.





체험과 전시를 좋아하는 이든이는 입구에서부터 신이 났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새하얀 종이에 여러 가지 스탬프를 찍고 커다란 롤러를 굴려 판화체험을 했다. 그 상태 그대로 또는 그림을 더 그리거나 색칠을 해서 빈 액자에 작품을 걸면 된다. 아이들 키를 고려한 높이에 가로 혹은 세로로 빈 액자들이 벽에 가득 걸려 있다. 아이들의 그림이 진짜 작품이 되어 전시되는 느낌이라 이든이가 아주 뿌듯해했다.





두 번째 전시실에는 다양한 만들기 재료들이 있었다. 쓰고 남은 짧은 모루, 빨대, 포장지 조각, 골판지, 상자 같은 재활용품들이 아이들의 손이 닿길 기다리고 있다. 저렇게 짧은 모루를 이렇게 작은 포장지 조각을 어디에 사용해서 뭘 만들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이들의 눈은 반짝였고 손은 쉴 새 없었다. 접고 오리고 붙이면서 누런색의 상자조각들이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뚝딱뚝딱 열심히 만들기를 하는 이든이 옆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잠시 즐기고 있었다.





엄마, 손 잠깐 내밀어 봐.

응? 손? 

어때 마음에 들어?

... 너무너무 예뻐.


손을 내밀자 자그마한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에 종이테이프를 붙인 핑크색꽃반지를 끼워 주었다. 갤러리에 들어오기 전 예쁘다고 주워온 꽃이었다.


어머 이든아, 꽃이 너무 예쁘다. 그지?

응 정말 예쁘네.

엄마, 이거 떨어진 거니까 갖고 가도 되지?

응, 갖고 가는 건 괜찮은데 들고 다니면 찢어질 수도 있고 또 손이 불편하지 않을까?

내가 조심해서 잘 갖고 다닐게.





판화체험을 하고 그림을 그릴 때도, 만들기 재료를 신중히 고를 때도 자기 자리 옆에 조심히 놔두며 살폈었다. 소중히 들고 다니며 꽃을 보며 이든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휴대폰을 하고 있다가 잠깐 손을 내밀어 보라는 아이의 말에 아주 잠시지만 귀찮게 생각했던 마음이 말도 못 하게 미안했다. 온통 엄마 생각을 하며 꽃반지를 만들던 아이를 옆에 두고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아이의 사진을 보내고 sns에도 올리고 싶었다. 옆에 있는 아이를 보면 되는데 작은 네모 속 아이를 보며 웃고 있었다. 바로 옆의 아이에게 말하지 않고 손으로 쓰고 있었다. 반지를 손에 맞춰 감아주고는 이젠 됐으니까 휴대폰 하라며 웃는 아이를 보고 작은 네모를 가방 가장 깊은 곳에 쑤욱 넣었다.


이든아, 엄마 이제 휴대폰 안 해도 돼.

다했어? 이제 안 바빠?

응, 이제 엄마 안 바빠.

엄마, 그러면 우리 이거 한 번 같이 만들어 볼까?

응 만들고 싶은 거 다 만들어 보자.





마주 보니 참 좋다.



추신 - 싱가포르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내셔널 갤러리에서 매년 열리는 ' 칠드런스 비엔날레' 기간을 꼭 확인하셔서 방문하시길 추천드려요. 두 번의 방문도 아쉬웠을 만큼 아이가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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