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 Apr 17. 2024

나 너 좋아하냐?

야경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입니다.


야경(夜景) - 밤의 경치를 뜻하는 한자어                        


 눈이 부셨다.


반짝반짝 알록달록한 레이저 불빛이 눈이 부셨고 시원하게 솟구쳐 오르는 분수의 물줄기에 눈이 아렸다. 어두워진 밤하늘 위로 불빛도 분수도 말문이 트인 아이의 단어만큼이나 쏟아져내렸다. 이든이는 눈을 떼지 못했고 엄마도 이든이에게 한 번 까만 밤하늘 무대를 향해 한 번 초점을 맞추며 푸욱 빠졌다. 세상에 나온 지 겨우 만 5년이 조금 지난 아이에게 음악과 함께하는 거대한 분수쇼와 레이저쇼는 싱가포르에 반할 이유로 충분했다. 많은 나라를 다녀본 것도 아니었지만 이든이의 최애 나라는 싱가포르가 되었다. 고개를 돌리니 저기 저 앞에 K와 그녀의 남편,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다정한 투샷이다. 오해하지 말라며 투닥거리는 모습마저 귀엽고 부럽다.

 


 


갑자기 남편 생각이 났다. 말도 안 될 정도의 수화물 초과와 입국금지가 될 뻔했던 사건들 때문에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헤어졌던 내 남편.(브런치북 1,2화를 참고해 주세요.)  평생 영상통화를 한 적이 한 손으로 세어도 남을 정도인데 여기와 와서는 자꾸 영상 통화를 하게 된다. 옛날 사람인지라 영상은 부끄러워 배경을 보여주거나 이든이를 비춰주는 게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깜깜한 데 어디야? “

“우리는 마리나베이샌즈 앞에 레이저쇼랑 분수쇼 보고 있어. 자기는 어디야? “

“나는 집이지. 깜깜해서 잘 안 보이긴 하는데 멋진 것 같네."

“응, 너무 멋져서 자기랑 같이 봤으면 참 좋았겠다 싶었어. K랑 오빠를 보는데 자기 생각이 났어.

잠... 깐만, 이든이 바꿔줄게. “





갑자기 조금 울컥해져서 황급히 이든이에게 휴대폰을 넘겼다. 다행히도 남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여기 있는 내내 생각이 난 건 아니었다. 이든이와 둘이 있는 시간도 너무 좋고 오래 보지 못했던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도  일분일분이 소중했다. 다만 문득문득 남편이 생각났다. 이든이가 놀이터에서 높은 정글짐에 성큼성큼 올라가서 엄마를 불렀을 때, 새로운 친구에게 먼저 다가갔을 때, 남편이 좋아하는 분위기의 야외자리에서 맥주를 마실 때, 반짝반짝 빛나는 야경을 볼 때, 남편이 좋아할 맛의 새로운 음식을 먹었을 때, 적다 보니 수도 없네. 물론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생각이 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순간순간 잠시잠시 생각이 났고 그리웠다.



남편은 집이 너무 조용하다고 했다. 발에 밟히는 레고조각이 바닥에 없어 이상하고 아빠와 엄마를 번갈아 불러가며 쉬지 않는 이든이의 수다가 들리지 않아 낯설고 집이 너무 깨끗해서 어색하다고 우리 집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어느 날엔 옷방을 정리했다며 사진을 보내오고 또 다른 날엔 이든이 방을 정리했다며 사진을 보냈다. 응 이든이한테는 비밀로 할게. 평소 국민잠꾸러기던 남편은 우리가 없는 동안에는 새벽 종달새가 되었다. 아무도 깨워주지 않아도 척척 일찍 일어나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을 보내고 출근을 했다. 이 정도면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건가. 바른생활도 이런 바른생활이 없다.                                                  


불편하게 왜 그래, 그러지 마.   







<P형 인간의 싱가포르 체류기>를 연재하며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서 그때의 사진과 글들을 보자 화선지에 먹이 화륵 스며드는 것처럼 그 해 여름으로 돌아갔다. 야경을 찍은 사진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떤 날은 바닥에 앉아서 어떤 날은 계단 위에서 또 어떤 날은 이든이를 높이 안고 보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여보에게 보여주려고 동영상을 찍으며 본 적도 있었다. 바로 앞에서 본적도 건너편에서 본적도 또 옆에서 본 적도 있었지만 항상 예쁘고 신비로웠다. 그래도 최고는 음악과 레이저와 분수 모두를 즐길 수 있는 마리나베이샌즈몰 앞. 이날은 그 앞에 안 간 게 다행이었다. 음악과 분수까지 함께했더라면 엉엉 울었을지도 몰라.



싱가포르를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돌아가기 싫었나보다. 싱가포르에서 남편이 생각났던 것처럼 한국에 가면 또 싱가포르를 그리워하겠지.





그냥.

옆에 있을 때 잘하자.




이전 04화 반지 만들어주는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