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고 있는 날개
하루는 학교에 일찍 도착해서 강의실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 인도 남자애가 다가오더니 무서운 얼굴로 인사를 했다.
나는 웃으며 인사했다.
그 남자애는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대뜸 자기 기억 안나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원래 사람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 굉장히 혼란스러워한다.
그런 나에게 갑자기 본인이 기억 안냐고 무서운 얼굴로 물어본다.
"음.. 같은 반이지?"라고 내가 어색하게 물어보자 그 남자애는 어이없어하며
"내가 오리엔테이션날 니 문을 잡아줬잖아."하고 말했다.
아니 뒷사람에게 문을 잡아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건 배려이고 예절인데 그런 것까지 내가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거기에다가 정신없던 오리엔테이션날의 일을.
"아.. 그랬어? 그랬구나. 고마웠어."
내가 말하자 이 남자애는 더 어이없어하며
"내가 너를 위해서 문을 잡아줬었다고. 오직 너를 위해서."
이게 그렇게 어이없어할 일인가?
나는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남자애는 갑자기
"내 이름은 A야. 잘 기억해 둬."
라고 말했다.
그리고 강의실 문이 열리고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나는 속으로 욕하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로 강의실 앞쪽에 앉았다.
실습실에서도 지정된 좌석이 있는 수업 외에도 앞쪽에 앉았다.
가끔 수업시간에 누가 질문을 해서 그 친구를 쳐다보려고 뒤를 돌거나
뒤의 친구에게 말을 걸려고 뒤를 돌아보면
A는 무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 탓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가끔 다른 친구들이
"너 A랑 싸웠어? 쟤가 너 엄청 노려봐."라고 말해줬다.
수업이 일찍 끝나거나 다른 강의시간 사이에 시간이 남으면 주로 학교도서관에 갔다.
과제도 하고 교수님이 올려놓은 수업자료들을 프린트하거나 교수님들로부터 온 이메일은 없는지 확인했다.
한 번은 도서관에 갔는데 같은 반 중국친구가 있었다.
장나라를 닮은 예쁜 여자아이였는데 영어도 잘했고 성격도 좋아서 친구들이 많은 아이였다.
나는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했고 그 친구도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과제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를 등지고 앉아있던 캐네디언 친구들이 우리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또 반갑게 인사하며 과제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스터디그룹을 만들게 되었다.
서로 공부도 도와주고 과제도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면서.
마침 1학년 1학기때는 학교에서 만들어준 시간표가 다 같아서 공강시간이 똑같았다.
우리는 다음 수업을 가기 전까지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일단 다 같이 과제를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친구들과 시작한 과제는 금방 끝났다.
우리는 이 스터디그룹을 계속 유지하자고 했고 모두 찬성했다.
다음 스터디그룹은 며칠 뒤로 정하고 다른 참석하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얼마든지 와도 좋다고 우리는 합의했다.
스터디그룹 멤버는 총 4명의 여자들로 시작되었다.
1. 엄청 마르고 키가 작고 예쁘게 생긴 R이라는 친구는 긴 생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매력적인 친구였다.
10대 때 부모님을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부모님은 모두 의사이고 많은 친척들이 이미 캐나다에 있었다.
오타와에서 살고 대학교도 나왔는데 직장을 잡지 못해서
안과의사인 엄마의 클리닉에서 일을 도와주다가 엄마의 제안으로 안경사 공부를 위해 배리로 왔다.
2. 노란 단발머리를 한 M은 미드에서 튀어나온듯한 친구였다. 완전 백인의 캐네디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를 따라 호주에 갔다가 호텔에 취직해서 하우스키핑일을 했다.
호텔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도 줘서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몇 년 일을 하며 친구들이랑 즐겁게 인생을 지내다가 여동생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었다.
다시 캐나다로 왔고 여동생의 소원이 언니가 공부를 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고(내가 이해하기로는. 영어를 굉장히 빠르고 리드미컬하게 말하는 친구였다.)
동생에게 자랑스러운 언니가 되고 싶어서 마음을 잡고 안경학과에 들어왔다고 했다.
3. 중국에서 온 E는 앞에서 말했듯이 가수 장나라를 닮은 귀엽게 생긴 친구였다.
나이차이가 많은 어린 남동생이 중국에 있고 본인은 캐나다에 공부하러 왔다고 했다.
영어를 굉장히 잘했고 많은 중국 남자애들이 이 친구를 좋아했다.
4. 그리고 마지막 멤버는 나였다.
학교가 끝나고 우연히 R을 만났다. R은 학교에서 가까운 기숙사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아직은 짐정리가 끝나지 않았는데 곧 짐정리가 끝나면 본인 기숙사에 놀러 오라고 말해줬다.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나도 예의상 웃으며 좋다고 대답했다.
좋은 친구들을 더 많이 알게 돼서 행복했다.
두렵고 무서웠던 학교 생활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