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trated by bluejeavi(인스타그램 아이디)
#1
친애하는 나의 고양이, 슈슈왑에게.
슈슈, 나 잘 도착했어! 사흘간 마차에 구겨진 채로 먹고 자고 하면서 이젠 더 못 참겠다 싶을 때까지 달리니까, 그제야 간신히 도시가 나타나더라. 마차에 탈 때까지만 해도 널 안 데려온 걸 후회했는데, 데려왔으면 더 많이 후회했을 거야. 마차도 숨 막히는데 그 안에서 케이지라니. 네가 같이 왔으면 상자 속 상자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 오길 잘했어!
도시는 아주 크다고 들었는데, 처음엔 실감이 안 났어. 눈 닿는 곳마다 큰 건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어디를 봐도 멀리까지 볼 수가 없거든. 하지만 사람은 진짜 많아. 우리 마을 숲의 나무들이 전부 사람이 된 것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할머니가 왜 도시에 가면 눈을 크게 뜨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 멍하니 있으면 사람이 나한테 와서 부딪히거나 내가 사람한테 가서 부딪히거나 둘 중 하나야. 왜, 비 내린 다음 날의 시냇물 있지? 엄청 빠르게 흐르면서 다 휩쓸고 지나가잖아. 여기는 물 대신 사람들이 그렇게 다녀. 정말 놀랍지?
도시에서는 나무 냄새, 흙냄새를 잘 맡을 수가 없어. 건물 베란다마다 화분이 있긴 한데 보기에만 초록초록하지, 정작 초록 냄새는 거의 안 나. 혹시 마을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해서 꽃가게도 가 봤는데 꽝이야. 초록 냄새는 안 나고, 알록달록한 화려한 냄새만 잔뜩 풍겨서 머리가 아파졌어. 대신 한 공간에서 다양한 냄새를 맡을 수 있긴 해. 과일 냄새, 야채 냄새, 빵 냄새, 커피 냄새, 술 냄새, 뭔가 시큼하고 찌든 냄새까지. 높은 건물들에 빙 둘러싸여 냄새가 못 빠져나가고 고여 있나 봐. 근데 마을에서 한 번도 못 맡아본 근사한 향기가 나는 곳도 있어. 어딘지 알겠지? 바로 내가 일하게 된 향수 공방이야! 우리 왼쪽으로는 모자 가게가, 오른쪽으로는 그릇 가게가 있어. 일단 냄새가 약하다는 점에서 다른 가게들보다는 괜찮은 이웃인 것 같아. 모자 가게에서는 나풀나풀한 먼지 냄새가 나. 그리고 실과 옷감을 서걱서걱 자르는 차가운 가위 냄새, 다리미의 뜨겁고 버석버석한 냄새도. 그릇 가게에서는 희미한 흙냄새랑 불 냄새, 유약 냄새, 매끄럽고 차가운 냄새가 풍겨. 우리 향수 냄새랑 섞여도 역하거나 하지는 않아.
난 공방 위 다락방에서 지내게 됐어. 일 층은 가게, 이 층은 키르케 님의 거처, 그리고 맨 꼭대기가 나. 넓진 않지만 침대랑 책상이랑 작은 옷장까지 있을 건 다 있어. 지금 그 책상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거야. 이 방에서 가장 멋진 건 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야. 잠깐만 눈을 떼면 계속 변하는 그림을 보는 것 같아! 너한테도 보여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벌써 4번은 달라졌어. 처음에는 하얀 구름 몇 가닥을 엷게 펴 바른 파란 하늘이었다가, 창틀에 참새 두 마리가 등장했고, 오렌지주스를 쏟은 것처럼 노을이 지더니, 지금은 크랜베리 시럽이 퍼지는 것처럼 점점 빨개지고 있어. 이제 곧 어두워지면 깜빡깜빡 별이 뜨겠지? 전에 우리가 찾은 고양이자리 있잖아. 도시에서도 보이는지 확인해 볼게.
창문을 완전히 열면 지붕으로도 나갈 수 있어. 멀리까지 길이랑 건물이 펼쳐지면서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다니는 게 보여. 땅에 있을 땐 몰랐는데 지붕에서 보니까 도시가 크다는 걸 알겠어. 마을 뒷산에서 내려다보면 양손 엄지와 검지 네 개로 만든 동그라미에 마을이 전부 담겼는데, 도시를 다 담으려면 그런 동그라미가 열 개쯤 필요하거든. 아무튼 난 여기가 마음에 들어. 공방 일도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
사랑하는 라비니스로부터.
#2
친애하는 나의 고양이, 슈슈왑에게.
슈슈, 여긴 지옥이야! 우리 종족의 원로이자 위대한 대마녀 키르케 님의 실체는 악덕 고용주였어! 내가 여기서 어떤 대접을 받고 사는지 알면, 너도 기가 막혀서 꼬리로 바닥을 팍팍 치게 될 거야!
일단 첫닭이 울기도 전인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야 해. 물론 도시에는 닭이 없지만 난 알 수 있어. 해 뜨기도 전이라 창밖이 어두컴컴하거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공방 청소야. 매장은 물론이고 카운터 뒤쪽의 조향실까지. 처음에는 아담하고 예쁜 공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제 보니까 쓸데없이 너무 넓어! 손님이 가게에 들어올 필요도 없이 그냥 창문만 열어서 주문을 받고, 물건도 창문으로 던져주면 좋겠어. 그럼 먼지도 덜 쌓일 텐데.
청소 1단계는 먼지떨이야. 타조 날개털로 만든 먼지떨이로 매장 진열대와 조향실 선반에 줄지어 늘어선 유리병들을 조심스럽게 쓸어줘야 해. 3층 먼저, 이어서 2층, 1층으로 내려오면서 먼지를 모아야 한대. 어디서 시작하건 어차피 먼지는 다 공중으로 날리는 거 아니냐고 했다가 할망구한테 욕만 들어 먹었어. 여긴 자기 가게니까, 내 의견 같은 건 넣어 두고 시키는 대로나 하라는 거야. 치사한 할망구 같으니라고. 뒤로 갈수록 점점 팔이 아파져서 먼지떨이를 오른쪽, 왼쪽으로 바꿔 들어야 해. 난 이 작업을 할 때마다 아주 아주 성미가 까다로운 요정들의 목욕 시중을 드는 상상을 해. 조금이라도 심기가 불편하면 날개가 파르르 떨리면서 퍽 터져 버리는 거야... 끔찍하지.
그다음엔 바닥을 쓸어. 빗자루로 싹싹 쓸고 물걸레질까지 박박 하고 나면 등이 후끈해지고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 실내 청소를 마치면 내 키만큼 큰 싸리빗자루를 들고나가서 가게 앞 길거리를 마저 쓸고, 먼지 날리지 말라고 물도 뿌려야 해. 근데 오늘 아침엔 안 뿌렸어. 밤새 비가 내려서 돌바닥이 촉촉하더라고. 청소 마무리는 내가 좋아하는 작업이야! 젖은 바닥 위에 향수를 몇 번 펌핑해서 향기를 입히는 거야. 오늘은 애플민트와 레몬을 바탕으로 깔고, 그 위에 생강 향을 살짝 얹었어. 비 때문에 공기가 눅눅하고 싸늘해져서, 산뜻하면서도 따듯한 느낌을 내고 싶었거든.
여기까지 오면 어느새 해가 떠서 골목이 환하게 밝아져 있어. 그럼 난 빗자루에 기댄 채로 잠시 눈을 감고, 아침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면서 그날의 공기와 내가 고른 향기가 잘 어우러지는지 점검해 봐.
"안녕, 라비니스! 좋은 아침이야. 오늘도 멋진 향기가 나네? 시원한데 뭔가 따듯해."
이맘때쯤 모자 가게의 엘리 언니가 출근해. 언니는 항상 예쁜 모자를 쓰고 다녀. 머리 위에 리본으로 만든 꽃밭이 펼쳐지고, 레이스로 만든 무지개가 뜬다고 상상해 봐! 근사하지?
"안녕, 언니. 민트, 레몬, 생강 향이에요!"
"오, 그 조합 마음에 들어. 한 병 주문할 테니까 이따 갖다 줄래? 오늘은 꽃 말고 과일 콘셉트로 디자인을 해 봐야겠어. 예를 들면... 레몬과 라임이 주렁주렁 달린 나뭇가지 아래 허브 덤불이 무성하게 우거진 느낌! 내년 여름 신상으로 내놓으면 대박일 것 같아! 영감 줘서 고마워."
언니 덕분에 나도 영감을 얻었어. 레몬과 라임에 오렌지까지 추가해서 시트러스 정원 향기를 만드는 거지! 오렌지의 달콤함이 한 방울 섞이면 상큼한 향의 예리한 느낌을 살짝 눌러줘서 누구라도 편하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될 거야. 과일 오렌지보다는 오렌지 꽃이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언니랑 인사를 나누면 이제 아침을 먹을 시간이야. 나랑 할망구는 큰 탁자의 양쪽 끝에 뚝 떨어져 앉은 채로 하루 지나서 딱딱하게 굳은 빵과 진흙으로 끓인 죽 같은 걸 먹어. 날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런 걸 만드는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야. 답장할 때 할머니의 감자수프 레시피도 같이 좀 보내 줘. 부엌에 발을 들이면 내가 요리까지 떠맡게 될 거 같아서 두렵긴 한데... 도저히 이런 걸 먹고살 수는 없어!
낮에는 종일 가게에서 일하면서 손님들을 상대하고, 재료 재고를 파악해서 주문해야 돼. 점심 이후에 심부름꾼이 주문을 받으러 와. 프레드라고 시장에서 이런저런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내 또래 남자애인데, 첫인상은 별로였어. 걷어차는 사람한테도 꼬리를 치는 개 같은 성격이거든. 망할 할망구가 인사를 씹거나 말거나 얼마나 싹싹한지 몰라. 비굴한 녀석. 근데 나가면서 나한테 그러는 거야. 너한테서 좋은 냄새난다고, 초록 냄새.
나한테서 아직 우리 마을의 숲 냄새가 난다는 게 기뻤고, 프레드가 그걸 초록 냄새라고 정확히 표현해서 놀랐어. 역시 개과 인간이라 그런지 냄새에는 일가견이 있나 봐. 이 정도 센스가 있다면 괜찮은 아이일지도 몰라.
오후에는 쉬는 시간이 한 시간 있어. 난 주로 시장 골목을 다니면서 가게들을 구경하거나 모자 가게에 놀러 가곤 해. 그럼 언니가 장식장 안쪽에서 예쁜 앤티크 찻잔을 꺼내 차를 따라 줘. 내가 진짜 중요한 손님인 것처럼. 좋은 사람이야. 저번엔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할망구 욕을 실컷 했거든. 언니는 내 말을 안 끊고 끝까지 다 들어준 다음, 모자 만드는 일을 배우고 싶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얘기해 줬어. 그때부터 할망구가 날 구박할 때마다 속으로 '계속 이러면 확 모자 가게로 가 버릴 거야'라고 협박해. 정말 갈 생각은 없지만 위로가 되거든.
그릇 가게 아저씨는 말수가 적지만 좋은 사람인 거 같아. 내 생일이 3월이라는 걸 알고,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진 머그컵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어. 참, 여기 사람들은 내가 할망구의 일을 거들어 주려고 시골에서 올라온 먼 친척 소녀인 걸로 알고 있어. 가게 이웃들이 종족 원로들도 아닌데, 위대한 대마녀의 향수 공방을 이어받을 후계자 후보라고까지 소개할 필요는 없잖아. 우리 종족은 멀건 가깝건 한 핏줄로 연결돼 있으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냐.
가게를 닫은 다음에는 맛대가리 없는 저녁을 먹고, 조향실을 정리해야 돼. 향수를 만드는 데 사용한 유리병과 접시, 스포이트를 깨끗이 닦고, 탁자에 남은 재료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거야. 이러고 간신히 침대에 누우면, 마을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곯아떨어지기 일쑤야. 다음 편지에서는 좀 더 즐거운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사랑하는 라비니스로부터.
#3
친애하는 나의 고양이, 슈슈왑에게.
슈슈, 감자수프 레시피 고마워! 덕분에 아침 식탁이 한결 포근해졌어. 돌덩이 같던 빵도 수프에 푹 적시면 보들보들 촉촉하게 되살아나거든. 할망구도 맛있는 걸 먹더니 조금은 온화해지는 것 같아. 다음번엔 닭요리 레시피도 부탁할게. 닭 날개를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꿀풀을 듬뿍 넣고 끓인 소스에 바글바글 졸이는 그거 말야.
난 노새처럼 부려 먹히는 생활에 약간 익숙해졌나 봐. 안 힘든 건 아니지만 덜 힘들어. 요새 제일 즐거운 일은 저녁에 조향실을 정리하기 전 나만의 향수를 만들어보는 거야. 처음에는 만드는 족족 할망구한테 쓰레기라고 욕만 먹었거든? 근데 얼마 전부터 '쓰레기는 아니군'이라고 하더니 어제는 '나쁘지 않군'이라는 거야! 전에 말했던 '시트러스 정원'의 11번째 버전이었어. 그게 뭐 대단한 칭찬도 아닌데 엄청 기분이 좋더라. 다락방 내 침대가 구름으로 변한 것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면서 잠이 안 오지 뭐야.
좋은 소식... 이라고 해야 할까? 할망구가 딱히 나만 구박하는 건 아냐. 손님들도 인정사정없이 당하더라고. 한 번은 가격 흥정을 하려던 손님이 있었거든. 이해는 가. 15ml 한 병에 10 골드면 비싸긴 하지. 깎아달라는 처지에 맡겨놓은 듯이 너무 당당해서 얄밉긴 했지만. 자긴 7 골드밖에 없으니까 그것만 받으라면서 설레발을 치는 거 있지? 암튼 할망구가 노발대발하면서 소리라도 꽥 지를까 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웬걸? 웃는 거야. 와... 그렇게 심술궂은 미소는 머리털 나고 처음 봤어. 갈비뼈 안쪽에 서리가 싹 내리는 것 같더라. 손님도 겁을 먹었는지 우물쭈물 발을 빼려는데, 할망구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뱉듯이 말했어.
"십.오.골.드."
손님은 이 사태가 이해가 안 되는지 말문이 막혔는지 눈만 휘둥그렇게 떴고, 할망구가 다시 입을 열었어.
"이.십.골.드."
"살게요! 20! 20 골드 맞죠?"
난 손님이 약간 불쌍해졌어. 얼마나 다급했으면 지갑에서 돈 꺼내는 손이 파들파들 떨리더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달라는 대로 주는 수밖에. '엄마 향수'는 여기 아니면 세상 어디에서도 못 사잖아.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엄마 향수 공방'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고. 엄마 향수는 무조건 맞춤 제작이야. 엄마 하나하나는 전부 다른 사람이고 각자 고유한 향기를 갖고 있으니까. 게다가 다른 향수와 달리 엄마 향수를 만들 때는 꼭 마법이 필요하거든.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하지? 내가 여기서 일하고 처음으로 엄마 향수를 의뢰하러 온 손님 이야기를 해줄게. 방울이 딸랑 울리면서 가게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맞춤 향수를 주문하려는 손님인 걸 알았어. 보통은 진열대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그 손님은 곧장 카운터 쪽으로 걸어왔거든.
"안녕하세요? 엄마 향수를 만들려고요."
"네, 잠시만요. 키르케 님!"
난 할망구가 틀어박혀 있는 조향실 문을 두드렸지만, 문이 열리는 대신 두꺼비 울음소리 같은 타박만 돌아왔지.
"지금 바쁘니까 방해하지 마!"
"어... 엄마 향수를 찾는 손님이 오셨는데요."
"소지품 챙겨두고 상담 노트를 적어 놔! 꼼꼼하게!"
이렇게 첫 상담을 진행하게 된 거야! 20대 초반의 여자 손님이었어. 얼굴형과 이목구비가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해서 아기처럼 사랑스러운 인상인데, 눈빛이 아주 또렷하고 입매가 다부졌어. 아니나 다를까, 곧 대학 공부를 하러 먼 도시로 떠날 거라고 하더라고. 그럼 엄마를 자주 보지 못할 테니까 엄마 향수를 만들어서 가져가려고 온 거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대학 등록금을 마련했대. 대단하지?
"엄마는 어떤 분이세요?"
"엄마는... 잠시도 쉬지 않는 사람이에요. 제 밑으로 동생 셋이 더 있어서, 대가족을 보살피느라 늘 바지런하게 일하세요. 엄마가 노상 쓸고 닦는 덕분에 집 안 구석구석에 윤이 나고, 찬장에는 잼과 병조림이 가득하고, 옷장에는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린 옷가지가 가지런히 걸려 있어요. 그렇게 살림만 해도 힘든데, 제 등록금에 보탠다고 밤마다 레이스를 뜨거나 자수를 놓는 부업까지 하셨어요."
말이 끊겨서 올려다봤더니 손님의 눈자위가 살짝 붉어졌더라.
"혼자 멀리 떠나 있으면 외롭겠죠. 힘든 일도 많을 거고요. 하지만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엄마 생각을 할 거예요. 힘들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 우리 엄마. 걱정하지 마, 하나씩 해결하면 돼, 라면서 앞치마 끈을 질끈 묶는 엄마를요. 그럼 어디에서라도 난 다시 일어날 힘이 생길 거예요. 고향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엄마처럼요."
손님이 가져온 엄마의 소지품은 탄 자국이 남은 앞치마와 도자기 골무였어. 난 그걸 깨끗한 천 주머니에 담아 끈을 꽉 졸라 묶었지. 엄마 냄새가 한 점이라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다음 날, 조향실로 준비물을 가져갔어. 할망구는 상담 노트를 읽으면서 중요한 단서가 나올 때마다 마법 지팡이로 종이를 살짝 두드려. 그럼 조향 노트에 새로운 단어가 하나씩 추가돼. 가령 '쓸고 닦는'을 두드리면 '상쾌한 공기와 레몬향', '잼과 병조림'을 두드리면 '산딸기, 블루베리, 살구향', '옷장'을 두드리면 '참나무와 세탁비누향'이 떠오르는 식이야.
그다음에는 소지품에서 향기를 뽑아내. 향기가 아주 가늘게, 연기처럼 뽑혀 나오는데 도중에 흩어져서 날아가지 않도록 엄청 집중해야 한대. 이걸 지팡이 끝에 돌돌 말아 작은 공처럼 만들어서 유리병 속에 쏙 집어넣는 거야. 이 섬세한 작업이 시작되면 난 그분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서 끝날 때까지 숨도 크게 못 쉬어... 근데 할망구 이마 주름에도 땀이 송송 맺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까다롭긴 한가 봐. 언젠가 내가 이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숨만 나와.
향기를 옮긴 다음 소지품을 보면 이상하게 물 빠진 느낌이 들어. 실제로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지. 하지만 괜찮아. 다시 엄마한테 돌아가서 엄마 냄새가 배면 생생하게 되살아날 테니까.
이제 남은 건, 향기 공이 담긴 유리병 안에 나머지 재료들을 넣고 잘 섞는 거야. 참, 그거 알아? 향수를 만들 때 향기로운 재료만 쓰지는 않는다는 거. 특히 엄마 향수는 더 그래. 이번엔 양파 껍질, 부엌 화덕에서 긁어낸 그을음(난로는 안 되고 꼭 화덕이어야 한대), 생선 비늘 약간이 들어갔어. 상상도 못 했지? 군소리 한마디 없이 이걸 다 구해오는 프레드도 참 대단한 애야. 덕분에 내가 재료 조달까지 안 해도 되니까 얼마나 다행이야! 그 은혜를 생각하면 고마운 걸 넘어서 존경스럽기까지 해.
향수가 완성돼서 손님이 찾으러 왔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간이야! 결과가 잘 나왔는지 확인할 수 있게 가게에서 살짝 한 번 뿌려 보거든? 눈을 감고 가슴 가득 향기를 들이마시자 바로 알 수 있었어. 이 엄마가 어떤 분인지.
항상 웃는 인상의 온화한 사람인데, 집 안팎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척척 해결하는 거야. 그래서 같이 있으면 무척 안심이 돼. 아주 큰 나무 같아서 실컷 어리광을 부려도 될 것 같아. 근데 어느 날 문득 엄마 혼자 있는 모습을 봤더니, 내 생각보다 훨씬 자그맣고 사랑스러운 꽃송이였어. 희미하게 번지는 라일락 잔향처럼.
"정말... 우리 엄마네요."
손님이 감탄하는 소리에 눈을 떴어. 역시 대마녀는 괜히 대마녀가 아냐. 마음속으로 박수를 칠 수밖에 없더라. 인정하는 의미에서, 앞으로는 할망구라고 부르지 않기로 결심했어. 또 연락할게!
사랑하는 라비니스로부터
#4
친애하는 나의 고양이, 슈슈왑에게.
슈슈, 오늘 낮에 좀 웃기는 일이 있었어!
쉬는 시간이라 엘리 언니네 모자 가게에 놀러 갔거든. 오늘은 파란 수레국화 꽃잎을 동동 띄운 홍차를 대접받았어. 그릇 가게 아저씨한테 선물 받은 새 찻잔이랑 꽃잎이 잘 어울려서 딱 보는 순간 벌써 기분이 산뜻하더라고. 저번에 그려서 보냈던 거 생각나지? 항아리처럼 배가 불룩하고, 파란 바탕에 연하늘색과 보라색 물고기가 그려진 머그 말야. 난 요새 어디를 가도 항상 그걸 가지고 다녀. 내 냄새가 배게 한 다음 향기를 뽑아내는 연습을 해 보려고.
다음엔 '파란 향기'를 만들어 볼까 해. 달달한 향은 거의 없이 신선하고 그윽한 느낌으로. 이 향수를 뿌리면 파란 하늘 아래 파란 호수가 펼쳐지고, 호숫가에 만발한 수레국화밭이 눈앞에 그려지는 거야! 그리고 자그마한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음표처럼 튀어 오르는 거지. 그 통통 튀는 느낌은 무슨 향으로 표현하면 좋을까. 오도독한 견과류나 나무 열매? 아니면 간간한 소금향? 이건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어.
엘리 언니랑 같이 있으면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가 퐁퐁 떠오르곤 해. 근데 언니도 그렇대! 국화는 가을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여름 신상 시리즈에 수레국화를 활용해 봐야겠다고 했어.
"어때, 라비니스? 하얀 여름 드레스에 파란 수레국화 모자를 쓰면 너무 예쁠 것 같지 않아?"
"음... 뱃놀이 갈 때 딱이겠네요."
"바로 그거야!"
언니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고 내가 손뼉을 부딪히면서 짝,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어. 역시 우린 잘 통해. 그때 프레드가 왔어.
"우리 햇살 강아지 왔어? 여기 앉아서 차 한잔해."
햇살 강아지는 언니가 프레드를 부르는 별명이야. 귀엽고 해맑고 꿋꿋한 게 햇살 강아지 같다나? 난 고개만 까딱하면서 속으로는 내가 붙인 별명을 불렀어. 개과 인간. 근데 프레드가 탁자 위에 하트 모양 상자를 턱 내려놓는 거야. 반짝반짝 광택이 나는 빨간 하트 테두리에 하얀 레이스를 빙 둘러서 예뻤어. 더 중요한 건! 거기서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기더라는 거지. 뚜껑을 여니까 역시나, 노릇노릇한 쿠키가 가지런히 담겨 있더라고.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어요."
"오, 웬 과자야? 포장부터 고급스러운데?"
"저번에 도시 밖에 있는 마을까지 배달 가느라 수고했다고 선물로 받은 거예요."
상자 크기에 비해 쿠키가 얼마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바삭바삭하고 버터 향이 풍부했어. 음... 생각하니까 또 먹고 싶다. 개과 인간 프레드, 좋은 인간.
그렇게 셋이서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언니가 프레드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거야.
"얘, 프레드! 넌 우리 도시에서 안 다니는 데가 없잖아?"
"그렇죠."
"사람도 엄청 많이 만나고."
"그러게요."
"그런 프레드가 이 도시에서 제일 예쁘다고 인정한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구더라?"
프레드는 낭패라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어.
"아... 그거야 당연히 엘리 누나죠."
"에이, 저번에는 그렇게 말 안 했으면서? 왜 갑자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그러실까. 그녀의 눈은 겨울 숲처럼 짙은 초록색이고 등 뒤로는 풍성한 밤색 머리채가 휘날린다며."
"아, 누나! 그만 좀 하세요."
프레드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벌떡 일어났어. 언니가 웃음을 참으면서 대꾸했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차는 다 마시고 가."
그러니까 프레드가 절반 정도 남은 차를 한입에 홀랑 털어 넣는 거야. 세상에, 뜨겁지도 않나?
"다 마셨어요. 저 이제 갈게요!"
뛰는 건지 나는 건지 모르게 멀어져 가는 뒤통수가 다 사라지기도 전에, 언니는 빵 터져서 깔깔 웃기 시작했어. 뭐야, 뭐야. 왜 나만 못 알아듣고 있는데. 난 답답해서 언니의 소맷자락을 잡고 흔들었지.
"왜요, 언니?"
"그게 너야."
"뭐가요?"
"프레드가 말한 이 도시에서 제일 예쁜 사람!"
아하하... 나도 언니를 따라 웃었어. 그거 말고는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 싫지는 않은데 뭔가 좀 어색한? 이상한 기분이었어. 할머니가 왜 사람은 견문이 넓어야 된다고 하셨는지 알 거 같아. 역시 많이 보고 다니니까 보는 눈이 좋아지나 봐. 흠... 아무래도 개과 인간보다는 햇살 강아지가 더 예쁜 별명인 거 같지? 프레드한테는 여러모로 고마운 것도 많고 해서, 나도 앞으로는 그렇게 부를까 봐.
사랑하는 라비니스로부터
#5
친애하는 나의 고양이, 슈슈왑에게.
슈슈, 놀라운 소식이야! 아무래도 나 키르케 님한테 인정받는 거 같아. 얼마 전에 젊은 남자 하나가 헐레벌떡 가게로 뛰어 들어왔어. 어찌나 다급해 보이던지, 약국은 맞은편이라고 말해줘야 하나 싶더라고. 가끔 진열대만 보고 공방을 약국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남자가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말했어.
"여기가 엄마 향수 만드는 공방이 맞나?"
"네."
그는 날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어.
"주인은?"
"조향실에서 작업 중이세요."
"중요한 일이니까 이 가게 주인을 불러 줘."
"지금 바쁘시니까 저한테 얘기하시면 돼요."
그러자 남자가 위협적으로 몸을 부풀리면서 큰 소리를 냈어. 왜, 작은 개들이 큰 개 옆에 가면 괜히 사납게 짖어대면서 발광하는 거 있잖아. 물론 주인이 옆에 딱 붙어 있을 때만 말이지만.
"어린애랑 할 얘기가 아니니까 당장 주인 불러!"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진상이구나! 진상이라는 말 처음 듣지? 나도 여기 와서 엘리 언니한테 배웠어. 진상이 뭐냐면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남들을 개무시하면서, 자기의 어떤 무리한 요구라도 굽실대며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예를 들자면, 봄소풍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맞춤 모자를 주문한 다음 소풍 다녀왔으니까 환불해 달라고 우기는 그런 사람.
신기해서 보고 있었더니, 내 얼굴 앞에 대고 정신없이 손을 흔들더라고.
"이봐? 내 말 안 들려? 귀가 먹었나?"
귀가 먹었는지 의심하면서 손은 왜 펄럭거리는 거야. 귀가 안 들리면 눈도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나? 아무튼 난 그때 엘리 언니한테 물어봤지. 진상은 어떻게 상대해야 하냐고. 그러자 언니가 꿀팁을 줬어.
"오, 라비니스. 걱정할 거 없어. 넌 직원이니까 진상이 나타나면 굳이 상대하지 말고, 주인한테 넘기면 돼."
그래서 굳게 닫힌 조향실 문 앞으로 갔지.
"키르케 님, 엄마 향수를 찾는 손님이 오셨는데요."
"난 오전 내내 바쁠 거라고 했잖아! 상담이라면 네가 알아서 진행해!"
흠.. 지금까지 생각 못 했는데, 이 가게는 주인도 진상이야.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꼭 가게 주인을 불러 달래요."
천천히 문이 열렸어. 그에게 닥쳐올 운명을 예감한 듯이 경첩이 삐걱대면서 구슬픈 비명을 질렀고, 대마녀가 모습을 드러냈어. 작업용 가운에 달린 시커먼 두건 아래로 두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보통 사람들은 키르케 님을 보면 한 가지만 떠올리게 마련이지. 마.귀.할.멈. 큼직한 매부리코 아래 뾰족한 주걱턱이 그림책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전형적이긴 해. 남자는 바로 다리 사이에 꼬리를 말았어.
"가게 주인 되십니까? 저는.."
키르케 님이 한 손을 들자 그가 말을 딱 멈췄어. 침묵 마법이라도 당한 것처럼.
"누가 주인인가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상담을 진행할 수 있는 이 애가 내 대리인이니 가게 주인이나 다름없지. 내 대리인과 상담을 할 거면 하고, 그렇게 못 하겠으면 나가."
꺄, 주인이나 다름없대! 이건 좀 감동이야!
내가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와중에 남자는 금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렸어. 그때 남자의 주인이 들어오더라고. 성질 더러운 소형견이 믿는 구석. 그런 게 따로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지. 두 번째 남자는 고급 정장을 차려입은 중후한 신사였는데, 대치 상황과 얼어붙은 분위기를 한눈에 파악한 눈치였어.
"실례합니다. 엄마 향수를 의뢰하고 싶은데... 무슨 일이라도?"
남자는 주인을 만나서 반가운지 낑낑대는 소리를 냈어.
"이 분은 곧 차기 시장으로 취임하시는 제임스 크로퍼드 님이라고요."
나도 우리 주인을 대신해서 나섰지.
"이 분이 가게 주인을 찾길래 저한테 말씀하시라고 했더니, 당장 부르라고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그래서 가게 주인이 나오셨고요. 지금 바쁘니까 저랑 상담을 하던가 아니면 나가시라고 한 상황이에요."
제임스 씨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남자에게 물었어.
"테오, 이 말이 사실인가?"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위압감이 확 느껴지더라.
"아니, 저는... 당연히 가게 주인이 시장님을 응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런 어린애한테 무슨 중요한 얘기를.."
키르케 님이 다시 손을 들어 테오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어.
"어린애가 아니야. 라비니스 블루벨 위치하젤, 장차 내 후계자가 될 우리 공방의 정식 견습생이지."
휴.. 찢었다. 슈슈, 답장할 때 비장의 딸기크림파이 레시피도 같이 좀 보내 줘. 이 정도 인정이라면 디저트로 보답해야 마땅하니까. 그 이후로 사태는 빠르게 정리됐어. 제임스 씨는 비서의 무례를 사과했고, 테오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가게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키르케 님은 조향실로 돌아갔어.
난 제임스 씨와 마주 앉아 상담을 시작했지.
"어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사실 저는...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오랫동안 모르고 살았습니다. 유모와 가정교사의 손에 자랐거든요. 어머니는 항상 바쁘셨어요.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다른 어머니들은 예쁜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는데, 저희 어머니는 졸업식에나 간신히 얼굴을 비추셨죠. 어릴 때는 그런 어머니를 원망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바쁘셨는데요?"
"바깥일을 하셨거든요. 어머니는 이 도시 최초의 여성 부시장을 지내셨습니다. 비서로 시작해서 부시장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분이죠. 어머니가 시장이 되지 못한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당시에는 여성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가 부시장이었거든요. 성인이 되어 시청에 취직한 다음에야 비로소 어머니를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저한테 어머니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말해 주더군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어.
"처음에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어머니한테 지고 싶지 않았어요.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저 자신으로 각인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머니를 이해하게 됐어요. 어떤 어려움을 어떤 마음으로 이겨내셨을지,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일하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다음 주가 시장 취임식이네요."
"축하드려요! 어머니가 정말 자랑스러우실 것 같아요."
제임스 씨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어.
"그랬으면 좋겠는데... 취임식에 오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요새 정신이 맑지 못하시거든요. 저만 보면 그렇게 사과를 하세요. 소풍에, 발표회에, 운동회에 못 가서 미안하다고요. 어머니를 다시 현재로 모셔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미안하실 거 하나 없다고, 다른 어떤 어머니보다 더 좋은 것을 물려주셔서 감사하다고요. 무엇보다 어머니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 내시면 좋겠어요."
나도 궁금해졌어. 사람들이 자기 엄마를 기억하기 위한 향수인 줄만 알았는데, 이 향기를 맡고 엄마가 자기 자신을 되찾는 것도 가능할까?
제임스 씨가 챙겨 온 어머니의 소지품은 굽 낮은 검은 가죽구두, 모서리가 해어진 서류 가방, 한 줄짜리 진주목걸이였어. 키르케 님이 요청한 추가 재료는 만년필 잉크, 시청 문서보관실에 쌓인 먼지, 부시장 집무실에 깔린 카펫의 보푸라기였고. 아무리 프레드라도 이런 걸 어떻게 구해올까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어. 제임스 씨가 테오한테 재료 조달을 맡겼거든.
다음날 테오가 재료를 챙겨 왔어. 손에 잉크 얼룩이 묻고 머리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채로. 하루 만에 진상병이 싹 나아서, 둘만 있는데도 깍듯하게 라비니스 양이라고 부르더라고. 완성된 향기가 궁금했는데, 내가 모자 가게에 놀러 간 사이 찾아갔지 뭐야. 파란 향기랑 비슷한 느낌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좀 아쉬웠지.
그런데 오늘 아침, 공방 앞에 근사한 자동차가 멈춰서는 거야. 운전석에서 부리나케 튀어나온 테오가 뒷문을 열자 제임스 씨가 먼저, 백발의 노부인이 뒤따라 내렸어. 가게 문이 열리는 순간, 진하지는 않은데 쨍한 감청색 향기가 훅 풍겼어. 파란 계열은 맞지만 한낮의 호수가 아니라 맑고 짙은 밤하늘이었던 거야.
노부인은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어. 자세가 바르고 몸가짐이 우아한 분이었어. 오래된 종이 냄새, 열심히 사는 사람의 땀 냄새 사이로 진주알처럼 단정하고 서늘한 잔향을 맡으니 나도 모르게 등이 쭉 펴지더라. 마냥 편안하거나 포근하지는 않지만, 말로만 이래라저래라 하는 대신 본인이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당당한 어머니였어.
"취임식에 가기 전에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서 들렀어요. 덕분에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에요."
"아드님이 무척 자랑스러우시겠어요."
"그럼요. 제임스는 내 인생에 일어난 가장 멋진 일이니까요."
"부시장이었던 어머니의 뒤를 이어 시장이 되다니 대단하세요."
그분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어. 뒤에 선 아들이랑 꼭 닮은 고요하고 선선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네요. 하지만 내가 제임스를 자랑스러워하는 건 시장이 되어서가 아니에요. 시장이건 아니건 그저 내 아들이 자랑스러울 뿐이죠."
두 사람은 다시 차를 타고 떠나갔어.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내 손에는 악수의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었어. 대체로 건조하고 매끈한데 펜 잡는 부분에 배긴 굳은살이 느껴지는 따스한 손. 그리고 열의가 담긴 적당한 악력. 손만 잡아도 믿을 수 있는 전문가라는 걸 알겠더라고. 나도 이런 악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
사랑하는 라비니스로부터
#6
친애하는 나의 고양이, 슈슈왑에게.
슈슈, 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됐어. 놀라지 마, 우리 공방에는... 궁극의 엄마 향수가 있었어! 세상에 그런 향기가 존재한다니 믿기지가 않아. 이걸 알게 된 건 프레드 덕분이야.
오늘 오후, 내가 쉬는 시간에 맞춰 프레드가 가게로 놀러 왔어. 키르케 님이 티 세트를 써도 된다고 허락해 주셔서 가끔 둘이 차를 마시곤 해. 오늘은 프레드가 복숭아 젤리를 가져와서 나도 복숭아향 홍차를 내놨지. 복숭아가 한껏 무르익어 가는 과수원을 상상하면서 향기를 들이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프레드가 묻는 거야.
"라비니스, 엄마 향수 말야. 엄청 비싸다고 하던데 얼마야?"
"15ml에 10 골드."
"그거 진짜 효과가 좋아?"
"무슨 효과?"
"엄마 냄새를... 맡을 수 있어?"
"당연하지! 이제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 의뢰하는 손님마다 전부 자기 엄마 냄새라고 했으니까."
"그렇구나."
그리고 한동안 프레드는 찻잔만 물끄러미 쳐다봤어. 마시지도 않으면서. 답답해서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지.
"왜 너도 엄마 향수가 필요해?"
"응, 갖고 싶긴 하지만.."
아, 정말! 낑낑거리는 소리만 안 냈지, 시무룩한 꼴이 귀랑 꼬리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거야.
"돈이 없구나. 그럼 나한테 맡겨 보던가. 언젠가는 나도 엄마 향수를 만들어야 하니까, 연습하는 셈 치고 만들어보지, 뭐.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 정말? 고마워, 라비니스!"
속에서 불이 켜진 것처럼 프레드의 얼굴이 확 밝아졌어. 개과 인간들이란 참 알기 쉽다니까. 근데 그게 가소롭지 않고 좀 귀여운 것 같기도?
"그럼 소지품이 필요해. 엄마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물건일수록 좋아.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이야기도! 잠깐만 기다려, 상담 노트를 가져올게."
나도 약간 신이 나서 곧장 일어나는데 프레드의 어깨가 다시 맥없이 툭 떨어졌어.
"없어.."
"뭐가?"
"소지품도 이야기도. 우리 엄마는 날 낳고 바로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난 한 번도 엄마를 가져본 적이 없어."
맙소사..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이럴 땐 뭐라고 얘기해야 되는 거야? 누가 봐도 안 괜찮은 일인데, 괜찮다고 할 수도 없고. 뭐라도 쥐어짜 내려고 애쓰다가 그만 무리수를 던지고 말았어.
"그, 그럼! 프레드 향수라도 만들던가!"
"프레드 향수? 내 냄새 말이야? 그런 걸 왜 만들어?"
그러게.. 내심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어.
"뭐, 여자친구라도 생기면 선물하던가. 널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프레드 향수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러자 프레드가 씩 웃었어.
"그런 거면 난 프레드 향수 말고 다른 게 갖고 싶어."
"다른 거 뭐?"
"음.. 라비니스 향수?"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어. 그 와중에 '이제쯤이면 물고기 머그에서 향기를 뽑아내 라비니스 향수를 만들 수도 있겠다' 같은 생각은 왜 스쳐 지나갔는지 몰라. 아무튼 난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 자리에 꽁꽁 얼어붙었지. 다시 프레드가 입을 열어 싸한 침묵을 깨트릴 때까지.
"미안해, 라비니스. 기분 나빴지?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내가 헛소리를 했어. 생일이라고 괜히 들떴나 봐."
그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때부터 약간 기분이 나빠졌어. 우리가 왜 아무 사이도 아닌데? 매일 얼굴 보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단둘이 차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이 정도면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럼 도시 애들은 이런 사이를 뭐라고 부르는데. 지나가는 행인 3?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생일?! 왜 말 안 했어?
"축하 안 하거든. 내 생일은 엄마가 돌아가신 날이라 집에서도 한 번도 챙긴 적 없어."
아.. 미치겠다. 이건 진짜 엉망진창이다. 어떡하지? 이런 역대급 사연 폭탄이 쾅쾅 터지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할머니, 도와주세요! 급하니까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마음속으로 할머니를 불렀어. 그러자 갑자기 조향실 문이 덜컹 열리는 거야. 간 떨어지게 놀라서 벌떡 일어났지.
"키, 키르케 님, 뭐 필요하신 거라도.."
키르케 님은 물병만 한 크기의 대용량 향수병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나더니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프레드에게 말했어.
"오늘이 네 생일이라고?"
"아, 네.."
"그런데 축하를 못 받았다고? 아무 데서도?"
"집에서는 원래 그렇고, 밖에서는... 누나랑 형이 엄마 죽은 게 뭐 좋은 날이라고 떠들고 다니냐고 해서요."
프레드는 죄지은 것도 없이 주눅이 들어서 더듬더듬 말했어.
"그런데 내가 알아 버렸군. 똑바로 서 봐. 네가 궁금해하던 엄마 냄새를 맡게 해 줄 테니까."
만든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니, 애초에 만들 수가 없는데? 얘는 시작부터 엄마가 없었다니까요?!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엄마 향수가 뿌려지더니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어. 생각하니까 지금도 온몸이 떨려. 공기 중에 향기가 확 퍼지면서 세계가 딱 멈추는 거야. 멈춘 시간과 공간 속에는 수많은 엄마들이 존재했어. 다혈질 엄마, 잔소리꾼 엄마, 헌신적인 엄마, 유머러스한 엄마... 엄마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어. 그 많은 엄마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하지만 한소리로 말하는 거야.
- 사랑해 우리 아가. 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아가란다.
마치 우주에 흩뿌려진 별들이 한순간에 제자리를 찾으며 별자리가 만들어지는 장면 같았어. 100명의 엄마한테 사랑받는 느낌. 세상 모두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우주의 질서가 회복되는 느낌. 나는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확신. 프레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엄마를 부르며 펑펑 울었어. 이건 비밀인데, 나도 소파 뒤에 숨어서 입을 막고 울었어. 물론 키르케 님은 표정 하나 안 변했지. 과연 대마녀야.
"라비니스! 뭘 멍청하게 있는 거야. 궁극의 엄마 향수를 15ml 병에 담아서 프레드한테 줘. 이건 공짜야."
그 말만 남기고 키르케 님은 조향실로 돌아갔어. 손님들한테서 마지막 한 푼까지 쪽쪽 빨아내는 수전노, 냉혈한인 줄만 알았는데... 대마녀님은 돈만 밝히는 도마뱀이 아니었던 거야! 게다가 누구라도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향수라니 엄청나잖아. 슈슈, 나 여기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
사랑하는 라비니스로부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