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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Oct 26. 2024

소설] 다시 봄

현우가 입원했던 병원에 도착했다. 대학 캠퍼스와 연결된 이 병원은 녹지가 풍부하다. 특히 벚나무가 많아, 매년 봄마다 가지가 휘어질 만큼 흐드러진 벚꽃이 장관을 이루곤 한다. 

하지만 나는 벚꽃 구경을 하는 대신 곧장 암 병동으로 갔다. 현우의 입원실은 이 건물 3층이었다. 그가 죽은 뒤로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는데, 13년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입구에서부터 발이 저절로 움직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려 왼쪽으로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한 번 틀어 4번째 병실. 

문이 열려 있어 살짝 들여다보니 안에 아무도 없다. 누가 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 아예 입원 환자가 없는 것처럼 침구가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다. 마침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나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여기 현우가 있었고, 여기에서 그가 죽었다. 아홉 살에 처음 만나 5년을 함께 보내고 열네 살에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난 내 가장 친한 친구. 나는 그를 내 영혼의 반쪽처럼 사랑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역시도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친구로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와르르 쏟아지는 기억의 파편이 매섭게도 나를 찔러 와, 문에 등을 기댄 채로 한참 숨을 골라야 했다. 홀로 남은 나는 어느덧 스물일곱이 되었다.

병실 안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둑어둑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눈앞이 캄캄한 절망의 색조는 아니다. 창문 덕분이다. 정면으로 난 작은 창문 하나가 빛을 던져, 어둠을 한결 부드럽게 만들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어 창문을 찍었다.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창문이 꼭 문처럼 보인다. 이 어둠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진을 찍으면서, 쇠붙이가 자석에 이끌리듯이 창문으로 다가갔다. 

비로소 창문 앞에 서자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시선을 내렸더니 발치 부근에 큰 벚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활짝 펼치고 있다. 딱히 감흥은 없지만 셔터를 몇 번 눌렀다. 사진을 확인하는데 연분홍 구름 사이로 까만 것이 언뜻 보인다. 검은 재킷에 흰 셔츠.. 사람이다. 누군가 나무 아래 서 있다. 나는 다시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꽃송이가 다닥다닥 붙은 가지들이 서로 겹쳐 좀처럼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 줌을 바짝 당긴 채로 이리저리 몸을 틀었다. 뷰파인더에 얼굴이 담기는 순간,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했다. 은수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시선만 대충 이쯤으로 던지고 다른 생각을 하는지, 내가 있는 걸 알아보지 못한 눈치다. 

잊었던 풍경 한 조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창문, 그리고 현우의 뒷모습. 

- 뭘 그렇게 봐? 

내가 살금살금 다가가서 묻자 그는 화들짝 놀랐다. 

- 아니, 그냥 꽃구경. 

- 그럼 나가서 볼까? 날도 따듯한데.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가자, 현우는 뭔가를 찾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뭐 찾아? 떨어뜨린 거 있어? 

- 아냐, 아무것도. 

은수였나. 그때도 저 자리에서 현우의 병실을 보고 있었던 걸까.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이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은수야!" 

그녀가 움찔하더니 손그늘로 햇살을 막고 이쪽을 유심히 본다. 나는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나야, 준호!" 

내가 누구인지 확인한 은수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잠깐만! 기다려, 가지 마!"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손을 한 번 들어 작별을 고했다.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도 따라잡기는 글렀다. 내가 일층에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다음이겠지. 카메라를 내려놓고 창틀에 발을 걸쳤다.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3층이지만 밑에 나무도 있으니까, 설령 다리가 부러져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나이를 먹고 할 짓이 아닌 걸 알지만 별 수 없다. 나는 그녀를 잡아야 하니까. 절대로 놓칠 수 없으니까. 지면을 디딘 발을 막 차려는데, 은수가 버럭 소리를 쳤다. 

"뭐 하는 짓이야?!" 

"너 만나러 가려고." 

".. 걸어서 내려와. 기다릴 테니까." 

"정말이지?" 

"난 약속은 지켜." 

한 번에 두 계단씩을 건너뛰면서 날듯이 내려갔다. 기적적으로 다리가 멀쩡한 채로 은수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녀가 못 달아나게 옷소매부터 살그머니 잡은 다음, 몸을 반으로 접고 헉헉대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미쳤구나."

"왜.. 왜 안 올라왔어?"

"뭘 올라가? 아무도 없는 병실에."

"오늘 말고 예전에.. 현우가 있었을 때."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끝으로 가볍게 웃었다. 

"네가 나 싫어했잖아. 현우가 너 없을 때 오는 게 좋겠다고 하니까, 밖에서 기다렸지. 그런데 네가 없을 때가 없더라. 매일같이 찾아와서."

"싫어한 거 아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져 제풀에 흠칫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덧붙였다. 

"싫은 게 아니라 그냥 좀 어색해서.." 

내 귀에도 딱히 설득력은 없다. 은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색해서 불편한 게 싫은 거지. 그런데 뭐, 상관없어. 나도 안 보고 싶었으니까. 나는 너 싫은 정도가 아니라 미워했거든."

"왜?"

그녀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는 숨도 못 쉬고 그 입술만 보다가, 잡은 옷소매를 살짝 흔들었다. 혼잣말처럼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좋아했던 현우한테 그토록 아프게 사랑받았던 네가 미웠어. 네 잘못은 아니지. 너는 현우가 어떤 마음인지도 몰랐으니까. 어쩌면 내가 그 마음을 전한 게, 오히려 너한테 미안한 일인지도 몰라." 

"그건 왜?" 

"알면 무슨 소용인데. 알아서 뭐가 달라져? 너도 끝까지 현우의 마음을 몰랐다면 지금보다는 덜 괴로웠을 거야." 

정말 그런가. 은수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내가 현우의 마음을 몰랐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현우가 죽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 해는 봄이 일찍 와서, 3월 중순부터 벌써 기온이 올라가고 벚꽃이 만개했다. 벚꽃은 딱히 향기가 없지만, 천지에 휘날리는 연분홍 꽃잎들은 눈으로만 봐도 꽃 향기가 물씬 풍기는 듯한 장관이었다. 나는 현우의 휠체어를 밀고 돌아다니다가 외진 곳에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 거기 앉았다. 그의 휠체어를 벤치 옆에 바짝 붙이니까 둘이 나란히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났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눈발이 날리는 듯한 꽃구경을 했다. 겨울인데 따뜻한 겨울, 눈이 펑펑 내리는데 연분홍색 눈. 저절로 마음이 말랑해지는 풍경 속에 잠겨, 나는 상상 속의 새콤하고 은은한 향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때, 현우가 입을 열었다. 

"고향 생각난다." 

"왜, 고향에 벚나무가 많아?" 

"응. 내가 살던 동네에 특히 많아서 봄이 되면 벚꽃 축제도 하고 그랬어. 유치원 때 엄마, 아빠랑 셋이 봄 소풍 갔던 거.. 잊고 지냈는데 갑자기 기억이 나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를 보는 그의 눈길은, 그즈음에 늘 그랬던 것처럼 담담했다. 뭔가 초월한 듯한, 이미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건너간 듯한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나는 슬쩍 눈을 피하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담담한 장막 사이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열렬하고 간절한 눈빛이 드러났다. 

나는 압도됐다. 돌진하는 헤드라이트 불빛 앞에 그대로 얼어붙은 사슴처럼. 현우뿐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눈길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한 번 깜빡이는 법도 없이 내게로 고정된 그의 눈빛,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꽃잎들, 점점 산소가 희박해지는 듯한 주변 공기가 사람을 미치게 몰아간다. 

그건 가슴속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이 간질대면서도 빠개질 것처럼 뻐근하게 아프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입이 바짝 말라 말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바닥 안에 움켜쥔 여린 꽃잎들을 손톱으로 꾹꾹 눌러 찢어발기는 것 말고는. 

그날, 현우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뻔히 듣고도 묵살해 버렸다. 

"바, 바람이 좀 많이 부는데? 이제 그만 들어갈까?"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현우가 한 박자 늦게 동의했다. 실제로는 아무 소용도 없지만, 다만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한 마디. 나는 거기서 느껴지는 희미한 체념의 기척을 지우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워질 장면이라 믿었고, 실제로 기억 속에 봉인했다. 하지만 어떤 풍경은 심장에 각인돼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끝까지 잊고 지내려 했지만 다 기억나고 말았다. 나는 어떻게도 할 수 없었고, 어떻게도 하지 않았고, 이제는 네가 떠나고 없다는 것까지. 

모르는 척은 최악의 대처였다. 현우뿐 아니라 나에게 더욱. 나는 그 이후로 13년에 걸쳐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비칠대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그래? 괜찮아?"

나를 일으켜 주려고 내민 은수의 손을 꽉 잡은 채로 고개만 번쩍 들었다. 

"아니, 안 괜찮아. 그리고 알아야 돼. 아는 게 시작이야. 모르는 척해서 해결되는 일이 없으니까. 실은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묻고 사는 거야. 곪아 터질 때까지." 

"무슨 소리야?" 

"나는 지금 분명하게 안다는 소리야. 너에 대한 내 감정을."

상상 속의 향기가 되살아난다. 새콤한 체리와 달콤한 바닐라, 그리고 예전에는 없었던 향기가 하나 더 추가됐다. 은수에게서 풍기는 베르가못. 이건 허상의 벚꽃 냄새와 달리 실제로 존재한다. 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다. 그게 너무 고마워서, 믿기지가 않아서 눈앞이 서서히 흐려진다.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에게 고백했다. 

"나는 이제 후회하고 싶지 않아. 그런 지독한 일은 또 당하고 싶지 않아. 남은 시간이 영원하지 않고, 기회는 이 순간에만 유효한 걸 아니까 놓치고 싶지 않아."

그녀가 곤란한 얼굴로 손을 빼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을 더 가져가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우리 그만 아프자. 정말 많이 아팠고 한참 돌아왔잖아. 이제 그만.. 행복하자."

허공을 날던 꽃잎이 내 뺨에 찰싹 달라붙는다.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된 탓이다. 그간 억눌려 있었던 눈물이 봇물 터진 것처럼 한꺼번에 넘쳐흐른다. 

"이제 와서 나라는 거야? 정말 못 말리겠네.."

냉담한 목소리였지만, 은수의 입술이 떨리고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때도 미안했고, 지금도 미안해. 하지만 나는 더는 그렇게 모른 척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은 못 살겠어. 미안해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그녀는 나를 마주 안지 않았지만, 몸을 뒤틀거나 빠져나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은수에게 거부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간의 상실과 고통이 한결 누그러지는 기분이 든다.


이 봄에 내게 가능한 기적이 있다면, 그건 잃었던 것을 되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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