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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Oct 26. 2024

소설] 신전 관리인의 하루

세상 만물이 밖으로 뛰쳐나오고 싶어 하는 봄날이다. 땅속에서 지렁이, 민들레, 두더지가 머리를 쏙쏙 내밀고, 나뭇가지가 무겁게 매달린 꽃눈의 두터운 껍질이 튿어지며 연초록 새싹이 기지개를 켠다. 모든 잠든 자들을 깨우는 봄날. 어서 일어나서 웃고 춤추며 살아 있다는 기쁨을 한껏 즐기라는 아우성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코끝에 감도는 훈훈한 공기에서 여자는 남쪽 나라의 고향 땅을 떠올린다.


벅차게 울려 퍼지는 환희의 송가를 뒤로 하고, 허름한 3층짜리 건물에 들어선다. 어둑한 로비를 지나 더 어두컴컴한 지하로 내려간다. 좁은 복도를 따라 비슷하게 생긴 문들이 다닥다닥 길게 늘어서 있다. 그녀는 손안에 쥔 열쇠의 번호를 확인하고, 왼쪽 4번째 방문을 연다. 오늘은 여기가 그녀의 신전이다. 오늘 하루 이 공간을 거쳐 가는 모든 신들을 빈틈없이 받들어 모실 수 있기를. 짧은 기도를 마친 뒤 구석에 놓인 스탠드를 켠다. 달깍, 소리와 함께 오렌지색 조명이 좁은 방을 은은하게 밝힌다. 옥탑방에 쏟아지는 햇살을 머금고 바삭하게 마른 시트를 침대 위에 깐다. 수건과 오일 통을 담은 바구니는 탁자에 올린다. 탁자 위 가습기에 물을 채우고 전원을 누른다. 마지막으로 음악을 재생한 다음 볼륨을 적당히 낮춘다. 준비 완료.


사람들은 그녀를 마사지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신전 관리인이라고 칭한다. 인간의 육신은 하나하나가 각자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므로.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 역시 신전 관리인이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신전을 구석구석 매만지며 뭉친 곳을 풀고 막힌 곳을 뚫어 최선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은, 삼대째 내려오는 가업이자 그녀의 소명이다. 고향을 떠나 이 멀리까지 온 건 물론 돈 때문이지만,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돈 때문만은 아니다.


신전의 상태를 살피면 그가 어떤 신을 모시는지 알 수 있다. 첫 번째 손님은 다부진 근육질의 몸을 지녔다. 뜀박질로 혹사당한 무릎 관절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정강이는 연신 넘어지고 채이느라 생긴 멍투성이다. 갓 생긴 붉은 멍과 아물어가는 푸른 멍이 서로를 밀어내며 다리를 얼룩덜룩하게 물들이고 있다. 허벅지 둘레가 어린아이 몸통만 하다. 그녀는 서툰 한국어로 묻는다. “운동해요?” “아, 축구요.” 그가 모시는 신은 승리의 신이다. 어린 시절부터 뼈를 깎는 고행을 요구하는 가혹한 신.


두 번째 손님은 팔과 손등에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하다. 그녀는 상처를 피해 오일을 문지르며 물었다. “고양이 키워요?” “네, 길에서 살던 애를 계속 지켜보다가 큰맘 먹고 집에 데려왔어요. 어제 목욕시키느라 와... 죽을 뻔했네요.” 마사지를 마친 뒤, 손님은 자랑스레 고양이 사진을 보여준다. 연회색 줄무늬에 푸른 눈동자. 귀여움만으로 군림하며 따끈하고 말랑한 몸뚱이와 보송보송한 털의 축복으로 인간의 자발적인 충성을 이끌어내는 신이다.


세 번째 손님은 어깨와 고관절이 돌덩이처럼 뭉쳤다. 고관절을 누르고 비틀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온다. “오래 앉으세요?” “네, 요즘 야근이 잦아서.” 스트레스가 심한 것 같다는 다음 말은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지구를 떠받치는 아틀라스처럼 손님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는 승모근을 정성 들여 주무를 뿐이다. 그가 헌신하는 일상은 언뜻 소박한 것 같지만, 그 신의 가호를 유지하려면 매일 소리 없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네 번째 손님은 층층이 살이 겹치는 몸을 가졌다. 갈 곳을 잃은 여분의 칼로리가 벼랑 끝까지 몰린 사람처럼 절박하게 등과 옆구리와 아랫배를 잡고 매달려 있다. 탄력 없이 늘어진 피부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출렁거린다. 이 손님의 신은 정크푸드다. 좀 더 올바른 신을 모셔도 좋을 텐데. 육체는 누구에게나 하나뿐이니까. 그녀는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조용히 폐허가 된 신전을 보수한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하루가 끝나가고 있다. 다음 손님이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다.


“안녕하세요?”


나직한 인사를 건네며 들어선 손님은 십대 소녀였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채를 높이 올려 묶고,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 탱탱볼이 튀는 듯 동작이 경쾌하다. 소녀가 침대에 눕자 그녀는 소리 없이 감탄한다. 매끄럽고 탄력 넘치는 아름다운 신전. 하지만 단지 타고났거나 젊기 때문만은 아니다. 팔과 다리, 등을 마사지하며 뽀얀 피부 아래 강인한 근육의 존재를 감지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단련한 몸은 개화의 시기를 맞아 한껏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출근길에 보고 까맣게 잊었던 봄이 그녀의 손끝에서 되살아난다.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 신전이야말로 생에 바치는 찬가가 아닌가.


마사지를 끝낸 그녀는 입구 쪽으로 가는 손님을 슬쩍 뒤따르며 물었다.


“몸 너무 좋아요. 관리 어떡해요?”


“음... 아침저녁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일주일에  두 번은 격투기 수업에 가요. 주말에 한 번은 PT를 받고요. 아, 과일도 꼭 챙겨 먹으려고 해요. 아침엔 바빠서 시간이 없으니까 전날 저녁에 과일 도시락을 만들어 놓고 자요.”


“대단해요. 왜 그렇게 열심해요?”


그러자 소녀가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사람 몸은 하나하나가 신을 모시는 신전이니까요. 빈틈없이 받들어야죠."


그녀는 할 말을 잊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소녀는 이미 입구를 빠져나가고 없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뒷모습에 대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아름다운 신전의 주인은 그녀와 같은 신을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늘 신을 만났고, 신은 소녀의 목소리를 빌어 속삭였다. 네가 하는 일은 헛되지 않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니 너는 혼자가 아니다.


퇴근길, 어둑해진 거리에 연분홍 벚꽃잎이 분분히 날린다. 폭죽을 터트린 뒤에 색종이 조각처럼. 여자는 고된 하루의 보람찬 마무리를 축하하는 폭죽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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