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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Oct 26. 2024

에세이] 내 안의 당신

나만의 것을 갖고 싶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치 나만의 정원을 꾸미는 것처럼 꽃을 심을지 채소를 심을지, 어떤 종류를 심을지, 정원이 썰렁할 틈이 없도록 개화 시기는 어떻게 조절할지, 구역별 색깔 조합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원 한편에는 정자를 놓을지 연못을 팔지 등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하고 싶었다. 온전한 내 선택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는 것은 내 인생의 중요한 테마였다.


그 때문인지 태어나는 순간 내게 주어진 원가족이 그리 애틋하지는 않았다. 좋거나 싫거나 어쩔 수 없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 줄곧 이곳을 탈출해서 나만의 영역을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남편을 만나 결혼을 계획할 때도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려고 남들 다 휴가 가는 7말 8초를 꺼냈다가, 그렇게 하면 손님 안 온다고 엄마, 아빠에게 욕을 먹었다. 결국 양보해서 8월 말에 결혼했다. 결혼 성수기인 이듬해 4-5월까지 미루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선택해서 꾸린 가족과 영역을 관리하면서 오히려 원가족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그중에서도 아빠를.


아빠는 냉정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아빠와 함께 나갔던 놀이터다. 큰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차지하고 나는 못 타게 했다. 당연히 아빠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고 구조 요청을 보냈던 나는 매몰찬 말에 당황했다. “이 놀이터가 너희들 것도 아닌데 왜 너희들만 미끄럼틀을 타냐고 따져야지. 너도 입이 있는데. 가서 똑바로 얘기해.” 미끄럼틀 근처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결국 아빠가 도와주러 왔지만, 지금까지도 또렷한 건 믿었던 아빠의 배신이다. 그 뒤로 나는 아빠가 바라는 대로 독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바늘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거라는 얘기를 칭찬으로 듣고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벼린 공격성이 어느 날 흘러넘쳐, 나와 내 주변을 무차별적으로 찌르는 날이 올 때까지.


아빠는 생색내는 걸 좋아했다. 내가 너를 위해 뭘 해주고 있는지, 가족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꼬박꼬박 짚어주곤 했다. 좀 머리가 큰 다음에는 그게 영 마뜩지 않았다. 저렇게 생색을 내면 감사하다가도 빈정이 상하잖아. 왜 아빠는 그걸 모르지? 점잖게 행동으로만 보인 뒤 아무 말도 안 하지 않고 스스로 깨우치게 두는 편이 감사를 받는 데 더 효과적일 텐데. 내가 이러저러했으니 나에게 감사하라고 말하면 역효과가 나는 걸 모르나?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다. 아빠는 생색을 내고 싶은 게 아니라 칭찬을 받고 싶었다는 걸. 아빠, 정말 고마워요, 아빠가 최고, 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생색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는 것을. 물론 독한 년으로 자란 나는 누가 내심 뭔가를 원하는 걸 알아도 절대 주지 않는 사람이 됐다. 너도 입이 있는데 똑바로 말해야지. 내가 그냥, 알아서, 공짜로 뭘 주지는 않을 거야. 돌아보면 그조차도 아빠의 가르침이었다.


아빠는 잔소리가 심했다. 대화를 시작하면 대개 염려를 가장한 잔소리로 넘어가곤 했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라고, 존재하지도 않는 위협을 들이밀며 나를 쪼아댔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척했지만 그 위협은 스멀스멀 스며들어 내 안에 어둠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내가 알아서 잘해야 돼. 근데 누가 언제 날 공격할지 몰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 모든 최악의 상황에도 난 다 대비가 돼 있어야 해. 그런 식으로 오랜 시간을 내면의 전쟁터에서 살아왔다. 바깥이 평화롭건 말건 안에서는 피가 흐르는 전쟁터에서 나는 백전노장이 됐다. 무슨 위협이 닥쳐도 반격할 준비가 된, 아무 위협도 없는 바깥세상의 진실을 볼 여유가 없는 외로운 전사. 아빠는 날 강하게 키우려 했지만, 나는 그림자만 스쳐도 악마처럼 짖어대는 치와와가 됐다.


아빠는 돈을 잘 주는 사람이었다.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나를 불러내서 “우리 딸, 아빠가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라며 지폐를 쥐여주곤 했다. 독한 년답게 나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뭐래, 술냄새 나. 진짜 날 사랑하면 왜 말짱한 정신으로 말을 안 해? 술 먹고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맨 정신일 때 다정하게 잘해줘야지. 돈이 아쉬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딱히 반갑지도 않았다. 내가 돈이 아쉬울 일이 없도록 아빠가 매일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자라면서 그런 애정 표현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아빠가 맨 정신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쑥스러워 술기운을 빌릴 수밖에 없는 사정도 몰랐다.


아빠가 주는 돈은 그냥 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건 대학교에 입학한 해였다. 우리 가족은 매해 여름마다 가족 여행을 가곤 했는데, 모두 떠나고 나면 남자친구랑 실컷 놀 생각에 한껏 들뜬 나는 안 가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아빠가 말했다.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고 같이 가자. 가면 아빠가 10만원 줄게.” 결국 집에 혼자 남은 나는 남자친구에게 전화해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아빠가 나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구나. 내가 너랑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근데 그 마음을 전할 수단이 돈밖에 없었구나. 그거 말고는 달리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구나.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아빠가 주는 돈이 실은 사랑이라는 걸. 내가 마흔이 넘은 지금도 아빠는 나한테 돈을 못 줘서 안달이다. 노상 "이게 마지막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니 동생 줄 거니까 욕심내지 마라, 집 대신 미리 주는 거다."라고 말하지만 마지막은 번번이 갱신되고 있다. 아빠가 이제 힘들어서 은퇴해야겠다고 말하면 나는 어린 시절 아빠에게 들었던 고대로 돌려주고 있다. "아빠, 무슨 은퇴야. 잠시도 쉬지 마요. 사람이 두 몫씩 해내야지." 실은 아빠가 돈을 못 주게 되는 날이 올까 봐 두렵다. 돈 주는 것밖에 모르는 아빠가 돈을 못 주게 되면 무슨 수로 나한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외모는 엄마를 닮았다. 하지만 남편은 가끔씩 나를 ‘장인어른’이라고 부른다. 딸도 “와, 할아버지인 줄. 하는 말이 똑같아.”라고 놀린다. 웃기는 포인트는 그런 딸마저 종종 할아버지적인 면모를 보이곤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남편이 '경주 이씨 핏줄은 희석되지 않는다'며 조용히 고개를 내젓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빠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내 안에 생생하게 존재하는 아빠를 감지할수록 아빠를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된다.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빛과 그림자가 지금의 나를 쌓아 올리는 벽돌이 됐다. 고통과 상처는 때로 성취를 위한 원동력이 됐다. 아빠가 하라는 정반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달렸지만, 나는 여전히 아빠와 가까운 사람이다. 그런 나인 채로도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번 여름에 아빠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야지. 아빠, 성공했네요! 유전자 전달뿐 아니라 나한테 정신세계까지 판박이로 물려주는 데 성공했어요. 나는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건 못하는 우리 아빠의 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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