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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Oct 21. 2024

챕터 27. 502호 병실의 동양인

    27. 502호 병실의 동양인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녀 쪽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느 날처럼 출근하기 위해 방문을 연 나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 앞에는 검은 실내용 벨벳 드레스를 입은 동양인 여자가 있었다. 갓 짜낸 먹물 같은 검정색 똑단발에 그것보다는 덜 검은 커다란 선글라스로 하얀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는데, 광택 있는 그녀의 새빨간 입술만이 내 눈에 유일하게 유채색으로 보이는 부분이었다. 새카만 머리숱이 얼마나 빽빽한지 검은 헬멧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내 문 앞에 있었다고 말하기에는 미묘하게 복도 반대편 방에 더 가깝게 서 있었지만, 인사를 건네는 자세 어딘가가 내가 나오기를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기다렸던 사람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이 외진 복도 끝 쪽에 나 말고 볼 일이 뭐가 있다고? 새 직원인가? 그래서 장기투숙 중인 내 안면을 트기 위해 인사차 방문? 하지만 복장은 전혀 직원 복장이 아닌데? 아직 근무 투입 전이라 사복을 입고 있는 건가?


    “누구세요?”


    이런저런 의심을 하다 보니 상대방의 인사에 화답하는 대신 나도 모르게 경계심이 가득 담긴 질문이 튀어나와 버렸다. 말을 하고 나서 스스로 너무 과한 반응을 한 것이 아닌가 하여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빠르게 평소의 유들유들한 내 모습을 되찾고 그녀의 인사를 다시 받았다.


    “날카로웠다면 죄송해요, 제가 방금은 너무 놀라서요.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그러나 그녀는 내가 문을 열었던 순간부터 내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듯, 인사를 먼저 건네던 모습 그대로 여유만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 다짜고짜 들었다면 당황할 법도 한 경계심 가득한 내 ‘누구세요?’라는 질문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내가 재차 질문을 고치고 나서도 꿈쩍 않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대답이 아닌 또 다른 질문이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이미 내 위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501호 사시는 분인가요?”

    “네, 맞아요. 지금 보시다시피.”


    요양원에 살게 허락을 내어준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은 바이브였다. 밀린 월세를 받으러 온 건물주 같은 그녀의 아우라에 밀리지 않기 위해 나도 문을 닫고 벽에 기대며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자세를 취했다.

    아, 이건 조금 과한가?

    내 의도와 달리 오히려 풋내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자세를 취해버린 뒤였다. 일단은 최대한 건방져 보이기를 바라며 삐딱하게 기대어 서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시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복도를 한번 빠르게 확인했다. 거짓말처럼 지금 복도에 방 정리용 메이드 카트가 하나 나와 있다거나 하면, 제삼자의 눈에 방금 501호의 정리를 마치고 나온 요양원의 메이드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그녀가 아닌 내 모습이 말이다.

    다행히 카트는 없었다. 그렇게 얻은 부르기뇽 투숙객처럼 보이리라는 자신감과 함께 나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조용하지만 드센 기운은 여전했고, 억지로 끌어올린 내 기세는 금세 진압당했다.

    그녀는 전혀 서두를 것이 없다는 듯 천천히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여전한 미소를 띤 채. 비결이 뭔지 궁금할 정도로 억지로 올린 내 입꼬리와 달리 근육의 떨림도 일지 않았다. 손쉬운 먹이를 앞에 둔 포식자랄까. 어떻게 된 인생의 흐름인지 기운이 강한 여자들을 자꾸 만나게 되는 것 같았다.

    매끈한 흑표범은 자세를 풀고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반가워요, 저는 502호에 머물게 된 ‘미셸 우’라고 합니다.”

    “아, 이웃이었군요! 저는 501호 정진이예요.”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자 마음이 놓였다. 그냥 동료 투숙객이었다고 생각하니 미스터리가 모두 풀렸다.


    “진! 이름 정말 좋은걸요? 제가 진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하하, 미셸이 말하는 진이라면 술 말이죠? 하마터면 설렐 뻔했네요. 그렇다면 우리 요양원 바도 한 번 이용해 보세요.”

    “아, 여기 바가 괜찮나요?”

    “요양원에 처음 방문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이미 잘 아시겠지만, 부르기뇽은 여간 시설 좋은 곳이 아니니까요. 뭐든지 최고로 쓰는 것 같아요. 제가 술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제가 깊이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좋았어요.”

    “이곳을 잘 아시나 봐요? 오래 머물고 계시나요? 아니면 여기에 자주 오세요?”

    “음, 좀 내려놓고 오래 쉬고 싶어서 장기 투숙 중입니다.”


    나도 모르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려다 급히 제동을 걸어 내용을 바꾸었다. 왜 자꾸 미국에서 다녔던 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면담을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 아시아계 미국인이었던 교장 선생님도 미셸과 같은 검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깐깐한 말투나 주름진 피부는 이 여자와 완전히 달랐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단순한 질문에 불과했지만 긴장하지 않으면 알고 있는 전부를 술술 불어버릴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좋네요, 저도 어느 정도 머물 것 같은데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실 제가 지금 어서 가봐야 해서요.”

    “501호에도 동양인이 있다고 했는데, 정말로 만나게 되니 생각보다 더 반가운걸요?”

    “저도 반가웠습니다.”


    늘 짓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여 답하고 뒤돌아 엘리베이터 홀로 향했다.

    재밌네, 이웃도 생기고.

    삶을 다채롭게 해 줄 새로운 이벤트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고 그녀와의 짧았던 대화를 곱씹어 보는데 그녀의 마지막 말에서 의아한 구석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501호에도 동양인이 산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거지? 아마 체크인을 도와준 직원이 그녀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근처에 같은 동양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지난번에 이상한 노인네도 그렇고 이 여자도 그렇고 투숙객의 프라이버시가 제대로 보장이 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스위스에는 개인정보법 뭐 그런 게 없나?

    엘리베이터가 막 도착했지만 다시 복도로 고개를 내밀어 그녀가 아직 있는지 확인했다. 미셸은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들어갔는지 복도는 비어 있었다. 아까는 502호 자신의 방에 들어가는 중에 나와 마주친 상황이라고 정리하면 될까?



    가벼운 발걸음은 의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어지다 못해 더욱 증폭돼 버린 기분은 나를 뮤지컬 속 인물처럼 움직이게 만들었다. 의무실 문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발걸음이 통통 튀기 시작했고 의무실 로비로 들어갈 때는 한 바퀴 빙그르르 회전하며 입장했다. 내 화려한 입장을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 빼고는 완벽한 출근이었다.

    카운터를 보고 있는 리타는 사람이 들어오는 인기척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고, 탕비실에서 마침 로비로 돌아오고 있는 리차드는 내가 마무리 포즈를 취하고 나서야 나를 발견했다. 리타와 리차드 둘을 한꺼번에 시야에 넣고 보니 확실히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리차드의 표정이 조금 엄숙했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말했다.


    “리차드, 혹시 아침에 화장실을 못 다녀왔나요?”

    “너무 다정한 인사네요.”


    옆에서 리타가 특유의 시니컬함으로 한마디 소감을 말했다. 정작 질문의 대상인 리차드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오늘은 다른 사람 같았다. 다소 과격하고 말이 안 통할 것 같던 첫인상과 달리 리차드는 함께 지내기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다. 차메로를 비롯하여 이런 타입의 거한들이 그러하듯 리차드도 호남형의 인물이었다. 이런저런 짓궂은 농담들을 건네도 호쾌하게 웃을 줄 아는 남자였으며 매사에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대답 없는 그의 안부를 다시 물었다.


    “별일 없죠?”

    “별일은 없고, 할 일은 있지. 오늘은 왕진 일정이 하나 있어.”

    “네! 준비는 어떤 걸로 할까요?”


    리차드의 대답을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보통 왕진을 돌 때 준비하는 의료 용어들을 줄줄 외웠다. 나중에 간호조무사 자격시험을 본다면 꽤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지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오더는 심플했다.


    “오늘은 차트만 챙겨줘. 환자한테 필요한 건 이미 병실에 모두 있거든.”

    “몇 호 차트를 챙기면 될까요?”


    유독 말이 없는 그의 태도와 그가 내린 오더에서 오늘은 조금 다른 날이 되리란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왕진 가는 척 나를 으슥한 곳으로 데려간 다음 내 장기를 산 채로 꺼내는 작업의 디데이가 드디어 오늘인 건가? 요양원의 VIP 환자들을 상대로 한 장기밀매업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왼쪽 윙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적합한 장기를 가진 대상을 물색하여 오른쪽 윙에 머무르게 하여 수술에 적합한 날짜를 기다리는 암흑 조직. 제시카 알바, 이안 맥그리거의 영화 ‘아일랜드’가 생각났다. 리차드의 저 엄숙한 표정은 그간 나에게 정이라도 들어버려 자신의 손으로 도축해 버리기 미안해져서 나오는 표정이리라.

    순식간에 써 내려가는 내 허무맹랑한 시나리오는 리차드의 목소리에 강제로 완결을 맺어야 했다. 오더는 간결했다.


    “530호.”


    530호라면…? 왼쪽 윙의 가장 끝 방에 위치한 방이 530호였다. 오른쪽 윙의 가장 끝 방인 내 방과 정확히 대척점에 위치한 방이었다. 분명히 환자가 장기 투숙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 병실이었지만 한 번도 닥터 쿠퍼나 리차드를 따라서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비밀의 방 같은 곳이었다. 들어가는 사람도 본 적이 없고 거기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도 보지 못했다. 매번 궁금증이 들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나 같은 보조는 알 필요 없다는 답이었다. 대체 어떤 환자가 있길래 그렇게 그들이 숨겨둔 보석함처럼 꼭꼭 숨겨놓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도 금방 신경을 껐었다. 드디어 오늘 가 보는 것이다.


    “네, 530호! 금방 준비할게요!”


    나는 탈의실을 향해 출근할 때와 크게 차이 없는 걸음으로 통통 튀어갔다. 가벼운 발걸음과 별개로 하필 내 방과 대칭되는 호실이 나에게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걸리기는 했다.

    이거, 어쩌면 허무맹랑한 시나리오가 아닐지도?

    다시 범죄 스릴러 시나리오를 이어 써내려 갔지만 문서가 빼곡한 캐비닛을 찾다 보니 금방 의식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나는 리차드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슬쩍 차트를 열어보았다.


    [이름 : X ]

    [출생 : 1912. . ]


    차트의 첫 페이지를 확인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뭐야, 내가 차트를 잘못 들고 왔나?

    실수를 했나 싶어 재빨리 차트의 커버를 확인했지만 분명히 530호의 차트가 맞았다. ‘X’라고만 적혀있는 성명란과 오류가 난 것 같은 출생년도. 나는 리차드의 뒤통수에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발사했지만 그의 후두부가 내 의문을 알아채고는 대신해서 설명을 해줄 리 없었다.

    순식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홀을 나와 왼쪽 윙을 향해 가면서 다시 차트의 다음 부분을 살폈다. 이 환자는 뭐랄까… 너무 건강했다. 질병 이력은 크게 없었고, 처방되고 있는 약품들도 모두 영양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차트의 커버도 오래되어 너덜너덜했는데, 닥터 쿠퍼가 담당의로 오면서부터 이전의 자료들의 전산화를 한 번 진행했기에 과거의 이력을 당장 확인할 수 없었다. 더 자세한 내역은 의무실로 돌아가 컴퓨터를 통해야 했다. 의심스러움 투성이 환자였지만 어차피 곧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두근거렸다. 어떤 환자이길래, 아니 어떤 인간이길래 이런 차트를 가지고 있을까?


    길고 긴 복도가 끝나고 문 행렬의 마지막 순서인 530호의 문이 나타났다. 그런데 복도 끝 창문과 방문의 거리를 가늠해 보면 어째 같은 윙의 끝방인 내 방보다 더 큰 방인 것 같았다. 내 방도 나름 스위트 카테고리인데 내 방보다 더 좋은 방이 있었구나. 아마 일반 호텔로 치면 프레지덴셜 스위트 정도되는 방이 아닐까.

우리는 530호 문 앞에 도착해 섰다. 리차드는 벨을 세 번 누르더니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직접 문을 열었다.


    “엥?”


    그는 내가 육성으로 놀라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과감함에 나는 그 자리에서 서서 열심히 눈치를 살피는 표정을 지었다. 리차드는 대답 대신에 눈짓으로 어서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뭐, 이래도 되는 거니까 이러는 거겠지?

    그를 따라 530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한눈에 내 방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눈대중 측량이 나름 정확했던 것이다. X의 방은 두 칸으로 이루어진 내 방보다 한 칸에서 반 칸 정도 더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내 방이 입구 겸 응접실과 침실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530호는 입구, 응접실의 역할을 하는 거실, 그리고 침실이 각각 벽으로 구분된 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병실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기에 리차드가 임의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일까. 리차드는 성큼성큼 걸어 침실로 향했다. 아직 의심스러움이 남아있었지만 당당한 그의 발걸음을 믿고 안으로 따라갔다.



    그의 당당함이 나를 안심시켰던지 내 발걸음도 그를 따라 당당해져 갔다. 응접실은 골동품 박물관 같았다. 요양원의 기본 인테리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품 컬렉션들이 벽과 장식장 위에 빼곡했다. 열심히 두리번거리다 응접실 끝에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도 박물관 같기는 매한가지였는데 침실 안쪽 벽 가운데에 거대한 테피스트리가 걸려있었고 그 아래에는 테피스트리만큼 넓은 너비의 침대가 있었다. 새하얀 침구 가운데에는 530호의 주인이 누워있었다. 정자세로 누워있는 그의 얼굴은 거대한 이불에 가려 아직 잘 보이지 않았다.

리차드가 그의 옆에 다가갔다. 그는 멀뚱히 침실 입구에 서있는 나를 보고 이리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차트를 꼭 쥐고 그의 옆에 섰다. 그제서야 방의 주인을 똑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X가 누워있었다. X는, 그 미친 노인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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