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듯 누워 있던 노인. 그래도 살아는 있었는지 우리가 옆에 서자 그가 슬며시 눈을 떴다. 노인의 눈이 한 번에 번쩍 떠지지 않고 느린 속도로 스르르 떠지는 그 모습에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저주에서 풀려나는 순간의 신비함이 있었다. 물론 잔뜩 늙어버린 그의 모습에 마녀의 저주가 지독히도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구나 하는 탄식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이런저런 허튼 생각을 하다가 바라본 잠자는 호텔의 노인의 눈동자는 우리의 오밤중 첫 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그 짧고도 이상한 만남을 마지막으로 한참을 보지 못했다. 체크아웃을 했나 싶었지만 이렇게 누워있었을 줄이야. 그 사이 잊혔던 그에 대한 기억이 다시 또렷해졌다. 그러나 또렷해지는 그때의 기억과 달리 당시의 노익장과 괴짜스러운 생기는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스러져가는 한 생명이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리차드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노인의 위태로운 모습과 마찬가지로 그의 목소리에서도 정정했던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쉭쉭 거리는 바람 빠진 소리만으로도 그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구사하는 완전한 문장이나 온전한 말투는 그의 몸 상태와 달리 정신 상태는 여전히 양호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 자네 왔는가."
리차드는 꾸벅 인사를 올렸다. 모든 투숙객들에게 공손한 리차드였지만 이 노인 앞에서는 조금 더 공손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 화려하고 엄숙한 방에서 오는 분위기가 나를 압도하여 야기한 착각일지도 몰랐다.
"네, 어르신 오늘은 좀 어떠신지요."
"하루하루 죽어가는 느낌은 여전하지."
말을 마친 노인은 자그마한 소리로 킬킬킬 웃었다. 당연히 웃음소리도 온전치 않았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디테일을 더해 비유하자면 폐병 환자가 미숫가루 한 움큼을 들숨에 실수로 들이켠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정말로 다 죽어가는 소리였다. 상황을 모른 채로 소리만 듣는다면 누구라도 당장 응급 전화를 걸어야 하나 고민할 것이다. 리차드는 노인의 웃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지켜보는 나로 하여금 자꾸 남은 수명을 카운트다운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리차드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 노인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입니다."
그제서야 노인은 내게 눈길을 주었다.
"아아, 그래 자네로구먼. 우리 501호…"
나를 아련하게 부르는 노인에게 나도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아… 네, 안녕하세요. 501호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자네 눈에는 내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예상을 깨부수는 노인의 답에 적잖게 당황했다. 보통은 이렇게 대답 안 하지 않나? 아니라면 잘 지내셨냐는 말이 곧 죽어가는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었나? 흔한 농담일 수도 있었지만 노인의 상태나 방의 분위기가 나를 긴장시켰다. 당황해서 어버버 하고 있는 나를 위해 리차드가 한마디 거들어주었다.
"여전히 짓궂으십니다."
노인은 다시 켈켈켈거리며 웃었다. 이번엔 웃는 방식을 달리 했지만 꺼져가는 생명이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미숫가루가 아닌 인절미 가루를 들이켠 느낌이랄까. 뭐, 별 차이는 없다는 뜻이다.
"미안하네, 나이가 늘어나니 사람을 희롱하는 재주만 늘었지 뭔가."
"저도 괜찮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오랜만에 다시 뵙는군요? 그 이후로 보이지 않으시기에 본가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보다시피 여기에 쭉 묶여 있었다네. 하필 자네를 만난 그날 이후로 몸이 갑자기 나빠져서 말이야. 그래서 오늘은 자네를 보고 싶다고 여기 리차드에게 부탁했네."
"저를 부르셨다고요? 그날 이후로라면 혹시 저 때문에 건강이 이렇게…?"
"그럴 리가 있겠나. 우리가 잠깐의 대화 말고 뭘 했다고. 아니면, 나 몰래 내 방 음식에 독이라도 탔던 겐가?"
"그럴 리가요. 근데 그러면 왜 저를?"
"궁금한가?"
"궁금하죠."
"그냥…"
"네?"
"그냥…"
"그냥요? 그냥 불렀다고요?"
"제발 말을 좀 끝까지 듣게. 그냥… 자네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야."
"아."
어처구니가 없어 절로 나오는 탄식과 함께 나는 그날 밤 우리의 대화를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온전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도통 영양가 있는 대화였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사실, 시간이 많이 지나 몇몇 임팩트 있는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대화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와 나눴던 짧은 그 시간이 마음에 들었던 건가? 순간 대화가 그리운 중년, 노년들의 외로움을 대변하는 토마 아저씨가 생각났다. 고개 숙인 중장년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고 어루만져주었다 생각하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물어보고 지나가기로 했다.
"요양원에 사람도 많을 텐데 왜 하필 저인가요?"
"자네를 알기 때문이야. 자네를 알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저를… 아신다고요?"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앞으로 매일 여기 들러주게. 매일 잠깐씩이면 될 걸세. 시간은 일정했으면 하네. 출입 방법이나 열쇠는 여기 리차드에게 안내받으면 될 거야. 리차드, 그럼 한 번 더 부탁함세."
리차드는 묵묵히 그의 청을 수락했다.
잠깐만, 내 수락은 필요 없는 거야? 당사자가 나인데?
그런데 차마 다른 의견을 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네, 어르신."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게들. 오늘 기분이 좋아. 따로 처치할 것도 필요 없고 돌보미도 물려도 될 것 같은 기분이야."
"알겠습니다. 그래도 호출기는 꼭 곁에 두십시오."
리차드는 당부의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덩달아 일어났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리차드를 따라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침실을 나오기 직전 뒤를 돌아봤다. 노인은 다시 정자세로 누워 잠자는 호텔의 노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화려한 응접실을 지나 530호를 나왔다. 호실의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리차드에게 참고 참았던 질문을 했다.
"도대체 이 노인은 누구예요?"
리차드는 그대로 잠깐 고민하더니 발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자네가 직접 들어보게. 왠지 이제는 뭐든지 말을 해줄 준비를 마치신 것 같아. 닥터와 프란시스에게도 언질을 넣어야겠군."
리차드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나저나 그의 말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리차드가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정말로 노인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뭐든 말을 해줄 준비요? 저분이 곧 돌아가신다는 건가요?"
이번에는 리차드의 대답이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그것 자체로 무언의 대답이었다. 아까 보았던 노인의 상태를 보면 침묵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의료실로 복귀했다.
530호 미스터리 한 노인과의 접견이 전부였던 오늘의 근무를 마치고 메인 로비로 진입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날카로운 부름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예기에 화들짝 놀랐지만 알렉시스의 목소리란 걸 알아듣고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모처럼 보는 알렉시스의 표정은 반가움보다는 심각함에 가까웠다. 그녀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 알렉시스! 잘 지냈어요?”
내 반가운 인사에도 그녀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특히나 눈썹은 힘이 잔뜩 들어가 날카로운 모양새로 굳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더니 뾰로통하게 물었다. 극적인 그녀의 자세가 디즈니 공주를 떠올리게 했다.
“혹시 요즘 나 피해요?”
“아…”
이런. 그녀와 거리를 두는 나의 행태에 언젠가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할 거란 예상은 했었지만, 아직 답변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머리가 작동하기를 멈춰 적절한 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녀의 물음에 뭐라도 대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아뇨?”
배경은 바뀌어 2층 야외 테라스. 일단은 부정적인 쪽으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그녀를 그 자리에서 적당히 진정시키고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화를 위해 장소를 옮겼다. 사람이 가장 많이 오가는 로비에서 이러고 있기는 조금 눈치가 보인다. 더욱이 대화의 장르가 남부끄러운 치정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동하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사실 이 어색한 침묵이 나로서는 다행이었는데, 그 틈을 이용해 최대한 머리를 굴려 그녀의 심리를 파악하고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의 전략을 짜야했다. 우선 사과는 확실히 해야 했다. 내가 잘한 것은 없었으니까.
조금만 거리를 둬보자고 생각하고 실행했던 것이 정말로 유효하기는 했는지 그녀도 나에게서 변화를 느낀 것 같았다. 아까 그녀가 보였던 조금은 날카로웠던 태도를 보면 ‘적당한’ 거리 조절에는 실패한 것 같기도 했다.
내 안에 나의 세계가 있다면 그녀에게는 그녀의 세계도 있다. 나의 세계 안에 갇힌 채로 그녀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혼자서 이런저런 가설들을 세우며 추측해 볼 뿐이다. 운이 나쁘거나 추측이 틀려 버리면 단 1cm의 거리 조절 오차로도 잘못된 경계를 넘어버릴 수 있다. 최악의 경우로는 최후의 경계를 넘어버려 망가져 버린 관계를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것이겠지.
“뭐 마실래요?”
야외 테라스가 요양원의 식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고, 무언가를 먹임으로써 그녀의 기분이 조금은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달콤한 것이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두 팔을 허리춤에 올린 상태였다. 먹을 기분이 아니니 먹음으로써 기분을 풀어준다는 얄팍한 수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첩첩산중이렸다.
“아뇨, 지금은 괜찮아요.”
“네, 그럼 일단 자리에 앉죠.”
작전명 ‘달콤한 회유’는 빠르게 포기하고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테라스에는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자유로운 좌석 선택권이 생긴 나는 입구에서 적당히 떨어진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다. 늘 손님이 있던 이곳이 이렇게 여유로운 것은 아무래도 겨울이 왔기 때문일까. 내려간 바깥 기온 외에도 오늘 하늘이 유독 흐리다는 것도 주된 이유이리라.
멀리서 우리가 자리 잡는 것을 보고 메뉴판을 들고 다가오려는 테라스 직원에게 손바닥을 펴 보이며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다행히 직원은 우리에게 가까워지기 전에 내 사인을 알아듣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이곳에 오면 간식이든 음료든 무언가를 늘 주문했었기에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오는 것은 학습된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영 아니란 말이지.
우리는 파라솔 아래에 의자 두 개를 끌어다 놓고 서로를 비스듬하게 바라보는 각도로 앉았다. 서로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이야기하기엔 대화 주제가 조금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어슷어슷 자리 잡은 우리는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자, 그럼 우리 다시 이야기를 해볼까요?”
“혹시 나 피하는 거예요? 내가 이제 싫어졌어요? 파티 같이 가자면서요?”
대화를 재개하자마자 피할 수도 없는 날카로운 질문세례들이 날아왔다. 내 행동의 변화를 그녀도 분명히 느꼈다. 우선은 오해를 풀어야 했다.
“절대 아니에요.”
내 부정 한 번에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생각보다 쉽게 풀어지는 것에 놀랐다. 그녀는 혼자 크게 한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아까는 그렇게 몰아붙여서 미안해요. 제가 잘못 느낀 것이 아니라면 최근에 갑자기 정진 씨가 저를 피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이게 제 착각인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쪽이 저를 피하는 건지 확인을 해야 했어요. 이해하죠?”
“물론이죠. 100%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그렇다면 이제 제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차례겠죠?”
헤실헤실 밝다가도 똑 부러질 때는 똑 부러진다니까. 확실히 똑똑한 여자였다. 역시 파리 대학에서의 수의학 공부는 아무나 할까.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싫어졌다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그리고 피한 것은 어느 정도 맞아요. 사실, 고민이 좀 되었어요.”
“고민이요?”
그때 하늘에서 떨어진 한 송이 차가움이 볼에 닿았다. 차가움은 이내 녹아 이슬로 내 얼굴에 맺혔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의 없는 순간의 눈송이들은 정직하게 아래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직원이 이번에는 담요 두 개를 챙겨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외투도 없이 눈을 맞는 것이 좋을 리 없으니까. 우리는 직원이 담요를 건네고 떠나갈 때까지 잠깐 대화를 멈추었다. 역시나 남이 듣기에는 조금 남사스러운 내용이었다.
우리는 각자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게, 그러니 뭐랄까.”
막상 내 입으로 말하려니 조금 민망하네. 그래도 그녀는 차분히 나를 기다려주었다.
“제 마음을 알고 싶었거든요.”
“마음이요?”
“네, 그리고 그쪽 마음도요. 저 혼자서만 이런 마음인지 알고 싶었어요.”
정적이 흘렀다. 말하고 보니 거의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조금 있다가 쿡 하고 웃었다.
“이런 마음은 또 어떤 마음이래요? 그래서 알고 싶던 것은 알게 됐나요? 어떤 마음인지?”
“오늘 다시 얼굴을 보니까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녀는 미소를 띠며 재차 물었다.
“그래요?”
“네, 확신이 생겼어요.”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혼자서 끙끙 앓기보다는 역시 직접 대화해 보기를 잘했네요. 또 재수 없이 이상한 남자랑 엮였나 싶어서 땅을 치고 후회 중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떤 확신인가요? 그 확신의 방향이 정확히 어느 쪽인지 지금 들어보고 싶네요.”
대화의 흐름이 좋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서 묻어 나오는 그녀의 이해심이 좋았다. 그리고 그녀가 좋았다.
긍정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내 대답을 예측한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이 부담스럽거나 거북한 표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이 타이밍이라면 내 마음을 고백할 절호의…
“재미있는 대화 중이시네요?”
갑자기 등 뒤에서 새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개입했다. 나와 알렉시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이 중요한 순간을 방해하는 불청객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우리가 받은 것과 같은 담요를 두르고 있는 미셸이 있었다. 그녀는 톡톡한 두께의 담요로 몸을 야무지게 감싸고 있었다.
“아… 미셸이었죠?”
“맞아요, 여기서 또 만나네요?”
“네, 저는 여기에 자주 오니까요.”
새로운 여자가 등장하자, 그리고 나에게 아는 척을 하자 알렉시스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여기는 누구예요?”
갑작스러운 미셸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우선 소개는 해야 했다.
“이쪽은 제 옆방에 묵고 있는 미셸이에요. 그리고 여기는 제 친구 알렉시스입니다.”
아! 나도 모르게 알렉시스를 나타내는 말로 ‘친구’라는 소개말을 써버렸다. 그런데 그렇다고 ‘여자친구’라고 아직 말할 수도 없고, 낯간지럽게 ‘제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친구라고 말할 때 알렉시스의 눈썹이 한번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그게 아니에요!
“반가워요, 502호에 투숙 중인 미셸 우라고 합니다.”
알렉시스는 미셸이 건네는 악수를 가볍게 받으며 화답했다.
“저도 반가워요. 저는 여기 정진의 그냥 ‘친구’ 알렉시스 포르제입니다. 여기서 수영장 라이프가드로 잠깐 일하고 있죠.”
“어머, 어쩐지 건강미가 느껴진다고 했는데 역시나였네요. 저도 수영을 참 좋아하거든요. 조만간 수영장에서 뵙겠네요.”
“네, 저희 수영장은 그쪽 같은 미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낯선 동성의 출현이 가져온 처음의 경계심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둘 사이의 긴장감이 풀어졌다. 오히려 문제로 남은 것은 내 처지였는데, 알렉시스가 ‘친구’라는 단어에 강조를 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뭐라도 조치를 해야 했다. 골든 타임을 놓치면 상처가 덧날 수 있다. 그러나 물꼬를 튼 두 여자의 대화에는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무슨 이야기하고 계셨죠? 재미있는 이야기 같았는데 저도 끼워주실 수 있나요?”
“이 ‘친구’가 최근에 조금 변한 것 같아서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알렉시스는 말을 멈추고 잔뜩 과장되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혹시나 이 ‘친구’가 변한 이유가 이 미녀분의 등장 때문이었나요?”
그녀는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그녀의 눈에 광기가 느껴졌다. 나는 다급히 변명했다.
“아니요! 이분은 오늘 처음 만났구요. 저는 전혀 바뀐 게 없답니다. 어… 바뀐 것이 있다면 오늘 굉장히 특별한 환자를 만났다는 거죠!”
우선 다른 이유를 둘러댄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530호 환자의 이야기가 나와버렸다. 밖에서 환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것이 당연히 좋을 리는 없었다. 말실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나는 잘 둘러대서 마무리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알렉시스의 이어진 추궁에 내 의도는 무너져 내렸다.
“아하, 새로 만난 특별한 환자도 엄청난 미인이었나요?”
순식간에 우리 관계를 파악해 버린 건지 미셸도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거들기 시작했다.
“어머, 정말로 궁금한데요? ‘굉장히 특별한’ 정도의 미인이라면 어느 정도일까요? 여기 알렉시스보다 더 미인인가요? 그러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미치겠네. 그들의 530호 환자에 대한 추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저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내 혀는 내 양심의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녀는 무슨, 미녀의 정반대인 그냥 할아버지예요.”
처음에는 의심스러워하던 알렉시스의 표정은 여자가 아닌 할아버지라는 말에 금방 호기심 충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목소리에 있던 경계심도 사라졌다.
“할아버지요? 무슨 할아버지길래요?”
“특별한 할아버지는 얼마나 특별하려나요? 흥미로운 음모론들 중에는 히틀러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설마?”
역시나 옆에서 미셸이 얄밉게 거들었다.
아니 이 여자, 알고 보니 엄청 얄미운 캐릭터네! 무슨 히틀러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러자 이번에는 알렉시스의 농담이 이어졌다. 아주 쿵짝이 잘 맞았다.
“음, 히틀러가 아니라면… 산타할아버지라도 머물고 있던가요?”
평소라면 제법 재치 있는 농담으로 받아들였겠지만 내적 곤란함에 빠져있는 내게는 전혀 웃기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은 재밌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나 대신에 자기들끼리 대화 주제를 다른 곳으로 틀어준다면 오히려 좋았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대화는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제는 나도 더 피할 수 없었다. 완전한 거짓말을 지어내서 말해주거나, 사실 그대로 말하거나, 아니면 사실을 일부 섞은 거짓을 말하거나.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아직 530호 영감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는 정도만이라면 말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나이가 조금 많고, 이름이 없어요.”
“나이가 얼마나 많고, 이름은 어떻게 없어요?”
“출생 연도가 자그마치 1920년대예요. 믿겨지나요? 그리고 이름은 ‘X’라고만 되어 있어요. 미지수 ‘x’의 ‘X’일까요?”
이렇게 다시 정리해 보니 엄청나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신상정보이기는 했다. 내가 꺼낸 노인의 수상한 나이와 이름 기록만으로 그녀들은 다시 신이 나서 이런저런 추측에 빠져들었다. 그녀들은 관찰자인 나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창의력 넘치는 아이디어들을 계속해서 끄집어내었다. 각자 살면서 쌓아둔 배경지식이 상당했던지 교양강좌를 듣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둘의 심도 있는 토론은 가볍게 내리던 눈이 함박눈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실내로 이동한 둘은 하하 호호 웃으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껴서 함께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작 알렉시스에게 하려던 중요한 말은 못 하고 말이다. 애꿎은 501호 방문에 발길질을 하는 것으로 한심한 남자의 하루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