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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Oct 23. 2024

챕터 29. 요양원의 유령

    29. 요양원의 유령




    나는 530호 문 앞에 섰다.


    [530]


    분명히 내 방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을 가진 다를 것 없는 보통의 부르기뇽 명패였지만, 어쩐지 530호에 달린 것은 다른 것들보다 유독 크고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어제 이미 내 방보다 윗단계 카테고리 룸의 장대한 위용을 직접 맛보아서일까. 정말이지 루브르 박물관 한 구간을 옮겨 놓았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부터 내게 주어진 새로운 업무의 이름을 붙이라면 심플하게 ‘530’으로 붙이고 싶었다. 최근 사실상 의무실에서 내 효용은 수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나야 전문성과 관련된 경력이 없으니 의료적인 일은 어깨너머로 조금 배울 뿐 실제로 환자들에게 행사할 일이 없었고, 실제로 하는 일이라고는 허드렛일이나 심심한 환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치유 인형 같은 역할 뿐이었다.

    리차드가 나를 억지로 의료반에 넣을 때 근거로 내세웠던 의무실의 인력 부족도 최근에 새로운 채용이 완료되며(새로운 인력은 프랑스계 스위스인으로 잔뼈가 굵은 전문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같은 가짜가 아닌 진짜 의료인이 보충될 예정이었다. 고로 나의 정리해고가 임박했다는 말이다.

    그런 시기에 이전에 하던 허드렛일을 모두 그만두고 530호에 불려 가 혼자 전담하게 될 임무를 새로이 부여받다니 타이밍이 조금 공교롭다고 생각됐다. 나이가 들어찬 기업의 부장이 자리에서 밀려나 한직으로 좌천당하는 장면이 겹쳐 보였다(“내가 이 회사에 인생을 모두 바쳤는데!” 술에 취한 좌천부장님의 전형적인 대사를 나도 한 번 읊조려 보았다.)

    혹여나 530호 노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것으로 내 의료실 생활은 은퇴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 아닐까. 리차드의 의미심장한 말이 그의 임종이 머지않았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필요할 때만 이용해 먹고 잔인하게 버리다니! 물론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내 망상에 불과했지만 그 상상만으로도 충분한 서운함을 느꼈다. 그 짧은 사이에 정이 조금 들었나 보다.


    이제 시간을 그만 낭비하고 안으로 들어가 본분을 다해야 할 때였다. 밖에서 너무 망설였다. 조금 거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한량으로 태어났었더라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큰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감은 유별난 엄마의 특훈으로 혹독하게 학습되어 있다.

    나는 리차드에게 배운 대로 초인종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 눌렀다. 역시나 답은 없었다. 그 이후에 전달받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종전에 보았던 화려한 실내가 나타났다. 확실히 장식들이 보통의 방과는 달랐다. 요양원에서 이 스위트만 유독 이렇게 꾸민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일까? 존재 자체가 럭셔리한 요양원인 만큼 내가 묵고 있는 스위트나 기본 방도 화려한 양식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 530호는 홀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시설이 세워질 때 룸의 카테고리에 따라 획일화되어 제작된 디자인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면서 개인의 취향이 진하게 배어 버린 공간이라는 느낌이었다. 이 방은 공기마저 내 것과 달랐다.

    리차드와 함께 했던 어제와 달리 혼자 방문한 오늘은 비교적 자유로워서 내게 방을 조금 둘러볼 여유를 허락했다. 물론 방의 주인인 노인의 허락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뭐 내가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야 괜찮겠지.



    응접실에 있는 어두운 체리 색 나무로 된 업무용 책상은 상당히 오래되어 보였다. 과하게 화려한 장식에 앤틱 가구 수집가가 본다면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 책상 아래에는 서랍이 두껍게 달려 있었는데, 열쇠구멍이 큰 잠금장치로 굳게 잠겨 있었다. 최근에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업무용 책상 옆에 은빛 중세 시대 갑옷은 왜 있는 거지? 설마 진짜 그 시절의 물건은 아니겠지? 내 방에 서 있는 것은 기껏해야 팔이 여러 개인 원목 옷걸이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표면을 살폈다. 여기저기 검은 자국들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아

    얼룩들이 지워지나 궁금해서 입김을 불고 소매로 닦아 보았다. 그러나 얼룩은 30년을 조금 넘게 산 애송이의 손길에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듯 건재했다. 둥근 투구에 비친 내 모습이 곡선을 따라 왜곡되어 우스꽝스러웠다. 

    아차, 노인!

    지나가면서 조금만 구경하자고 했던 처음의 다짐과 달리 골동품 구경에 너무 푹 빠져버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나머지 부분은 다음에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앞으로 자주 올 곳이었다. 내 새로운 일터.

    침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노인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얌전히 누워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오냐며 벌떡 일어나 눈을 부라리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잠깐만, 지금 살아는 있는 거지?

    무사히 지각처리는 면했다는 안도 뒤에 따라오는 최악의 상상에 당장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러 헐레벌떡 그에게로 갔다.


    “아, 안녕하세요?”

    “걸음이 상당히 굼뜨구먼. 주머니에 골동품 몇 개 정도 챙겼나?”


    노인은 멀쩡히 눈을 뜨고 호흡도 일정하게 잘하고 있었다. 그리고 돌려 비꼬는 말을 보니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린 다음 내가 침실에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걸 노인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정신은 아주 정정한 상태인 것 같았다.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걸 축복이라고 해도 될는지. 하긴 몸도 정신도 둘 다 오락가락하는 것보다는 좋은 건 맞잖아? 그나저나 노인의 농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네, 방이 워낙 커서 오다가 길을 잃어서요.

    속으로 튀어나오는 농담을 억지로 삼켰다. 아직 노인의 진짜 성격과 캐릭터를 모르기도 하고, 그 리차드도 어려워하거나 굉장히 존경하고 있는 것 같은 노인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 앞으로 내 요양원 생활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결론. 거기다 내가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눈을 팔았기에 완전무결 떳떳한 입장도 아니었다. 그래서 자세를 낮추기로 했다. 하지만 톤은 밝고 명랑하게.


    “하하, 죄송합니다. 방이 너무 예뻐서 잠시 시선을 빼앗겼지 뭐예요. 저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지더라고요. 주머니는 당연히 비어 있습니다.”

    “그래, 내 방이 마음에 들던가?”

    “네, 설마 직접 꾸미신 건가요?”

    “내 취향이 자네 입맛에 좀 맞는가 보군.”


    다행히 그리 예민한 노인은 아닌 것 같았다. 확실히 로비에서 봤을 때도 엉뚱하지만 유쾌한 느낌이었지. 뭐, 그러다 한순간에 돌변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도 많이 봐왔기에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나는 저번에 리차드와 앉았던 스툴을 가져와 노인 옆에 앉았다. 그나저나 방을 직접 꾸몄다고?


    “방을 직접 입맛대로 꾸밀 정도면 꽤나 오래 머무셨나 봅니다?”

    “끌끌끌, 그렇지. 자네보다야 오래 머물고 있지.”

    “저야 뭐 아직 어르신에 비하면 피라미에 불과한걸요.”


    돌아온 것은 두루뭉술한 대답이었다.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건가? 더 캐묻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궁금증이 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노인을 떠보았다.


    “그렇다면 한 30년 정도 사셨나요?”

    “30년 전이라… 그때 아마 요양원 전체에 대대적인 객실 리노베이션을 한 번 했었지.”


    농담인가? 30년이라는 투숙 기간이 말이 될 리가 없다. 허나 이 노인은 하고 있는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를 통 구분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허튼소리를 진지한 표정으로 해대니 감별하기가 너무 까다로웠다. 이럴 때는 차라리 매사에 진지한 사람이 대하기 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하는 말은 이런 고민할 필요 없이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테니까.

    문맥상의 흐름만 따진다면 최소 30년 이상을 머문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아직도 30년을 이곳에서 보냈다는 명제가 도저히 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더 노인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일반적인 반응이라면 다음으로 30년보다 긴 시간을 물어보겠지만 나는 반대로 기간을 더 줄여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15년?”

    “어디 보자… 15년 전쯤에도 리노베이션을 한 번 했었지.”

    “...”


    역시나 쉽지 않은 노인네였다. 목소리는 다 죽어가지만 말로 사람을 요리하는 실력이 아직 미슐랭 스타급의 현역 주방장 뺨을 치는 수준이었다. 문맥을 거스르는 질문을 하면 답답해하며 알려주거나, 내가 대화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담백하게 정답을 말해줄 거라고 믿었건만. 나는 결국 그에게 정직하게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몇 년을 여기서 보내신 건가요?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노인은 전의 마른 미숫가루를 물 없이 한 스푼 삼킨 소리로 조금 웃더니 내 질문에 답을 했다.


    “나는 이곳이 세워질 때부터 여기에서 지냈네. 바로 이 530호에서 말이지.”


    내용은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그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시군요.”

    “물론일세.”

    “뭐 하시는 분입니까? 아니,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죠?”

    “사람들은 ‘프로페서 X’라고 부르지.”


    그의 차트에서 본 이름란이 기억났다. 문자 X의 의미가 이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X라는 뜻이었구나. 어떤 문자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X는 알파벳 문자인 것 외에도 숫자 10을 나타낼 수도 있고, 부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문자 X처럼 그의 이름의 X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프로페서 X라… 멋지네요. '엑스맨'에 나와도 어색하지 않겠는걸요? 영감님의 원래 이름은 뭐였나요? 본명이 X는 아닐 거잖아요.”

    “원래 이름이라… 내 이름은 잊어버린 지 오래라네.”

    “이 이상한 요양원과 완벽히 어울리시는 분이군요.”

    “눈치가 있는 편이구먼.”

    “다행스럽게도요.”

    “내가 알기론 자네도 이 비밀스러운 인간 금고를 이용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어제 노인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자네를 알기 때문이야.’

    노인은 내가 일반 요양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두려움이 일었다. 모르싸에 처음 납치되어 안토니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이 요양원은 대체 뭐지?


    “대체 누구십니까.”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묻어났다. 노인도 그 작은 파동을 느낀 것 같았다.


    “두려운가?”

    “저를 두렵고 혼란스럽게 만들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지 말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

    "제 안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의 정의가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나는 이 요양원이 세워질 때부터 함께 했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래서 대체 여기에 얼마 동안 머물고 있다는 말이지? 사실 체크인 당시에 들었던 요양원에 대한 탐험을 해보라는 프란시스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후로 전혀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학교 과제도 성실히 하지 않았던 내게 불필요하고 흥미도 없는 탐구활동은 우선순위에 들지 못했다. 그러니 이곳의 연식이 얼마나 되었고 총 몇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애초에 건축 양식이 큼직하고 엔틱한 무드여서 세월이 잘 느껴지지 않는 건축물이었다. 10년 전에 세워졌다고 해도 그럴듯해 보였고, 40년 전에 세워졌다고 해도 그럴듯해 보였다. 그래도 노인의 말을 통하면 상당히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농을 던지는 것에 미친 노인네라 알고 보니 겨우 5년 된 시설인데 지금 저렇게 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엄청난… 단골이시네요?”

    “단골 그 이상이지. 나는 여기에 계속해서 머물렀네.”

    “그러니까, 설립됐을 때부터 종종 이용했다는 말이 아니라 여기에 쭉 살았다는 말인가요? 집처럼? 레지던스처럼 분양을 받으신 거군요?”


    노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누운 상태로는 저 정도가 고개를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가동범위인 것 같았다.


    “여기가 내 집이었다네. 지금도 그렇고.”

    “이곳이 그렇게 마음에 드셨나요? 평생의 집으로 삼을 만큼?”

    “그것은 나에게 천만다행이었지. 나에게는 선택권이 많지 않았었거든.”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혹시 범죄자셨나요?”

    “껄껄껄, 자네를 여기에서 지내게 해 준 뒷배처럼?”

    “...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나는 아는 게 별로 없다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라. 마크롱이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야 알았어. 그러나 이 요양원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은 잘 알고 있지.”


    ‘은거기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요양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내 정체는? 노인은 밤의 로비에서 나를 바로 알아보았다. 다른 고객들은 내부에 정보가 이렇게 쉽게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만약 이 사실이 드러난다면 요양원의 운영에 큰 타격이 있을 것이었다. 프란시스가 언론 매체를 이용하자는 내 제안을 거절하며 그렇게 강조하던 요양원의 비밀성이 그럼 뭐가 되는 건가. 외부로만 나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이 노인만은 그만큼 신뢰할 수 있고, 또 요양원 내부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 그나저나 내부 정보를 모두 알고 있다는 이 사람은 대체 뭐 하는 누구인가.


    “혹시 이 요양원의 창립주 되십니까?”


    이번에는 노인의 고개가 가로로 저어졌다.


    “초기 투자자라고만 알아주게. 프란시스의 아버지를 잘 알았지.”

    “프란시스의 아버지가 요양원의 창립주였군요. 그는 아버지에게서 사업을 물려받은 거고요.”

    “그렇다네. 그렇게 황망히 갈 친구가 아니었는데 지금 떠올려도 아쉽구먼. 그래도 프란시스, 그 아이는 훌륭하게 요양원을 이어받았다네.”

    “그런 것 같아요. 요즘 꽤 운영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요.”

    “그래서 이번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 같더군. 아마 자네의 입김이 들어갔다지?”

    “정말로 다 알고 계시네요. 최근의 소식까지도요. 혹시 프란시스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쫄래쫄래 따라와서 모든 걸 떠들어 대는 방식으로 정보를 얻고 계시는 건가요?”

    “그 아이가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가벼운 단어로 표현되는 걸 알면 좋아하진 않을 걸세.”

    “하지만 제 말이 맞았다는 뜻이기도 하네요?”

    “프란시스뿐이 아니야. 그냥 이 530호를 이 요양원 사람들을 위한 비밀의 동굴이라고 생각하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칠 수 있는 대나무숲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여기 골방에 처박혀서 손님들에 대한 가십들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만요, 여기가 몇 년이나 된 시설이죠?”

    “대충 해도 50년은 될 걸세.”


    여기 골방에 처박혀서 50년 동안 손님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면서 살았다는 건가? 음흉한 골방 노인네 혹은 베일에 가려진 흑막. 이게 무슨 삶이야? 방랑벽이 깃든 인생을 30년 남짓밖에 살지 않은 나로서는 한 장소에서 보내는 50년이라는 시간이 가늠되지 않았다.


    “밖으로 외출은 하시나요?”

    “그럴 리가.”

    “혹시 오페라의 유령을 아십니까?”

    “그 꼴과 내가 다를 게 없기는 하지. 어쩌면 요양원 사람들은 나를 이미 그렇게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요양원의 유령’. 530호에 가면 소문을 먹고사는 요양원의 오래된 유령이 있다더라는 소문이 돌겠지. 문은 절대 열리지 않고 이따금 밤에 그 유령이 밖을 돌아다닌다는 목격담이 들려오는 거야. 아주 흥미로워. 잘 엮어낸다면 햄릿을 이을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 나올 것 같아.”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요?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군요.”


    노인은 작게 웃었다.


    “이해할 수 없고 말고. 내 인생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 보게.”

    “어마어마한 상처와 상실감을 가지고 쉴 곳을 찾아 여기로 왔다. 그래서 이곳을 평생의 겨울잠을 잘 동굴로 삼았다. 아니라면 세상에 고개를 못 내밀만큼 어마어마한 잘못을 하신 게 분명합니다.”

    “대역죄인이다?”

    “케네디의 암살은 왜 지시하신 거죠?”


    이번에는 제대로 킥킥거리는 노인이었다.


    “괜찮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구만, 자네.”


    농담은 이쯤 하고.


    “왜 저를 부르신 거죠?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제게서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질문이 쏟아지는구먼. 나는 자네가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어.”

    “죽기 전의 고해성사 같은 건가요?”

    “내가 죽는다고 누가 그러던가?”


    동시에 죽음을 앞둔 노인의 목소리가 급변했다.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노음. 나는 바로 사과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언급하는 것이 그 사람을 자극할 것이란 걸 조금 더 신경 써야 했다. 노인의 덤덤한 태도라면 죽음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내 성급한 판단을 자책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노인의 말투는 금방 평온 상태로 돌아왔다.


    “역정을 내서 미안하네. 누가 봐도 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이곳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려왔지만 막상 죽음이 다가오니 일말의 두려움이 남아있었나 봐.”

    “아닙니다, 제가 먼저 무례했습니다.”

    “괜찮네. 닥터와 리차드를 시켜 자네를 불러온 이유가 궁금한가? 그래, 내 자네에게 마지막 고해성사가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뜬금없다 생각하겠지만 일단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나?”


    왜 나인가? 나와 관련된 이야기인가? 무슨 이야기인가? 순식간에 수많은 의문들이 나를 덮쳤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존재의 노인네가 풀어내려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기꺼이 듣겠습니다.”


    노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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