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칠맛
고백할 게 있다. 아빠가 분식 중독자라고 고해성사를 해왔지만, 나도 중독자이다. 나는 면 중독자다. 어릴 때부터 밥보다 면을 선호했다. 왜 그렇게 스파게티, 국수, 우동 가리지 않고 다 좋아했다. 밤사이 이 세상 모든 면이 사라진다는 상황이 생기는데, 그중 면 하나만 살릴 수 있다는 중대한 결정권이 나에게 쥐어진다면. 이건 내 삶에서 가장 큰 고민이 될 수도 있겠다. 살찌는 여부, 열량 따지지 않고 정말 하나만 먹어야 한다면, 나는 무조건 우동을 고를 것이다.
내 첫 우동은 기억이 잘 안 난다. 한동안 모든 동양식 국수는 그냥 날씬한 국수 아니면 통통한 면이었으니까. 그래도 우동이라는 단어를 배우에게 된 건 어느 한순간 티비를 통해서다.
”국물이 끝내줘요!“
세상 어여쁜 1990년대의 김현주가 생생우동의 국물을 한 숟갈 떠먹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 생생하게 남아있다. 생생우동도 아직 잘 먹고 있는 간편 음식 중 하나이고.
그래도 기억에 나는 첫 생생우동은 1998년도였을 것이다. 할머니 모시고 부모님과 동생이랑 가족여행으로 설악산을 갔다. 눈도 펑펑 와서 스키도 탈 수 있고, 할머니는 온천 하실 수 있어 가족여행으로 완벽했다. 스키를 처음 배우면서 스키 천재라는 소리를 몇 번씩 들었는지 모른다. 이 자존감은 오래가지 못하지만, 그 짧은 첫 개인 지도 후 몇 시간 스키 탄 기억만큼 자존감이 뿜뿜 올라가는 걸 느꼈다.
스키 첫 레슨 후 아빠 손잡고 리조트 편의점으로 간식을 사러 갔다. 나는 새콤달콤 포도 맛이랑 와우 껌을 골랐고 아빠가 생생우동을 고르신 후 결제하셨다. 스키 탄 후 생생우동의 맛은 감동의 물결! 감동의 도가니! 5살짜리 아이에 입에서 “카 국물이 끝내줘요!” 나왔다. 따뜻 따뜻한 국물에 핑크빛 어묵이 아닌 어묵 모양의 고명. 하나 버릴 것 없이 다 맛있는 생생우동. 아빠 보고 생생우동 하나 더 사러 가자고 졸랐다. 그게 내 우동 사랑의 시작이다.
생생우동도 그렇게 맛있는데, 면을 그 자리에서 뽑아주는 생우동은 얼마나 더 맛있고 좋아할까? 미국에서도 우동은 찾을 수 있긴 하지만, 그다지 맛있는 곳은 별로 없었다. 미국에서 우동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만에 감사함으로 꾸역꾸역 먹었던 경우가 많았고, 아직도 종종 있다. 생생우동이 다행히 미국에 수출되어서 보이면 사 먹든지 아니면 다른 반조리 우동을 자주 즐겨 먹는다. 가족은 신라면, 진라면 매운맛 먹을 때 나는 꿋꿋이 생생우동을 먹겠다는 그 의지. 매운 음식 잘 못 먹어서 서러움을 생생우동의 국물이 시원함으로 달래줬다.
내 우동 사랑을 제대로 불 질러진 계기는 2012년도 여름이다. 한국을 8년 만에 방문했을 때 아빠가 연남동에 위치된 댕구우동을 데리고 가셨다. 아빠는 그 집 오징어튀김이랑 유부초밥이 그렇게 맛있으시다면서 꼭 먹어봐야 한다고 노래하시면서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셨다. 유부초밥은 맛있으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이곳 면발과 오징어튀김은 비교가 안 됐다. 아빠가 내가 댕구우동 좋아하는 걸 보시고 우동투어를 하자고 다른 우동 맛집들을 찾아서 데리고 다니시기까지 하셨는데, 아무리 일본에서 요리장님을 모셔 오고, 상을 무진장 받은 우동 맛집도 내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댕구우동이 압승이었다. 내 입맛과 기준을 진화시켜준 댕구우동.
살얼음이 거의 성의 없을 정도로 듬성듬성하게 존재하는 쯔유에 총총 썰어져 있는 쪽파와 무를 섞인 국물에 냉우동은 면발을 살려내며 빛냈다. 반면 세상 촘촘하게 썰린 오이, 뽀송뽀송 김 가루, 깨 송송 그리고 내 사랑 분홍색 어묵까지 완벽함이었다. 쫄깃쫄깃하고 탱글탱글한 면을 오징어튀김과 즐기는 건 여름 별미만이 아니라 내가 한국에 와있다는 걸 위장에 알리는 신호였고 삶의 별미였다.
한국에 나올 때마다 댕구우동에 기본 일주일에 한 번씩은 들렸다. 아빠랑 갈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아빠 회사가 바쁘면 친구들이랑 갈 때도 있었다. 나의 대학 시절 생생우동 메이트 남자 친구가 한국 방문할 때면 같이 자주 갔던 데이트 장소이기도 하다. 남과 나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한 그릇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행복하고 중요한지 이때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 못 들어가는 동안 꾸준히 댕구우동이 생각났다. 2022년 11월에 한국 들어가는 표를 사자마자 댕구우동 잘 있는지 지도에서 확인하는 순간 숨이 멎었다. 옛 애인이 전쟁에 나가서 죽었다는 소식을 1년 뒤 들은 느낌이랄까? 댕구우동은 코로나를 못 이겨 문을 닫았다고 한다. 눈물이 났다. 여름에 내 몸을 에어컨만큼 시원하게 해주었던 댕구우동. 아무리 우동으로 상을 받은 식당이 있어도 내 입에는 일등이었던 곳이었는데. 다시 못 간다는 게 서럽다.
마음속에 오래오래 기억할 거다. 면발이 끝내주던 댕구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