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칠맛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시발점이 곤란한 그런 일들이 있다. 나의 고소공포증 빌딩에서 떨어지는 꿈들이 그렇다. 둘 중 뭐가 먼저 시작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릴 때 건물에서 떨어지는 꿈 또는 도보에서 얼굴로 엎어지는 그런 꿈을 수시로 꾸었다. 커가며 알게 되었는데 키 클 때 꾸는 꿈이란다. 어릴 때 키가 많이 컸었다. 항상 반에서 제일 컸던지 두 번째로 컸었다. 성장통을 끼고 살았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유년기를 보냈다. 성장통 꿈은 아직도 가끔 근육통 올 때 걱정된다. 또다시 올까 봐. 그래도 성장통 꿈에 대한 따뜻한 추억들이 있다.
보통 다른 아이들은 악몽 꾸고 나면 엄마를 불렀다고 하던데 나는 아니었다. 빌딩에서 떨어져 눈을 뜨면 새벽 두세 시였다. 다행히도 마루 아니면 부엌에 불이 켜있어서 누군가 놀란 나를 반겨줄 수 있었다. 대부분 늦게 퇴근하신 아빠가 라면을 드시고 있었다. “아빠”라고 부르면 바로 달려와 주셨던 그런 아빠였다. “또 떨어지는 꿈 꿨니? 종아리 아파?”라고 자상히 물어봐 주던 아빠. 그러고 나면 아빠는 거실에 가서 치약 같은 튜브를 가지고 오셨다. 아빠가 출장 다녀오셔서 사 오신 바르는 파스였다. 그걸 손수 내 종아리에 발라주셨다. 아빠의 섬세함이 내 악몽을 달래주고 파스의 화하고 싸함이 내 성장통을 달래주었다.
악몽 때문에 쉽게 다시 못 잠들게 되면 아빠는 죽을 끓여주셨다. 내 생에 아무도 다시 안 끓여준 라면 죽. 참 참신한 라면 죽. 라면을 잘게 부숴서 밥이랑 같이 끓여서 먹는 라면 죽. 글쎄 진짜 죽인진 모르겠지만 추억이 고스란히 남은 음식이다. 아빠의 노력이 남아있는 음식이다. 분명히 피곤함에 절어 있는 아빠인데 성장통과 악몽 때문에 깬 딸과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기가 만들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인 라면과 그래도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음식 죽을 섞어 만든 라면 죽. 그걸 먹고 딸은 푹푹 자랐다. 아빠의 품 아래에서 클 동안만은 키 일·이등 안 놓치고 말이다.
나는 미국에 이민한 후로는 아빠는 혼자 한국에 기러기 아빠로 남겨졌다. 미국에서 내 성장판은 일 년 동안 활발했지만, 그 후로 꼭꼭 닫혀버렸다. 내 지금 키는 초등학교 6학년에 완성된 키다. 아빠 곁에서 컸으면 조금 더 컸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