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놀이와 일의 차이
유채 나물이 나는 철이면 꼭 구입해서 나물 무침으로 먹는다. 나에게는 마음이 편안한,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채소이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나물이기도 하다. 유채꽃 피는 철이 되면 제주에 내려가고 싶지만 일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쉽지 않다. 꽃이 피면 유채밭은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그것이 내게 좋은 기억만 준 것은 아니다. 누구나 사진찍고 싶은 풍경, 고흐의 해바라기 밭을 닮은 풍경이지만 어린 시절 내게는 일을 해야하는 곳, 부모님의 노동을 지켜봤던 곳이었다. 유채꽃이 지고 꼬투리가 생기면 그 안에 작은 유채 씨가 맺히기 시작한다. 유채씨가 까맣게 익으면 낫으로 줄기를 베어 볕에 말린다. 바삭거리면 유채씨를 수확하기 좋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6학년 다닐 때, 다 여문 유채씨를 수확하기 위해 유채를 베는 일을 도운 적이 있다. 나보다 한살 어린 동생과 말이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이 충분히 벨 수 있는 작은 밭을 지정해 주면서 일을 맡기셨다. 밭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내가 담당하고 다른 쪽은 동생이 하기로 했다. 나보다 체구도 크고 남자 아이라 일은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동생은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 몫의 일을 다 끝냈는데도 동생은 반도 베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동생의 몫 중의 남은 부분을 다시 반으로 나누어 일하기로 했다. 이때 나는 동생이 나를 믿고 다시 또 게으름을 피울거라는 걸 일찌감치 알았다. 그래서 동생에게 자신의 몫을 충실히 완수하면 내게 있는 많은 양의 딱지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동생은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동생에게 유채 베는 일은 딱지 치기 놀이와 동일한 수준이 되어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가 된 것이다. 딱지 약속을 듣기 전과 들은 후의 일은 성격이 달라졌다. 그 전의 일이 노동이라면 딱지 약속 이후의 일은 놀이가 된 것이다.
이처럼 유채밭은 알게 모르게 일과 놀이의 차이를 처음으로 배운 곳이 되었다. 『톰소여의 모험 』 중의 <Tom and the Fence>에 나온 톰처럼 말이다. 아니 톰은 나보다 더 먼저 그 차이를 터득하여 동네 아이들을 부려먹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그 에피소드를 잠깐 이야기 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일요일 아침 폴리 이모가 톰 소여에게 울타리 페인트 칠을 시킨다. 친구 벤 로져스가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페인트 칠이 매우 재미있어 보였는지 한번 칠해보면 안될까(Can I try it?) 부탁한다. 톰은 영리하다. 당장, 좋아!라고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한번 튕긴다. 그는 자신의 이모가 아무에게나 이 일을 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한다. 이제 벤은 안달하기 시작한다. 페인트칠이 지구상의 가장 흥미있는 놀이처럼 보인다. 또한 그 일을 안하면 자신은 '아무나'가 되는 것이고 톰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먹던 사과를 주면서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한다. 이제 톰은 못 이기는 척, 벤이 페인트 칠을 하도록 허락해준다. 이제 지나가는 동네 아이들도 벤 로저스의 과정을 똑같이 거친다. 그들 모두 페인트칠을 하고 싶어 안달한다. 그때마다 톰은 마지못해 들어주는 척하고, 아이들은 자신이 아끼는 물건들(놋쇠로 만든 문고리, 눈 하나 달린 고양이?, 깨진 유리병 등)까지 톰에게 기꺼이 바친다. 하기 싫었던 페인트 칠이 순식간에 매우 재미있는 아이들의 놀이가 돼 버린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일이 어떻게 놀이가 되는지 잘 보여준다. 내가 이 에피소드를 좋아하는 이유도 놀이와 일의 개념을 매우 재미있으면서도 깊은 통찰력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는 하고 싶은 것이고, '일'은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이 많은 우리 일상에서 '일'을 '놀이'로 바꾸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Play is what you want to do, and work is what you have to do.
소설은 이어서 일과 놀이의 예를 보여준다. 꽂꽂이는 일이고, 등산은 놀이에 해당한다. 왜일까? 가정을 예쁘게 꾸미기 위해 여성들은 매일매일 꽂꽂이를 해야만 했으니 그들이 다루는 대상이 아름다운 꽃이라 할 지라도 그것은 일인 것이다. 반면 등산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었으니 그런 관점에서 놀이인 것이다.
영국의 부자들, 귀족들이 마차를 끌고, 그것도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사두마차를 끌고 20~30마일을 운전하는 일도 놀이이다. 왜냐하면 사두마차를 끌 수 있는 것은 그들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어찌 노동자들이, 아니면 보통의 중산층이 사두마차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부자들이 임금을 받고 그 일을 하라고 하면 절대 하지 않을것이다. 돈을 받고 그 일을 하는 순간, 그 놀이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Work is what you have to do and play is what you want to do. This is why arranging flower is work, while climbing a mountain is play. There are some rich men in England who drive four-horse passenger coaches twenty or thirty miles in the summer, because the privilege costs them much money. But they would never do this if they were offered wages.
영어 교사로서 어떻게 하면 학습이 놀이처럼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수업한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학습자료를 만든다. 예를 들어, to부정사와 동명사를 배우고 이 두 구문의 차이를 셔레이드 게임으로 맞추게 하거나 아니면 릴레이 문장만들기로 게임을 하는데, 아이들 모두 흥미를 가지고 참여한다. 45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너무 빨리 끝났다는 아쉬움을 드러내는 아이들도 있다. 공부로만 배웠으면 학습이나 일이었겠지만, 게임으로 강화 학습을 하니 놀이가 된다. 그 다음 시간에 갔더니 그 재미있는 놀이를 또 하자고 한다.
작가 마크 트웨인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비슷한 이유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도 마찬가지다. 톰과 허크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장면들을 보면 그들의 여정은 매우 힘들고 위험하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려가며 그들은 도망자 짐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노예 짐은 잡히면 사형이고 그를 도운 그들도 처벌에서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의 여행은 자유로운 놀이로 보인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힘들고 고달프긴 마찬가지니,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왕이면 즐거운 놀이로 바꿔보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