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어머니의 빨래
책장에서 꺼내든 명화집을 보다가 피사로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카미유 피사로의 <빨래 너는 여인>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나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이다. 제주에 계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스완네 집 쪽으로> 에 주인공은 어느날 홍차와 마들렌 과자를 먹다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간다. 홍차와 마들렌은 그에게 감각의 흔적 및 기억의 환기를 불러 일으키는 매개체이다. 나에게 피사로의 그림처럼 말이다.
어린시절 어머니는 하루종일 밭일을 하고 오셔도 밀린 빨래 더미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셨다. 선선한 날이면 수돗가에 앉아서 더러워진 옷들을 빨래판에 주무르셨고, 추운 날에는 아궁이 옆에서 손수 빨래를 하셨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빨래는 거의 매일 매일 해야하는 반복되는 일상의 노동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힘든 일인데, 어머니의 표정은 밝아 보이셨던 적이 많았다. 가끔은 빨래를 하면서 흥얼거리기도 하셨다. '아주 힘든 일인데...'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힘든 표정을 안하고 계신 어머니의 마음 속이 궁금했다. 복잡한 심경이나 미안한 마음을 빨래를 하면서 정화하셨던 것일까. 흐르는 구정물에 감정의 찌꺼기를 흘러 보내셨던 것일까. 그래서 빨래를 하고 나면 한결 기분이 좋아지셨던 것일까. 지금의 내가 빨래를 통해 과거의 어머니를 상기시키듯, 어머니도 빨래를 하면서 어머니(나에게는 외할머니)를 떠올리셨던 것일까.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빨래나 바느질 같은 가사노동은 여성의 창작활동을 가로막는 장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 버지니아 울프가 살아 돌아와서 현대의 여성을 본다면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까 한다.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세탁기, 식기세척기가 각 집마다 구비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편리해진 여성의 가사노동의 대해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가사노동에서 해방된 시대에 살고 있으니 이 시대의 여성들은 얼마나 창작활동 하기에 좋은가! 다시 나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빨래는 분명 고된 가사노동이었으니 어머니 또한 그 일에서 해방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사범대 공부를 끝까지 마치고 교사가 된 외삼촌을 매우 부러워하셨다.) 흥얼거리면서 빨래를 했던 건, 당시의 어머니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왕 하는 일이니 즐겁게 하지 않았을까 한다.
한강 작가의 <흰>을 읽었다. 내가 피사로의 그림에서 위로를 느끼듯, 이글에서도 작가는 손수 빨아 바싹 말린 흰 이불은 위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마네의 빨래 그림은 피사로의 빨래 너는 여인의 그림처럼 일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있지만 느낌이 조금 다르다. 피사로의 빛은 오후의 따뜻한 햇살처럼 느껴지고, 마네의 빛은 오전의 청량한 햇살처럼 느껴진다. 피사로의 빨래가 따스함과 가정의 행복, 어머니와 아이의 밀착된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면 마네의 빨래 그림은 먼저 옷감에 비치는 햇살, 어머니의 파란 드레스가 먼저 들어와 청량감이 느껴진다. 옷을 짜면서 흘러내리는 물에서도 그렇고, 나무들 사이에서 걸려 있는 흰 옷들과 천에서도 느껴진다. 물론 마네의 그림에서도 어머니와 아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비슷한 시기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 또한 빨래 너는 여인의 그림을 그렸다. 시골에 사는 어느 여인이 빨래를 너는 풍경이다. 어릴 적 내 어머니의 모습을 더 닮은 그림이다. 어머니는 감이 열리면 땡감을 으깨어 즙을 내고 그 즙에 흰 광목천을 물들여 갈옷을 만드셨다. 감즙에 물든 천은 빨래줄에 너울대면서 햇빛을 받아 옅은 갈색으로 변해간다. 햇빛을 머금은 갈색 빛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그런 갈색빛에 마음이 열린다.
빨래하는 모습을 고단한 노동이 아니라 아름답고 서정적인 모습으로 그린 것은 장 밥티스트 그뢰즈의 빨래 그림이다. 흰 옷감들도 눈에 띄지만 여인의 하얀 피부색과 바알간 볼, 매끄러운 손 등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흰 옷을 빨고 있는 자태는 누군가를 매혹하는 것 같기도 하다.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귀족들처럼, 상류층 귀족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옷을 갈아 입어야 했으니 그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은 매일매일 세탁 노동을 해야 했다고 한다. 어떤 세제를 썼는지 알아보니, 당시의 여성들은 재 뿐만이 아리라 소변으로 천을 희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감안하면 저 주전자 속에 들어 있는게 그런 세제일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위 그림들의 공통점을 찾았다. 여인들이 하는 빨래 옷감은 거의 모두 흰 천이거나 흰 옷들이다. 빨래를 통해 하얗게 된 옷감을 햇빛에 말리는게 빨래의 정수라고 본 것이다. 그것이 어떤 위로나 따뜻함, 쾌적함을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빨래에 관하여 사람마다 떠올리는 풍경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피사로의 빨래 그림에서 어머니를 떠올리듯, 나에게 빨래는 어머니의 따뜻함과 함께했던 위로의 시간이다. 노동으로 인해 가질 수 없었던 어머니의 꿈이 떠올라 마음 한켠이 먹먹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