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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쌤의 spots of time

12. 우리집의 가마솥

by 제이오름
ChatGPT Image 2025년 9월 24일 오전 10_12_24.png


가족들을 위해 한끼 밥을 차린다는 것은 단순히 엄마이기 때문에 생기는 의무감 때문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엌에서 이런 저런 일을 도와드렸던 기억들, 어머니와의 추억이 오롯이 몸과 마음에 새겨져서 자연스레 손이 움직인다. 어머니와의 기억과 유대감은 자연스레 무쇠 후라이팬에 대한 호감도를 끌어올려 주었고, 나는 냉큼 무쇠 후라이팬을 샀다. 왜 그랬을까. 유년 시절 우리집 부엌에는 가마솥 세 개가 나란히 부뚜막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는 물 뎁히는 용도, 다른 하나는 밥짓는 용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국 끓이는 용도였다. 세 개만으로 왠만한 요리를 다 하셨던 어머니는 식사가 다 끝나면 솥뚜껑과 부뚜막을 정성스레 닦으셨다. 어떤 날은 기름을 살짝 발라 가마솥을 여러번 문지르신다. 그러고 나면 가마솥은 반짝반짝 윤이 나서 금새 세수를 한 어린아이 같아진다. 가마솥은 아궁이와 한몸이다. 가마솥은 있으나 아궁이가 없는 부엌은 들어본 적이 없다. 밥짓고, 국 끓이고 난 뒤 타다 남은 땔감에, 혹은 타고 있는 숯에 생선도 구워먹고 김도 구워먹었다. 그뿐인가. 고구마나 감자 몇 개를 뜨거운 재 속에 묻어 두면 잠시 뒤에 말랑말랑하게 잘 구워진 달콤한 간식도 호강할 수 있다. 군고구마를 호호 불어가며 먹으면 입 주변이 까매지는 게 다반사였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물 뎁히는 가마솥 아궁이는 꽤 오랜 시간 불이 머물렀던 곳이다. 활활 타는 불을 보며 멍때리는 일도 좋았고, 그 불을 보면서 하루 있었던 일과를 두런두런 나누는 시간도 좋았다. 고민을 털어 놓는 것도 아궁이 앞에서였고, 미래에 대한 포부와 꿈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 곳이었다. 동생이 딱지를 몇개를 모았는지, 학교에서 선생님께 어떤 일로 칭찬받고 어떤 일로 혼났는지 매일매일 아궁이 앞에서 털어놓았다. 부모님께 들키면 안되는 이야기를 소곤소곤 하기도 했으니 우리는 아궁이와 비밀을 나눠 가진 셈이다. 속상한 일이 있었던 날에는 내 고민이 아궁이 재 속에 묻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했고, 기쁘고 즐거운 날에는 아궁이 속에서 활활 타는 불이 내 마음과 더불어 춤을 추는 것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아궁이 속 불을 멍때리며 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아궁이 불을 보며, 하늘을 보며, 구름을 보며 멍때리는 시간이 내게 충전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아궁이에 부지깽이가 빠질 수 없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형제 자매 중에 유일하게 사범대까지 마치신 외삼촌을 무척이나 부러워 하셨다. 외삼촌도 자신만 받은 혜택이 미안하셨는지, 학교 갔다 오면 부지깽이로 글자를 써가며 어머니에게 글을 알려주셨다고 한다. 아궁이 앞에서 어린 아이 두 명이 부지깽이로 글자와 숫자를 써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은 금새 상상이 된다. 상상하면서 마음이 아파지기도 한다. 지금도 오누이의 정이 있어서 어머니는 외숙모와 사별하고 혼자 되신 외삼촌의 먹거리를 자주 챙기신다. 8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말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땔감은 어떻게 구했을까. 언니와 나는 땔감을 구하러 마을 인근 숲속으로 간다. 준비물은 장갑과 노끈 정도이다. 노끈만 있어도 충분히 지게 모양으로 어깨에 짊어질 수 있는 형태로 만들수 있다. 숲에 가면 잔가지들은 매우 쉽게 모을 수 있었고, 조금 더 큰 가지들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폭풍에 스러져 죽은 나무의 가지들을 꺾어 모으거나, 이미 삭기 시작하는 나무들을 줍기만 하면 됐다. 귤농사를 지으셨던 아버지는 오래된 귤나무 가지를 모아오기도 하셨고 밭 가장자리에 심어 놓은 삼나무가 크게 자라면 가지를 베어서 땔감으로 쓰시기도 하셨다. 삼나무로 만들어진 귤상자가 낡으면 버리지 않고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늦가을 마당에 떨어진 낙엽들을 쓸어모아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했었고, 때로는 바싹 마른 귤껍질로도 불을 피웠다.


어머니는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피우면서 하루를 시작하셨다. 그 온기가 부엌에 퍼지고 집안에 퍼지면 우리 몸의 온기도 되살아나 하나 둘씩 잠에서 깨어났다. 식구들의 하루가 그렇게 시작된다. 가마솥이 있는 풍경은 매우 따뜻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가마솥은 부뚜막으로 시작하여 그 주변까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아우라를 빛내는 곳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넓어진 공간에는 어느새 이야기가 피어난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할머니 이야기까지 끄집어 내시고, 아버지도 당신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솔솔 들려주신다. 나는 아버지가 9살에 겪은 제주의 4.3 이야기를 아궁이 앞에서 들었다. 그 날의 공포는 잊으려 해도 아궁이 앞에서 스멀스멀 되살아난 게 분명했다.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옛날 이야기를 아궁이 앞에서 들었을텐데, 9살의 어느날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를 잃고 마셨다. 아궁이 앞에서는 기억이 닿는 한 과거를 현재에 끌어올 수 있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 계속 이어지면 과거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일까. 시인 장석남의 <무쇠 솥>이라는 시에서 언급된 것처럼 "먼 조상들이 줄줄이 방문"한다. 바로 우리들의 아궁이 앞으로 말이다.


...

솔로 썩썩 닦아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다

푸푸푸푸 밥물이 끓어

밥 냄새가 피어오르고 잦아든다

그사이

먼 조상들이 줄줄이 방문할 것만 같다

별러서 무쇠 솥 장만을 하니

고구려의 어느 빗돌 위에 나앉는 별에 간 듯

큰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솥에 닭도 잡아 끓이리

쑥도 뜯어 끓이리

푸푸푸푸, 그대들을 부르리


가스레인지와 더불어 현대식 부엌으로 개조한 뒤 가마솥은 오래된 부엌에서 물러났다. 왕이 세자에게, 다음 세대의 군주에게 왕위를 물려주듯 위풍당당한 자세로 말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소임과 막중한 역할을 다해 냈으니 결코 위축된 모습은 아니다. 영광스런 자신의 과거를 뒤로하고 새로 등극한 왕에게 힘을 몰아달라는 무언의 부탁과 함께. 그런데 이후 세대는 옛것을 너무도 빨리 잊어버린다. 가스레인지라는 새로운 왕의 등장은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새로운 왕은 통치를 너무 잘해서 옛 왕의 영광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가마솥 두개는 창고 옆 외부 자리로 이동했고, 또 다른 한개는 수돗가 옆에 방치되어 녹슬고 말았다. 그나마 위로를 한다면 남은 가마솥들은 큰 명절이나 행사를 앞두고 또 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치 나라에 여러 일들이 생겨 현재의 왕이 과거의 왕을 찾아뵙고 조언을 구하듯 말이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가스레인지, 인덕션은 그냥 가스레인지, 인덕션일 뿐이다. 새로운 왕은 처음에는 찬란했으나 이후 형식적인 왕에 머물렀다. 새로운 왕은 일은 잘하기는 했어도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새 왕은 다채로운 이야기 공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아우라도 없다. 음식을 만들어내는 기능만을 지닌 편리한 도구다.

인덕션 앞에서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 가마솥 기억을 떠올리며 가마솥 음식을 찾는 이유는 그것이 맛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대대로 이어져온 이야기를 품고 있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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