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소리에 예민해지는 법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유독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 있다. 작은 소리를 더 잘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특정 소리에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한 소리를 포착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는 도시의 소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주변의 작은 소음에도 민감해지는 감수성 있는 인물이다.
이상하게도 밤늦게 어디 가려고만 하면, 항상 이렇게 지저분한 차만 걸린다. 더 나쁜 건 토요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거리는 지나치게 한산하고 조용했다. 이렇게까지 길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가끔씩 남자와 여자가 서로 꼭 끌어안은 채 길을 건너고 있는 모습이나, 깡패처럼 생긴 녀석들이 여자친구들을 끼고 한무리 떼지어 지나가면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하이에나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지나가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뉴욕이란 곳은 누군가가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거리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부터 삽시간에 무시무시한 곳이 되어버린다. 멀리 떨어진 곳까지 그 소리가 울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욱더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우울하게 느끼게 한다. (112)
홀든은 아이들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그가 파수꾼이 되기 위해서는 감각에 민감해져야 한다. 파수꾼은 원래 그런 예민한 감각을 지녀야 한다. 파수꾼이 되기 위해서는 시각과 청각 등 소리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이 필요한데, 홀든이 학교를 그만두고 도시와 거리, 공원을 배회하는 일은 그의 감각을 예민하게 기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230)
나 또한 소리에 다소 민감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고 소리에 까칠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무엇보다 소리에 대한 감수성이 많고 소리를 잘 기억하는 편이다. 35년만에 걸려온 여고 동창생의 전화에서 나는 순간 얼어붙어버린 적이 있다. 그 친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35년 전의 고등학생 시절의 교실 풍경이 눈앞에 활짝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가 모든 것을 되살려 놓았다. 우리들이 나누었던 이야기, 그날의 교실 풍경, 바깥 날씨 등등 말이다. 나는 특히 저음의 소리를 좋아한다. 저음의 소리를 가진 사람들을 유독 잘 기억한다.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 씨는 분명 저음의 목소리를 지닌 사람일 것이고, 『제인에어』의 로체스터,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또한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이들일 거라고 말이다. 로체스터가 음탕하고 포악한 버사를 정신병원에 내버리지 않고 집에 가둔것은 가문의 명예와 자신의 체면때문이었겠지만, 밤마다 들리는 그녀의 미친 웃음소리를 어떻게 견뎠을까. 버사가 손필드에 불을 질렀을 때도 로체스터는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하려다 불구가 되고 만다. 제인이 불구가 된 로체스터를 만나는 장면을 다시 읽으면 그의 낮은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 음성을 들으면서 제인은 그의 진실됨을 느꼈을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도 유독 소리에 민감하다. 그레고르는 어느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해충으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고 큰 충격에 빠진다. 흉칙한 벌레로 변하고 보니 자신을 쉽게 드러낼 수 없어서 주변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자신이 벌레로 변모한 사실을 더욱 더 깊이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늘 들었던 소리이지만, 변신 이후에는 유독 그 소리들이 마음에 와 박힌다. 가령 빗소리, 시계 소리, 어머니의 노크와 목소리 등 말이다.
그 다음 그레고르의 시선은 창문을 향했는데 흐린 날씨가-빗방울이 함석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를 아주 우울하게 만들었다. '한숨 더 자서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잊어버린다면 어떨까'하고 생각했으나 전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10)
그가 침대를 떠날 결심을 못한 채 이 모든 것을 황급히 이리저리 생각해 보고 있을 때-마침 시계가 여섯 시 사십오분을 쳤다-그의 침대 끝 쪽에 있는 출입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레고르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였다. "여섯시 사십오분이다. 안 떠날 거니?" 이 부드러운 목소리! 그레고르는 대답하는 자기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착오의 여지 없이 자기의 이전 목소리인데, 바닥에서 울려오는 듯, 억누를 길 없는 고통스러운 찍찍하는 소리가 섞여서 그 말들은 그야말로 첫 순간에만 분명하게 나올 뿐 뒤울림에 가서는 똑바로 들었는지 어쩐지 모르게끔 흐트러져 있었다. (12)
소리에 대한 인상깊은 장면이 더 있는데 그 중에서 하숙인들의 식사 장면을 보자. 하숙인들이 부엌에서 식사하는 동안 그레고르는 그들이 먹으면서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레고르는 그들의 이빨 소리를 가려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벌레가 된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일 수 없으니, 혼자 있는 공간에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오롯이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고, 그 소리들의 차이를 분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변 인물들이 내는 소리에 과민하게 반응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과의 단절, 혐오감이 소리감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하숙인들은 모두 일어서 턱수염에 덮인 입으로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 거렸다. 그리고 나서 자기들만 남으면 그들은 거의 말이라곤 없이 식사를 했다. 그레고르에게 이상했던 것은 먹으면서 나는 온갖 소리들 가운데서 언제나 거듭 음식을 씹고 있는 그들의 이빨 소리를 가려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치 그레고르에게, 사람이란 먹기 위하여 이빨을 필요로 하며 이빨이 없이는 제아무리 멋진 턱이 있다 한들 아무것도 처리해 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고 해야겠다는 듯이. '나도 먹고는 싶다.' 그레고르는 근심에 차서 혼자말을 했다. '그러나 저런 것들을 먹고 싶지는 않아. 저 하숙인들이 먹고 사는 대로라면, 나는 죽고 말겠다!'(64)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여동생(그레테)은 그에게 유달리 친절하고 그의 지저분한 방을 치워주는 등 여러 도움을 준다.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지닌 동생이다. 그레테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려 할 때 그 음악을 듣기 위해 그레고르가 몸을 움직이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이 고왔던 동생마저 벌레가 된 오빠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버리자고 말한다. 가족들에게 짐만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그레고르가 느끼는 외로움, 소외감은 얼마나 컸을까.
어린 시절, 새벽에 가장 먼저 들었던 소리는 어머니께서 칼질하는 도마 소리였다. 그 소리에 가끔씩 잠이 깨기도 하지만, 일정한 리듬과 경쾌함을 갖고 있는 도마 소리는 심리적으로 매우 큰 위안이 됐다. 그리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듣다 보면 아침에는 이런 음식들이 나오겠구나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된다. '감자 써는 소리가 나네. 감자국이나 감자볶음이 나오겠구나.' '아, 저 소리는 늙은 호박 자르는 소리인데, 갈치국을 끓이시려나?' '이 소리는 파와 마늘을 다지는 소리네.' '오늘은 생선을 크게 도막내고 있구나.' 등등 말이다. 매일 아침마다 변함없이 들려오는 그 소리는 가족들에게 한끼 맛있는 밥을 해 먹이려는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들어가 있는 소리이다. 도마 소리는 결코 소리가 작지 않은데도 그 소리는 일상의 평온함을 담고 있다. 예상할 수 있는 일상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측할 수 있는 일에 편안함을 느낀다고 하였다. 하물며 그 일이 어머니가 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큰 위안이겠는가.
직장을 다니면서도 가급적 세 아이들에게 집밥을 해 먹기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식당에서 아이들이 맛있게 먹은 음식이 있으면 집에서 꼭 따라해 보려고 했다. 요리책과 블로그의 다양한 요리와 레서피들을 읽어보면서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였고, 그 음식의 맛은 어떤지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우리 아이들 입에 맞는 요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렇듯이, 해 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 중의 하나이다. 나는 요리할 때 아이들이 집에 있으면 반드시 칼질 소리가 경쾌하게 나는 나무 도마를 사용한다. 각자의 방에서 놀다가 도마 소리를 듣고 부엌을 기웃거리는 아들과 딸들을 보면 요리가 더욱 즐거워지고, 마치 어린 시절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슨 음식을 하는지 가만히 쳐다보는 모습도 너무 귀여웠다. 아이들이 속상한 일이 있거나 조금 우울해 있을 때는 소리의 울림을 크게 하기 위해 조금 힘주어서 도마 소리를 냈다. 내 어릴 적 어머니의 도마 소리를 기억하면서 말이다.
소리에 예민해지는 것은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세상을 잘 읽어내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