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멈춤에 관하여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트라우마가 있게 마련인데, 어린 시절 나에게 트라우마는 터진 수도관이었다. 부모님께서 농사일로 밭에 간 사이에 집 근처 매설된 수도관이 터졌는지 마당으로 물이 계속 들어 온다. 조금 있으면 그치겠지 했는데, 그치지 않고 물은 점점 더 고이기 시작한다.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불안감은 증폭되고 이제 공포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다 집이 물에 잠기는 것은 아닐까?' '물이 길에, 마당에 넘쳐나니, 우리가 마실 물이 없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이 일이 내게 왜 트라우마로 남았을까 생각해 보니, 그 이후에 내가 읽었던 책이나, 경험했던 일들에서 끝나지 않는 반복적 일이 가져다주는 공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과 매년 토미드 파울라가 쓴 『Strega Nona』를 읽고 있다. 이 책은 원어민 협력 수업에서 읽는 책 중의 하나이다. 쉬운 픽처북이라 생각하겠지만, 여러가지 배울 점도 있고 주제도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라 서로 의논하여 선택했다. 이탈리아 배경이다보니, 배경 그림이나 언어, 음식 등 그 나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 남부, Calabria의 마법사 할머니의 이야기로서, 이탈리아어로 nona는 할머니, strega는 마법사(witch)라는 뜻이다. 이탈리아는 카톨릭 국가라서 수도사, 신부, 수녀, 수도원, 수녀원 등의 어휘들이 자주 나온다.
신중하지 못한 우리의 앤쏘니(Anthony)는 할머니의 주문은 다 외웠지만 마지막 부분을 놓치고 만다. 요술 파스타 냄비에 세번 키스를 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할머니가 Amelia 할머니를 보러 간 사이에 자신이 요술 냄비에 파스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앤쏘니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다. 사람들은 앤쏘니가 만든 파스타를 맛있게 먹지만, 문제가 생겼다. 앤쏘니는 요술 냄비를 멈추게 하는 주문(마지막 세번의 키스)을 모른다는 것이다. 냄비의 파스타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집에 가득차고, 거리에 넘쳐나고 파스타가 덮힌 세상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준다.(물론 이 책은 동화같은 이야기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 집안 가재도구를 이용하여 바리케이트를 쳐도 소용없다.
할머니가 집에 도착하여 사태를 파악하여 요술 냄비를 그치게 한다. 얼마나 안도감이 드는지. 반복된 어떤 일이 그친다는 것, 멈춘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감을 해소해주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지 이 책을 통해 또 느끼게 된다.
끝나야 되는 것이 끝나야 되는 시점에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대표적으로 몇 년전에 겪었던 코로나 팬데믹이 그렇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시지푸스도 마찬가지다. 그가 받은 벌은 산꼭대기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인데, 매번 돌이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다시 굴러 떨어지고, 떨어진 돌을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반복이 시작된다. 시지푸스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과 절망적인 반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하게 카뮈의 『이방인』에도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것이 뫼르소를 몹시도 괴롭히는 요인으로 나온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여러 관점으로 읽을 수 있지만, 나는 시지푸스 신화의 관점으로 읽어보기도 했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아침 일어나보니 갑자기 자신이 흉축한 벌레로 변해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끔찍한 벌레의 모습이니 가족 모두 그를 피하고 외면하고 무시한다. 그레고르는 더 이상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고립되고 소외된 삶을 살아간다. 더욱 더 고통스러운 것은 벌레로서의 존재,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평생동안 벌레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건지, 언제 자신이 다시 사람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는 마치 『Strega Nona』에서 요술 냄비의 파스타가 그치지 않아서 공포에 질린 앤쏘니의 심정과 흡사하다.
여기서 의미하는 멈춤이란 단순히 일의 휴식이나 자기성찰, 재정비 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로의 여행이나 이동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이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 속에서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에 대해 이야기에 대한 말이다. "멈춤" 얼마나 위안이 되고 나에게 용기를 주는 말인지 모른다. 일단 멈추면 그 다음 일과 행동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 볼 수 있다.
학생들과 감정 조절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누군가가 하루종일 계속 화를 낸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매우 큰 공포가 되지 않을까. 감정 조절을 통해 때로는 멈춰야 하고, 삶에서 멈춤이 필요한 상황과 이유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멈출줄 아는 친구가 더 멋지다고도 해준다. 한여름의 더위와 장마도 그칠 것을 알기에 견디는 것처럼. 새싹도 계속 새싹으로만 있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