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의 어니스트와 회복력
아버지께서 시장에서 강아지 한마리를 사오셨다. 하얀색의 귀여운 수컷 강아지였다. 혈통이 우수한 진돗개나 풍산개 품종이 아닌 그냥 잡종의 강아지였다. 이렇게 귀여우니, 혈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나와 동생은 들뜬 기분으로 멋진 이름을 짓겠다고 서로 아우성이었다. 백구가 좋을까? 빙고는 어때? 겸둥이? 흰둥이? 쫑? 여러 후보가 올라왔다. 어떤 이름이 좋을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중학교에 다니던 오빠가 '정직'의 의미를 담고 있는 '어니스트'라는 이름을 추천해 주었다. 그 이름이 등장하자 마자, 우리가 제안했던 여러 이름들은 갑자기 우왕좌왕 파도에 쓸려가고 말았다. '어니스트'라는 세련된 이름의 등장에 유력 후보였던 '백구'와 '쫑'은 촌스러운 이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가 후보로 내세운 이름들이 잠시 부끄럽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강아지 키우는 것을 탐탐치 않게 생각하셨다.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자식 하나 키우는 것처럼 어머니의 몫이 될까봐 귀찮아서 그러셨던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어니스트와 헤어지게 되는 날 알게 됐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강아지 키우다가 헤어지게 되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회복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어머니는 우리에게 알려주려 하셨던 것 같다. 어니스트가 집에 온지 일주일 쯤 됐을 때 강아지를 끌어 안고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그렇게 큰 애정을 주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어린 마음에 그저 서운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어머니는 어니스트를 방안에 들이지 말라고 하셨다. 충분히 넓은 마당이 있고, 집도 마련해 주었으니 그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개를 키웠다. 하지만 부모님이 안계시면 몰래 방에 데려와 놀기도 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어니스트를 곁에 두고 주저리주저리 사연을 풀어 놓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정서의 성장에 어니스트는 매우 큰 몫을 했다.
나의 감정을 성장시켜준 어니스트와 이렇게 빨리 이별할 줄은 몰랐다. 동네 어디선가 뭔가를 잘못 먹었는지 어느 날부터 어니스트는 시름시름 앓다가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이별이라는 것이 그렇게 큰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나에게 그 충격과 상처는 매우 오래 갔다. 며칠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 온 마음을 쏟은 만큼, 그만큼의 상처가 새겨졌고 그 고통을 이겨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 할거라는 것을 어머니는 아셨다. 이별이란 사람과의 관계에서 겪게 될 일들이기에, 그 일을 미리 겪게 하고 싶지 않으셨나 보다. 또한 정에 너무 이끌리는 사람이 되면 이성적으로 해야할 일을 못할까봐 걱정하셨나 보다. '그렇게 큰 애정을 주지 말아라.'라는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어머니는 나의 회복력(resilience)을 걱정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나는 서서히 감정을 추스르고 어니스트와의 기억을 마음 한켠에 담아둔 채 고통을 극복해 나갔다. 어머니는 많은 걱정을 하셨지만 나는 이외로 내 감정을 회복해 나갔다. 얼마전 읽었던 알랭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서 읽은 "회복력"에 관한 글은 나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나에게 어니스트와의 이별은 느닷없이 등장하는 호랑이였다. 그 자체가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예상치 못한 고통스러운 일, 두려운 일은 적응하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나약해지거나 쉽게 감정의 극단에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동화에서 소피와 소피의 엄마는 기겁하지 않고 조용하게 잘 대처한다. 이 글에서 나는 작은 문제에 흔들리거나 호들갑 떨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됐다.
주디스 커의 유쾌한 동화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를 보면, 소피와 소피의 엄마와 함께 차를 마시러 느닷없이 호랑이가 등장한다. 여러분은 모녀가 기겁을 했으리라 예상할 테지만 그들은 이 엄청나게 크고 대개는 공격성이 강한 방문객의 출현에 아주 잘 대처한다. 모녀의 대응은 우리도 스스로의 행동을 조절하면 좋을 거라는 일종의 미묘한 권고다. 어쩌면 우리는 두렵다고 생각하는 많은 상황에서 분별력을 잃고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을지 모른다. 물론 호랑이는 엄청난 식욕을 과시하며 모든 걸 먹고 마시지만, 소피나 소피의 엄마는 제외하고다. 문제가 있다면,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먹을 음식까지 바닥났다는 것 정도다. 그러나 그건 절망하거나 당황할 이유가 못 된다. 모녀는 큰 동물에게 먹일 수 있는 음식은 모두 먹였다. 아빠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맛있는 소시지를 파는 동네 카페로 가 간단한 식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회복력이다. 불운하고도 아주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은 끝나진 않는다. 문제에 맞는 해결책은 어딘가에 있고, 예상치 못한 일은 적응하면 된다. 어려움은 기회로 바뀐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피의 부모로, 나약해지거나 쉽게 흥분하거나 격노하지 않는다. 그들만의 삶의 조용한 방식은 믿음직하다. (114)
나의 어머니는 당신의 삶에서 자식들에게 회복력의 의미를 잘 가르쳐 주셨다. 어니스트를 떠올리면 나는 언제나 어머니와 회복력을 머리속에 그린다. 어느날 문득 명화집을 보다가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게 됐다. '그래, 이 그림 회복력에 대한 그림이었지.' 빛을 향해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식물, 해바라기를 통해 고흐는 자신의 삶 속 절망과 싸우는 회복력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한 니체의 말처럼 태양을 향해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해바라기는 회복력의 상징으로 그 어떤 것도 그를 죽이지 못하고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 주인공 제인 에어는 어린 시절부터 학대받고 자란다. 소피와 소피의 엄마에게 나타났던 호랑이는 『제인 에어』에서 리드 숙모와 사촌인 존 리드의 학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인 에어는 자신 안에 있는 내면의 힘과 도덕성을 잃지 않는다. 그 내면의 힘이란 다름아닌 회복력이다. 그녀의 회복력은 자신을 우뚝 서게 해줄 뿐만 아니라 로체스터의 삶 또한 회복해 주었다.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쿵 했던 이유,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