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림자 놀이
아이들이 물어본다. 핸드폰도 없고, TV 프로그램도 다양하지 않던 시절에 아이들은 어떤 놀이를 했는지 말이다. 그 시절에도 놀 것은 많았다. 핸드폰이 없어서 오히려 마을 아이들과 역동적으로 신나게 놀았었다. 계절마다 놀이의 방식은 달랐다. 봄이면 아이들과 고사리 뜯고, 보리수 열매 따먹으러 들에 돌아다녔고, 여름에는 보말 잡으러 꼭 바다에 갔다. 가을이면 밤을 주으러 동네 산을 돌아다녔고 겨울에는 동네 고야동산에서 비닐 포대로 눈썰매타기, 연 날리기, 숨바꼭질 하기 등을 했다. 이 모든 것이 놀이처럼 즐거운 일들이었다. 집에 있어도 고무줄 놀이와 땅따먹기 놀이로 시간가는 줄 몰랐고, 밤에 잠이 안오면 동생이랑 그림자 놀이를 하곤 했다.
제삿날에 음식을 만들면 여러 음식들을 차롱에 차곡차곡 담아서 동네에 돌리곤 했었다. 동생과 나는 가까운 집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음식들을 전달했다. 그날도 어스름 저녁에 음식을 돌리던 때였다. 집마다 전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어느 집 창가에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나는 한지로 바른 창문에 비치는 그림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누군가의 그림자였고, 옆선이 매우 잘생긴 것으로 보아서 20대의 젊은 청년의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저 집에는 젊은 사람이 없는 집인데... 아마도 친척이 방문했나 보네.'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날 때마다 점차 커지는 그의 그림자에 마음이 설렜던 주디의 마음처럼 나 또한 그랬다. 실루엣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그 기억은 꽤 오래 남았다. 교사가 되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방과후 활동으로 영어 그림자 연극반을 개설하여 영어를 가르쳤던 적이 있다. 201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근무하던 학교에 한부모 가정도 많았고, 집이 가난하여 여러 어려움을 겪고 사는 학생들이 있었다. 학원을 다닐 수 없던 형편의 아이들이었기에 방황하는 일도 많았다. 이 아이들에게 영어 수업이라 하지 않고 그림자 연극 소품을 만들거라는 말로 먼저 호기심을 갖게 했다. 연극 소품 만들면서 영어 단어 하나씩 배우자고 했다. 처음에는 관심없던 아이들이었는데, 한 명씩 한명씩 가입하자 금새 8명이 되었다. 이어서 2명의 인원을 채우고 10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을 하다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이들 중에 소품 만들기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이 둘이나 있었다. 아이디어만 제시했는데, 뚝딱뚝딱 잘도 만들어냈다. 시간이 모자라면 다음 날 방과후에 이어서 하고, 만든 작품이 마음에 안들면 더욱 정교하게 다듬기도 했다. 소품 만들기와 더불어 연극 대본 쓰기도 같이 진행했다. 연극 대본에 맞게 소품을 만든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소품에 따라 대본을 고치기도 했다. 모두 협력하여 진행한 그림자 연극은 성공이었다. 불을 끄고, 전등과 그림자 연극 소품들로 만들어낸 빛의 예술에 학생들이 빨려들기 시작했다. 당시의 학생들 벌써 30대로 접어든 청년이 되었을텐데.
유년시절의 그림자 놀이와 15년 전 방과후수업에서 올렸던 그림자 연극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또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영국의 유명 화가 에드먼드 블레어 레이튼(Edmund Blair Leighton, 1852~1922)의 <그림자>라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여인은 전쟁터로 떠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을 벽에 아로새기고 있다. 실루엣 그림자라도 그리면 그의 이미지를 영원히 박제하고 그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여인은 코린트(Corinth) 사람으로, 시키온(Sicyon) 지방 부타데스(Butades)의 딸 코라(Kora)라는 그리스 요정이라 한다. 화가 레이튼은 그림이 그려지는 벽을 중세로 바꾸어 보다 극적인 장면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 청년 역시 십자군들이 입는 갑옷 차림으로 여유있게 출정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저 멀리 바다에 그가 타고 떠날 배가 기다리고 있다. 이제 그가 떠나면 내일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가 무사히 귀환할지 그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 사실을 알기에 여인은 그녀의 붓끝으로 그의 실루엣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도 붓끝에 오롯이 모여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그림자는 그저 실루엣일뿐이라고 그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림자를 그리는 저 여인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지닌 붓은 그냥 붓이 아니다. 그녀가 꾹 참아왔던 눈물, 흐느낌을 적신 붓이고, 내일을 알 수 없는 연인들의 떨림과 두려움을 그리고자 하는 붓이다.
이 그림은 T.S. Eliot의 <The Hollow Men>의 일부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We are the hollow men, we are the stuffed men.
Shape without form, shade without colour.
Those who have crossed with direct eyes.
Not with a bang but a whimper.
우리는 속이 빈 자들이며, 채워진 듯 비어 있는 존재들이다.
형태는 있지만 실체는 없고, 그림자는 있으나 색이 없다.
정면으로 세계를 바라본 자들은 떠났다.
폭발이 아니라 흐느낌 속에서 끝난다.
많은 예술가 들에게 그림자는 허상, 어둠, 슬픔, 비어있는 존재로 표현되지만, 누군가에게 그것은 숭고함이 되기도 한다. 화가 조르즈 드 라 트라의 그림자와 빛은 숭고함과 참회이다.
내게도 빛과 그림자는 spots of time(시간의 지점)이며, 수업에서든, 생활에서든 아이디어와 상상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가을이 깊어서 집안 깊숙이 들어오는 빛을 오늘도 가만히 응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