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세이지 그린이 왜 이리도 좋을까
반찬통 몇개를 새로 사야해서 온라인 쇼핑몰을 둘러보는데 맘에 드는 색이 눈에 들어왔다. 세이지 그린 색의 뚜껑이 있는 반찬통이다. 일부러 찾은 색도 아니지만, 바로 주문을 했다.
세이지 그린은 세이지라는 허브에서 따온 색 이름이다. 초록빛과 회색빛이 어우러진 색으로 뭔가 클래식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색이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 "스카보로 페어"라는 곡에 나오기도 한다.
세이지 그린, 참 좋아하는 색이다. 언제부터 이 색을 좋아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부터 기억에 각인된 색이고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색이기 때문인것 같다. 사실, 그린색 계열은 대부분 다 좋아한다. 연두색, 청량한 초록색, 올리브 그린도 좋지만 세이지 그린은 뭔가 온화한 느낌이 있어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니 더 마음이 간다.
가을로 접어들 무렵 제주 오름의 들판은 풀베기가 시작된다. 초록색의 풀을 베고 말라가기 시작할 때 쯤에 들판은 온통 세이지 그린 색이 된다. 벤 풀들은 처음에 세이지 그린이 됐다가 연한 노란빛의 건초로 말라간다.
중학교 시절, 미술시간에 그라데이션 활동이 있었다. 좋아하는 색을 그라데이션으로 표현하는 활동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잡은 색은 그린이었다. 짙은 초록새에서 연한 초록색으로 그라데이션 하다보면 세이지 그린색이 나온다. 선생님은 그라데이션을 설명하면서 삶에 비유하셨다. 그라데이션처럼 우리 삶도 자연스런 흐름과 단계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급작스런 색의 변화는 잘못된 예의 그라데이션이었다. 잘못된 예의 그라데이션은 마치 우리가 평평한 들판을 걸어다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마주하는 절벽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잊을 수 없는 미술시간이었다.
세이지 그린 하면 폴 세잔의 그림들이 떠오른다. 세이지 그린 색만 쓴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그의 그림을 보면 구석구석 세이지 그린 색이 조금씩 숨어 있는 느낌이 든다. 세이지 그린 색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색인지 보여주기 위해 다른 그린 색들을 썼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제인 오스틴 소설을 읽으면서 당시 리젠시 시대의 드레스를 찾아보게 됐다. 그 중에서 연한 초록색이나 세이지 그린색의 드레스들이 눈에 띄었다. 분명히 제인 오스틴도 고향인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의 자연과 언덕을 기억하면서 이 드레스들을 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많은 초록색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흘러가는 초록의 그라데이션을 보면서, 특히 세이지 그린을 보면서 삶을 성찰했을지도 모른다. 복잡한 인간사를 들여다보고, 사람들의 심리를 엿보고, 대화에서 오고가는 말들의 본질을 궤뚫어 보면서 그라데이션처럼, 세이지 그린색처럼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억지를 부린다는 것, 꾀를 부려서 상황을 바꾸려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부질없는 것임도 말이다.
영국의 오래된 코티지나 전통 주택의 문, 부엌 캐비닛, 벽에서 세이지 그린색이 보인다. 세이지 그린을 치유의 색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