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담 위의 호박 넝쿨
우리 동네에는 많은 돌담들이 있다. 밭과 밭 사이의 경계, 과수원과 과수원 사이의 경계, 들판과 들판 사이의 경계마다 까만 현무암 돌로 이루어진 돌담들이 즐비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까만 돌,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돌틈을 지나서 호박 넝쿨이 담장 위로 쭉쭉 뻗어 나간다. 살기 좋은 장소임을 호박 넝쿨이 가장 먼저 알아 보았던게 틀림없다. 연두빛, 초록빛의 호박 줄기와 호박 잎, 샛노란 호박꽃, 가을이 되면 누르스름하게 혹은 주황빛으로 익어가는 호박은 까만 현무암 돌담 위에서 어떤 옷을 입어야 돋보이는지 아는 게 틀림 없다. 언제 피어야 노란 빛이 절정일지 아는 것처럼 호박꽃이 줄기들 사이로 솟아 나와 자태를 뽐낸다. 여름 장맛비를 맞은 호박 잎은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마냥 싱그럽고 즐겁다.
어머니는 때가 되면 돌담 아래에 호박 심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호박 줄기, 호박 잎, 호박꽃, 늙은 호박 뭐 하나 버릴게 없는 먹거리였으니 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호박이 황금 마차로 변하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심었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호박을 잭 오 랜턴으로 만들어 할로윈 데이 때 썼다는 것을 모르고 심었을 것이다. 자식들이 돌담 위 호박 넝쿨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도 못하고 심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식들에게 색감을 보는 눈을 길러주었을 것이라고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심었을 것이다. 노란 호박꽃 안에서도 샛노란 부분과 연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부분을 보고 그라데이션이 무엇인지 알았을 거라는 걸 생각도 못해 봤을 것이다. 실제로 어머니의 자식들 중 둘은 미술을 전공으로 업을 삼게 됐고, 다른 자식하나도 그림을 취미로 하면서 살아가게 됐으니 어머니의 호박 심기는 또 하나의 미술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호박 잎이 무성할 때면 어머니는 잎을 따다가 까슬거리는 겉줄기를 벗기고 호박 잎 국을 끓이셨다. 가장 연하고 먹음직 스러운 호박 잎 따는 일은 의외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까슬거리는 겉줄기를 얼마나 한번에 잘 벗겨낼지 스스로와 경쟁했다. 자주 하다보니, 속도가 붙어서 한번 만에 잘 벗겨내는 일이 잦았다. 껍질을 벗길 때 동생이 은근 슬쩍 끼어들어 앉기도 했다. 그러면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동네 아이들 이야기 등을 꺼내며 수다를 떨기도 했다.
더운 여름에는 주로 냉국을 해 먹는다. 냉국만 먹다가 차가워진 속을 호박잎 국으로 달래주려고 했을까. 장맛비로 습한 기운이 감돌 때, 더운 열기가 가시고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 할 때 어머니는 호박잎 국을 끓이셨다. 마른 멸치가 있을 때면 멸치를 우려서, 혹은 멸치 조미료를 이용하여 육수를 만든 후에, 밀가루를 물에 개어 국에 넣는다. 호박 잎은 손으로 짓 이겨서 듬성 듬성 짤라 놓는다. 거기다가 간마늘을 조금 넣고 국간장으로 간을 한다. 아주 간단한 조리법이라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익히게 됐다. 맛도 아주 좋아서 호박잎 국을 끓이는 날이면 마냥 좋았다. 약간은 스프같다고 느낄 때면 우아한 마음으로 먹었고, 약간은 곰탕 같다고 느낄 때면 김치를 얹어서 씩씩하게 먹었다. 그 때는 몰랐다. 커서 이 음식이 나의 소울푸드가 될지. 지금도 호박 잎 나올 때 쯤에 제주에 내려갈 때면, 어머니는 호박 잎을 꼭 따서 챙겨주셨다.
돌담, 호박 잎 따기, 겉줄기 벗기기의 기억이 없는 이들에게 호박잎 국은 그저 세상에 있는 음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을 때 호박잎 국을 해준 적이 있다. 음식을 보자 표정부터 달갑지 않다. "희멀건 이 국은 뭐에요?" "호박 잎으로 국도 끓여요?" "그냥 심심한 맛인데요." "저는 그냥 다른 거 먹을래요." 그래도 먹다보면 익숙해져서 좋아하게 될거라고 애써 권유한다. 학교에 오고 가며 돌담에 대한 기억들, 호박 넝쿨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면 그 맛이 다르게 느껴졌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다.
수확한 늙은 호박은 호박 갈치국이나 호박 조림으로 주로 먹었다. 어머니가 만드신 호박 갈치국에 들어간 갈치는 온전한 상태의 갈치는 없었고 주로 갈치 머리나 꼬리 부분 뿐이었다. 비싼 갈치였으니, 구워 먹을 수 없는 머리나 꼬리 부분을 국물 내서 먹는 방법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가장 최적의 맛은 갈치와 호박과의 조합인 것을 누가 생각했을까. 생선 국이어도 하나도 비리지 않는 맛이었다. 국 속에 들어간 호박은 또 다른 빛깔을 띤다. 아마도 하얀색의 갈치와 대비되어 그 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슴슴하면서도 감칠맛 있는 호박 조림도 밥상에 빠지지 않는 반찬이었다. 국간장과 참기름, 설탕, 마늘 만으로 맛을 낸 호박 조림, 만들기도 참 쉽다. 조림으로 만든 반찬이라 밭일 할 때 점심으로 싸갈 수 있는 훌륭한 요리기도 했다. 밥이랑 몇 가지 반찬들을 구덕(대나무로 짠 점심 바구니)에 넣어서 밭일 갈 때 가져 갔다. 호박 조림을 만들면 아마도 어머니의 요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는 착각이 든다. 밭 모퉁이 나무 아래의 찬합 속에서 그것은 바람 소리와 쉬익쉬익 나뭇잎, 풀잎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좀 더 익어갔으리라. 안 그랬다면 그런 맛이 안 났을 테니 말이다.
돌담 위 이슬 방울 맺힌 호박 잎의 풍경이 떠오른다.
아, 내가 물방울 맺힌 호박잎을 더 유심히 보았다면 혹시 알아? 김창열 작가처럼 멋진 물방울 그림을 그렸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