뒹굴뒹굴 나태함을 즐기는 토요일 점심이다.
티비를 보던 딸래미가 갑자기 짜장면이 먹고 싶단다.
다같이 집 앞 중국집으로 출동했다.
우리는 대가족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나에게는 시엄마, 시아빠) 그리고 꽃미남 남편에 아들(초6), 딸(초5), 유기묘(3살) 한마리까지 총 7가족이다.
가족이 많다는 건 당연지사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이 없다는 얘기다.
그 중 가장 시끄러운 소란의 주인공은 대부분 할머니다.
오늘도 우리 할머니 한껀 해주신다.
주문한 메뉴가 차례로 나오는 중에 짬뽕이 가장 먼저 나왔다.
할머니가 조금 떠서 드시더니 맛있으셨는지 할아버지에게 조금 드시라고 권한다.
"여보, 짬뽕 좀 드셔보실래요?"
"아니 안먹어"
"조금만 드셔봐요"
"안먹어"
"여기 짬뽕 맛있다니까 맛만 보셔"
"안먹어~"
할아버지는 오래전 큰 교통사고로 장 수술을 여러차례 하신 터라 장이 유착되어 있어 장운동이 활발하지 못하신데다 세월탓에 더 그 기능이 떨어져 있으시다. 식사량 조절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얘기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양을 조절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데 할머니는 조금씩만 드시는 할아버지가 못내 염려스러워서 늘 먹어봐요 먹어봐요 노래를 멈추질 못하신다.
식사때마다 이어지는 평범한 대화지만 우리 애들은 화가 나고 만다.
"할머니! 안드신다잖아요 한번만 권해야지" 아들래미 언성이 살짝 높다.
"맞어 할머니는 꼭 그래 할아버지가 안드신다고 했잖아요" 딸램도 소리를 살짝 높인다.
초딩들의 아우성에 할머니가 머쓱해지셨지만 굴하지 않는다.
"아니 조금 맛만 보시라고~"
"할머니는 진짜! 한번 싫다고 하면 절대 안들어! 세번 네번씩 권한다니까"
아들램이 그동안 본인이 당해왔던 할머니의 끝없는 권유가 생각났는지 한숨이 나온다.
"맞어. 할머니는 진짜 끝이 없어." 딸램도 거든다.
이때 아빠(남편)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끼어든다.
"너희들도 1절만 해 여기서 더하면 진짜 버릇없는 거야"
"할머니는 맨날 3절 4절까지 하는데 뭐"
그때 난데없이 할머니가 폭탄을 터트리고 만다.
"안그래야지 하는데도 안되는 걸 어쩌냐 죽어야 이게 끝나지"
헐 ~
애들이 질색팔색하는 할머니의 막장드라마스런 협박엔딩이 결국 나오고야 말았다.
폭발한다.
"할머니 내가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진짜 ... " 아들래미가 화가 나서 얼굴이 벌개진다.
평화로운 주말 기분좋게 가족끼리 외식하러 나왔다가 이게 왠 난리란 말인가
"아이고~ 이건 할머니가 너무 하셨다."
여기서 내가 끼어들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 중재에 나선다.
"그래그래 할머니가 실수했어. 미안해"
우리 할머니는 걱정과 불안이 많다. 고장난 라디오처럼 계속 똑같은 잔소리가 반복된다.
어느 할머니가 안그럴까마는 우리 할머니는 걱정과 불안을 해결해야만 하는 성미를 지니신 턱에 지시사항이 매우 많다.
잔소리가 어마어마하다는 얘기다.
물 챙겼니? 밥먹다가 목마르면 먹어야지.. 내복 입고 다녀라. 잠바입어도 다리는 시렵드라. 밥은 다 먹은거야 이거 남았는데.. 한 숟가락만 더 먹어 배고플텐데.. 신발주머니 안가져왔어? 머리 좀 빗어줄게 이리와봐
머리에 물을 좀 묻히고 ..
음... 정작 엄마인 나는 아들에게 스스로 자기 삶을 챙기는 연습 시키기 위해 일부러 잔소리 하지 않으려고 방에 들어와 있는데... 하.... 내가 엄마고 내가 챙기고 있는데... 6살 아닌데 6학년인데...
안되겠다 싶어 나가보니 아들의 표정이 굳어있고 대꾸도 안한다.
대꾸하면 할머니의 질문이 더 많아지고 대답해야 할 말이 끝이 없다는 걸 알아서라고 한다.
대꾸를 하건 말건 할머니는 용건을 다 마쳐야 끝이 난다.
"엄니 제가 엄마에유. 제가 챙길테니까 들어가셔유."
매일 이런 대화속에 노출되다보니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결코 작지 않다.
특히 누군가 식욕이 없거나 아파서 잘 못먹으면 할머니의 모든 에너지는 먹이기 위한 단하나의 목적을 실현하는 곳으로 향하기에 타고나길 식욕이 없는 아이로 태어난 아들래미가 받는 스트레스는 내 짐작 너머일 것이다.
아빠(남편)는 하루종일 회사에 있다가 저녁이나 주말에만 보기 때문에 이런 배경을 몰라서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원망 섞인 한마디씩을 내뱉을 때 버릇없어 보이는지 혼을 내기도 하지만 옆에서 매일 지켜보는 나로서는 아이들의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된다.
추울까봐, 다칠까봐, 배고플까봐, 감기걸릴까봐, 목마를까봐 ....
할머니의 권유는 권유가 아니라 강제와 조종에 가깝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냥 할머니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점점 자기주장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야말로 매일 전쟁이 벌어진다.
"싫다"고 분명 자기표현을 했지만 너무 쉽게 무시당하는 경험
아무리 아이들이어도 점점 그 경험이 쌓이다보면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싹트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얼마나 자신들을 사랑하는지 잘 알면서도 원망은 삐죽삐죽 상황마다 튀어나온다.
"이거 먹어봐"
"싫어요"
"한번 먹어봐"
"싫어요"
"에이 그냥 조금만 먹어봐"
"싫다니까요"
"맛만 보라니까"
마지막엔 '싫다'는 애 입에다 그냥 넣어버리기!
애들이 제일 싫어하는 할머니 특기 중 하나!
10년 이상 같은 경험을 해온 아이들로써는 최선을 다해서 자기표현을 하는 중인 것이고
70년 가까이를 먹이는 것에 집중하고 살아온 할머니로써는 최선을 다해서
가족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사랑을 표현하는 중인 것이다.
어렸을 때 너무 배가 고파서 친척집의 개가 밥 한그릇 먹는 걸 보고 그 집의 개가 부러웠다는 할머니
어린 남동생이 아파서 죽어가는데 돈이 없어 병원에 데려가보지 못하고 이별했다는 할머니는
그 기억속에 아직도 그대로 서 있는 듯 하다.
이 배고팠던 기억, 소중한 사람을 잃어봤던 기억은
세포 하나하나에 날카롭게 새겨져서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그러지 마시라 얘기를 해도
듣는 사람이 괴롭겠구나 아무리 스스로 이해를 한다고 해도
자동으로 그냥 그렇게 굴러가게 한다.
안 그래야지 결심해도 소용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그 집착이 더더욱 심해질 뿐이다.
배고픈 사람, 배고플 것 같은 사람, 적당히 배부른 사람 모두 배가 터지도록 먹여야 마음이 편해지는 할머니..
우리집은 아마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이 전쟁을 계속 하게 될 것 같다.
언젠가 아이들이 이 시기를 지나 철이 들면 할머니를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고 그러려니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진 여전히 스트레스 받겠지만 대신 우리 아이들은 그런 할머니조차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넓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그렇게 자랄 수 있게 아이들과 대화할 것이다. 그러려면 나부터 좀 그릇이 커져야겠다.
자 이제 그릇 좀 키우러 가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