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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이야기 19-거제에서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들

by 정인성

# 영문 요약 뒤에 한글 전문이 있습니다.

It’s already been over three years since I moved to Geoje. Though not a long time, even within that period, I’ve witnessed certain things quietly fading away, like traditional markets, large private gardens, and rural homes once filled with life. Fortunately, it is not all about loss. In their place, new forms of life are beginning to emerge, such as stylish cafés, growing interest in sports and wellness programs, and the rise of large apartment complexes. Today’s story is about what is disappearing from Geoje, and what is taking its place.


거제로 내려온 지도 벌써 3년이 넘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 안에서도 눈에 띄게 사라져 가는 것들이 있다. 다행히도, 사라지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 자리를 채우는 새로운 모습들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오늘은 거제에서 사라지고, 또 새로 생겨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사라져 가고 있는 것들

전통시장

이사 온 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처음 거제 고현시장에 들렀을 때의 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그날은 매달 끝자리 5일과 10일에 열리는 고현시장 오일장 날이었던 것 같다. 시장 주변 골목골목마다 좌판을 펼치고 앉아, 직접 캔 나물이며 깨를 팔던 할머니들, 무게도 재지 않고 손으로 푹푹 담아주던 아저씨, 한 봉지에 천 원짜리 간식을 건네던 아주머니들까지. 도시에선 보기 어려운 따뜻함과 인심이, 그들의 바쁜 손놀림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정겨운 얼굴들이 하나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북적이던 오일장의 분위기도 차츰 사라지고, 어쩐지 쓸쓸한 기운이 돌고 있다.


거제에서 가장 큰 상설 재래시장인 고현시장은 지금도 수산물, 농산물 코너가 활기를 이어가고 있고, 제철 과일과 계절 꽃을 살 수 있다. 정육점, 반찬가게, 손두부집, 마른 해산물 가게, 잡화점, 복권방, 은행까지…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있는 공간이다. 겉보기엔 여전히 북적인다 싶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을 닫은 가게도 여기저기 보이고, 온라인 주문과 배달이 익숙해진 요즘에는 젊은 손님들의 발길도 줄어든 편이다.

고현시장전경2.jpg 사진: 거제 최대 전통시장인 고현시장 수산물거리 모습. 다른 전통시장들에서는 이런 활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고현시장은 2024년 중소벤처기업부의 '전통시장 및 상점가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디지털 전통시장’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고 들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옥포국제시장, 옥수시장, 옥포중앙시장 등 다른 전통시장들의 사정은 더 녹록지 않다. 3년 전만 해도 제법 활기가 있던 옥포국제시장은, 최근 다시 가보니 닫힌 가게가 더 많아 거리 자체가 썰렁했다. 거제면시장 역시 오일장이 열리는 날을 빼면 '시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한산하다.


물론 인구도 줄고 있다. 2022년 11월 기준 236,888명이던 인구는 2025년 3월 말 현재 231,954명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전통시장의 쇠퇴는 단순한 인구 감소 탓만은 아니다.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의 편리함, 그리고 젊은 세대의 소비 방식 변화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특히 좌판을 지키던 분들이 대부분 연로하신 할머니들이었기에, 허리 아프다는 말씀 한마디 남기고 가게를 닫고 나면, 그 일을 이어갈 젊은 손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내가 즐겨 찾던 손칼국수집도 작년 말 문을 닫았다. 주인 할머니는 허리 통증을 이유로 가게 문을 굳게 닫으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들어섰다. 깔끔하고 시원하긴 한데, 왠지 전통시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낯선 냄새가 풍긴다.


대형 정원

거제는 본디 아름다운 섬이다. 바다와 산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정원 같다. 그런 자연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자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대형 정원'들이 거제에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거나,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산방산 비원이다. 거제시 둔덕면 산방산 아래 자리한 이 사설 정원은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을 담으려는 철학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가꾸어진 공간이다. 약 2만 평에 이르는 부지에는 수백 종의 꽃과 나무, 수석과 석탑, 연못과 돌계단이 어우러져 있었다. 내가 이사 온 해에 방문했을 때 정문에는 매입자를 찾는다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이전에 이곳을 찾았던 이웃의 말로는, 비원 안을 거닐면 마치 누군가의 오랜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현재 이 정원은 사실상 폐쇄 상태다. 4년 전 유튜브에 매물로 소개된 이후 아직까지 팔렸다는 소식은 없고,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방치되어 있다. 운영자의 고령화, 뒤를 이을 사람의 부재, 유지비 부담 등의 현실이 이 정원을 '멈추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원의 아름다움은 이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XjHaucETtEk)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다행히 아직 문을 연 대형 정원도 있다. 동부면에 위치한 거제자연예술랜드가 그 주인공이다. 수석과 난의 전문가이자 시조 시인인 능곡 이성보 씨와 안해숙 부부가 50년 넘게 수집한 수석, 풍란, 분재 등을 전시한 복합 문화공간이다. 자연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만들고자 ‘자연예술랜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자연예술랜드1.jpg 사진: 자연예술랜드의 미니장가계 섹션
자연예술랜드2.jpg 사진: 변화무쌍이라는 이름이 붙은 멋진 수석 - 자연예술랜드에는 이런 희귀한 수석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내가 남편과 처음 이곳을 찾았던 2022년 여름, 주인장이 직접 안내해 주시며 방문객이 줄고, 운영을 이어갈 사람이 없고, 재정적 어려움도 크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름답고 희귀한 수석들을 지나며, 이 돌들을 모으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읽으셨는지, 주인장께서는 아내분이 없었으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거라며,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연예술랜드4.jpg 사진: 2022년 여름, 친구분과 함께 처음 찾은 자연예술랜드. 이성보 사장님이 설명을 친절히 해 주셨다.


대형 정원의 쇠퇴는 단순히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 정원을 돌보며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담던 감성 자체가, 이젠 새 세대에게는 조금 낯설고 먼 세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자연예술랜드는 부부의 헌신 속에서 꿋꿋이 운영되고 있다. 거제에서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이곳만큼 진심이 깃든 공간도 드물 것이다. 미래보다는 현재가 소중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 사이트 (https://blog.naver.com/geojecity/223423061576)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전통시장이나 대형 정원 외에도, 외곽의 전원주택 단지들 역시 불이 꺼진 곳이 점점 늘어가는 듯하다. 거제는 여전히 자연이 아름답지만, 그 자연을 손으로 가꾸고 감상하며 삶의 여유를 나누는 공간들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곱씹게 된다. 나 역시 자연을 좋아하며 거제에 내려왔지만, 결국은 편리한 아파트를 선택했다. 우리는 너무 효율적이 되었고, 여전히 너무 빠르게 살아가려는 건 아닌지. 음... 생각이 많아진다.


생겨나는 것들

카페

거제에 내려오고 나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생각보다 카페가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바닷가를 따라 산책하다 보면 크고 작은 카페들이 눈에 자주 띈다. 구조라, 학동, 와현, 지세포, 장승포 등 주요 해안선은 물론이고, 산속 고요한 길이나 시골 마을 안쪽에도 의외의 공간에 감각적인 카페가 숨어 있곤 한다. 앞서도 쓴 적이 있지만 (나의 거제이야기 6 – 거제의 카페들, https://brunch.co.kr/@insungjung/54), 거제는 약 450km에 달하는 긴 해안선을 가진 섬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다양한 스타일의 카페가 생겨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른다.

뉴카페1.jpg 사진: 거제 해안가에 있는 한 카페 - 이런 멋진 카페가 계속 생기고 있다. 물론 문 닫는 곳도 있을 것이지만...

실제 데이터를 보아도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2024년 12월 다이닝코드에 553곳이었던 거제의 카페 수는, 2025년 7월 11일 현재 774곳으로 나타난다. 물론 모두 새로 생긴 카페는 아닐 것이나, 7개월 사이에 무려 220곳 이상이 새롭게 등록되어 검색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더 많은 카페가 오픈되었다는 의미 이상으로 지역 상권의 확장과 소비 트렌드의 변화를 보여주는 수치라고 생각된다.


물론 새로운 카페가 늘어나는 건 관광객이나 지역 주민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넓고 푸른 하늘, 바다를 배경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여유는 누구에게나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손님 수는 크게 늘지 않는데 카페 수만 늘어나는 구조라면, 결국 운영의 어려움이 쌓이고, 문을 닫거나 가격 인상이 불가피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페는 늘지만, 그늘도 자란다. 이 흐름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쩌면 지금이 거제 카페 문화의 ‘팽창기’ 인지도 모르겠다.


스포츠와 건강을 향한 관심

최근 몇 년 사이, 거제에서 스포츠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조용히 쉬려고 내려왔던 사람들까지 이제는 “적당히 움직이면서 건강하게 나이 들자”는 분위기에 동참하는 모습이다.


내가 처음 이사 온 2022년, 거제면 스포츠파크 옆에 있는 36홀 규모의 파크골프장을 둘러보며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한번 해보시죠” 하고 권유였는데, 이제는 다르다. 올해 등록 기간 중 수천 명 (설마? 아마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이 몰려 서류도 못 내고 돌아간 이웃의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가 되었다. 실제로 거제시 파크골프협회 회원 수는 2020년 약 300명에서 2024년 1,500명, 2025년에는 2,300여 명으로 급증했다고. 불과 4~5년 사이에 5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파크골프장은 거제면의 36홀과 능포와 하청의 각 9홀뿐이다. 신임 협회장도 인원 증가에 비해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앞으로 환경 개선을 약속하고 있다.


파크골프뿐 아니라 바다 바람을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 긴 데크가 생겨나고, 헬스장, 공공 운동시설, 요가, 필라테스, 수영, 라인댄스 등 다양한 운동 프로그램도 꾸준히 늘고 있다. 내가 다니는 필라테스 강사님은 요즘 여러 아파트 단지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시고, 개인 스튜디오까지 운영을 시작하셨다. 2024년 새로 문을 연 장애인 우선의 사회통합형 체육시설인 거제반다비체육센터 (아래 사진은 https://geojebandabi.or.kr/facility에서 사용)에서는 어린이 수영, 실버 수영, 아쿠아로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헬스장 및 다목적 체육관도 구비하고 있다. 나도 아쿠아로빅에 신청하려 했지만, 매번 마감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60세 이상 참가자가 전체의 60% 이상이라고 한다.

거제반다비수영장.jpg 사진: 거제반다비체육센터의 5개 레인 수영장
거제반다비체육관.jpg 사진: 거제반다비체육관의 널찍하고 쾌적한 헬스장. 신형기구들이 많아 운동하고 싶은 기분이 업되는 곳. 이용자가 많다.

거제는 여전히 느긋한 섬이지만, 그 안에선 ‘천천히 건강하게’ 사는 방식이 조용히 확산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변화를 본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

마지막으로 주목할 변화는 신규 아파트 단지의 등장이다. 그 중심에 상동과 유로아일랜드가 있다.


상동 일대는 최근 몇 년 사이 다양한 이름의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거제의 신 주거 중심지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총 3,000세대가 넘는 대규모 단지에는 초등학교, 유치원, 상가, 음식점 등이 들어서 젊은 맞벌이 부부들과 중산층 가족들이 많이 있다고, 그곳으로 이사 간 나의 이웃에게 들었다.


유로아일랜드는 고현동에 위치한 1,000세대 이상 규모의 고급 아파트 단지다. 고현항을 향해 시원하게 트인 조망과 리조트풍 설계, 고급 시설 등을 내세워 ‘세컨드 하우스’ 개념으로 분양된 곳이지만, 장평, 고현 일대 편의시설이 가까워 살기에도 편리해서인지 실제로는 실거주 비율이 꽤 높다고 들었다.


이처럼 아파트 단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단순한 부동산 현상이 아니라, 거제의 인구 구조와 생활 방식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음을 뜻한다. 다만, 궁금증도 남는다. 인구는 줄고 있는데 왜 아파트는 늘어날까? 실제 분양가보다 매매가가 낮아졌고, 아직 빈 집도 많다는 점은 아쉽지만, 앞으로 내 집 마련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에 관해서는 거제 이야기 10 – 집 마련, 어떻게’ (https://brunch.co.kr/@insungjung/59)를 보시면 도움이 되실 듯하다.


마무리하면서

거제는 지금, 거제에서 태어나 살아오신 분들과 외지에서 들어오신 분들, 젊은 가족들과 나처럼 은퇴한 시니어들이 함께 공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도시로 변화해 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변화가 ‘없애기 위한 변화’인지, ‘살리기 위한 변화’인지, 미래에 ‘바람직한 변화’인지, ‘해가 되는 변화’인지 쉽게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이든, 나이 든 세대이든 도시의 변화는 결국 삶에 깊이 닿는다. 이제는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지금 무엇을 잃고 있고, 무엇을 새로 얻고 있는지. 그 변화가 ‘사는 재미’를 더해주는지, 아니면 ‘살던 의미’를 지워버리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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