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장로님 댁은 잔치를 치렀다. 장로님 둘째 아들을 장가보냈다.
우리 가족도 가게 문을 닫고 잔치가 열리는 회관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마을 회관 입구에는 곱게 한복을 입은 권사님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계셨는데, 우리가 들어서자 반갑게 인사하면서 테이블로 안내를 하셨다.
자리에 앉아 실내를 둘러보니 마을 분들과 그 외 지인들을 포함하여 축하객들이 많이 찾아와 북적거렸다. 갓 피어나 꽃처럼 예쁜 신랑 신부도 부지런히 하객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며칠 전에 장로님은 고사리 꺾으러 갔다가 가시에 긁혔다고 하며 얼굴을 난장판으로 하고 교회에 왔었다. 주방에 있다가 장로님 얼굴을 보게 된 나는 'ㅉㅉ, 조심하시지"라고 하며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농을 즐거이 하는 장로님이 나중에야 점을 뺐다고 실토를 하면서 모여있는 우리의 딱한 표정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면서 보는 사람마다 "아들이 장가가는데 아버지가 왜 얼굴을 다듬느냐?"라며 한 마디씩 했다. 장로님도 지지 않고 "아들을 장가보내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인 것도 같다며 같이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우리 딸을 시집보낼 때는 점부터 빼러 가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었더니 종일 수고하고 있는 교회 식구들이 보였는데 목사님 사모님도 자리하여 커피를 권하거나 손님들의 안내를 도우며 잔치 분위기를 돕고 있었으며 여 전도회 장님도 그러했다. 수고하고 있는 분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주방으로 갔더니 교회 권사님들이 음식의 종류마다 분담하여 한 식구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같이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웃음을 팔면서 인사를 나누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차려놓은 음식을 먹으면서 사모님과 고 집사님이 앉아 옛날 제주의 잔치 풍속을 얘기하며 웃었다.
제주에는 집안에 혼사를 치르려면 잔치를 사흘을 벌였다. 동네잔치이므로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세끼를 다 잔칫집에서 해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동네가 혈연이나 일가 친인척이 많은 관계도 있고 고만고만한 이웃들이 담 하나를 사이에 두며 살아, 소식은 우체국에서 보내는 전보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육지에 살면서 결혼식에 축하하러 가서 축의 내고 준비된 뷔페식당으로 가서 먹고 바로 나오는 결혼식 행사에 익숙해진 나는 마을 회관에서 열리는 잔칫집의 부산스러운 모습이 오랜만에 느껴지는 정겨움으로 다가왔다. 얘기를 들으니 제주에서도 요즘에는 뷔페식당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관혼상제 문화도 세월의 풍화를 겪으며 바스러져 떨어지는 흙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에 축하를 받은 장로님이 찾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면서 자리에 앉아 옛날 얘기를 하며 웃었다. 부모의 이름으로 아들을 장가보내려고 애쓴 장로님이 대단해 보였다.
꽃과 같은 신랑 신부가 서로 한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동안 겪을 비바람 눈보라를 헤쳐나가 행복한 나날 견고하게 쌓아가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