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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퀸 Nov 28. 2024

하늘 위, 기내에서의 플러팅

플러팅은 국경을 넘어


"비행기 안에서 번호 묻는 사람 없어?"


승무원 생활을 하며 자주 들었던 질문 중 하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묻는 그들의 모습에 웃음이 난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놀랍게도 승객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남자 크루'의 플러팅이다. 승객이 번호를 묻는 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지만, 크루라니. 이건 좀 의외 아닌가?






그날은 방콕 비행이었다. 유난히 이코노미 크루들과의 합이 좋았다. 우리 회사 크루들은 대체로 다정한 사람들이 많지만, 이날은 특히 분위기가 좋았다. 다들 서로 척척 돕고, 유머도 에너지도 넘쳤다. 정말 드물게 '이 비행 재미있다!'고 느낀 날이었다.  


방콕은 관광지로 유명한 만큼 비행은 힘들었다. 모든 좌석이 꽉 찬 풀플라잇(만석비행)에, 6시간이 넘는 비행 내내 단 한 번도 앉아볼 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도 분위기는 좋았다.

그날 함께한 남자 크루 중 한명이 나를 유난히 잘 챙겨줬다. 처음엔 그냥 서로 돕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남자 크루 둘, 나 포함해서 여자 크루 둘. 이렇게 처음 보는 4명이었지만, 원년 멤버인 듯 찰떡같은 호흡으로 일했다.



힘든 비행이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방콕 랜딩.

그날 일정은 말도 안 되게 짧았다. 오전에 도착해 밤에 도하로 바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처음 가보는 나라인 만큼 하고 싶은 리스트를 쭉 적어, 꼭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멤버들은 근처만 둘러보고 쉬겠다고 했지만, 나는 정해둔 스케줄이 있다며 혼자 나섰다. 다른 멤버들 모두 아쉬워했고, 특히 그 남자 크루는 "다 같이 가자"며 한번 더 권했지만 나는 계획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말도 안되는 짧은 레이오버(목적지에 머물다 가는 비행) 시간에 맞춰 후다닥 일정을 해내고, 도하로 돌아가는 길.

다시 만난 4인조 멤버들. 너덜너덜 너무 피곤했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이 멤버들과 계속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아쉬운 도하행이었다.



돌아가는 비행에서 나는 익숙하지 않은 갤리(기내 주방) 포지션을 맡았다. 이번엔 나 혼자 멀리 떨어진 포지션에서 일하게 되어 더욱 긴장된 상태였다. 중요한 업무를 맡은 만큼 실수하지 않으려고 말없이 집중했다. 그런 나를 보며 그 친구는 "걱정하지 마. 자주 여기로 올게."라며 정말 틈틈이 갤리로 찾아와 나를 도왔다. 함께 일하던 또 다른 크루가 워낙 자유로워 나 혼자 고생하는 걸 눈치챘는지, 큰 힘이 됐다.


서비스가 끝나고 모두가 잠든 평화로운 꿀 같은 시간.

긴장이 풀리고, 진이 다 빠진 채로 정리를 하고 있었다. 또 다시 이 친구의 등장. 이번엔 양손 가득 달달한 사탕과 초콜릿을 담아 해맑게 웃으며 내게 건넸다. 순간 마음이 짠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순수한 감동이었다. 그 진심 어린 따뜻함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기내에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나에게 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친구는 틈만 나면 내가 있는 갤리로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왜 이렇게 자주 오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나는 부담스러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다른 멤버들이 있는 갤리로 자연스레 발길이 옮겨졌다. 이 멤버들과 같이 크루밀(승무원 기내식)을 먹으며 방콕에서 보냈던 여행지에 대해 얘기도 나눴다. 그 친구도 어느새 내가 있는 갤리로 와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기내에서 오랜만에 모인 4인조 멤버. 이 멤버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비행이니, 사진과 영상을 서로 찍으며 몰래 추억을 남겼다. 그러는 중에 내가 취하는 포즈를 그 친구가 따라서 취하기도 했고, 윙크를 하면 따라서 윙크도 했다. 심지어 눈이 건조하다며 인공눈물을 넣고 있을 때도 "나도 필요해!" 하며 나를 따라했다.


'이 친구. 나한테 관심이 있나?'


다양한 승객이 있는 만큼 다양한 크루들도 많다. 그런 환경 속에서 섣불리 사람의 감정을 넘겨짚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따라하며 장난스레 웃고 있는 그 친구의 모습을 보며 그제서야 느꼈다. 그 행동은 어딘가 서투르지만 순수하고 귀여웠다. 무엇보다 그 친구도 비행 내내 힘들었을텐데, 나를 도와주려고 애썼던 마음이 정말이지 고마웠다.



비행이 끝나고 방콕 4인조 멤버들은 서로 사진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번호도 교환하게 됐다. 나는 평소에 크루들과 번호를 교환하지 않는 편이지만, 참으로 러블리했던 이 멤버들은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곤 그 사진을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자랑했을 때, 친구가 불쑥 말했다.


"저기 저 남자애,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매우 놀람) 응? 그걸 어떻게 알아?"


친구의 말을 듣고 나니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감정도 어느정도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유난히 자주 찾아왔던 그 친구의 행동이 다시 떠올랐다.


'어쩐지..'


그리고 더 확신했던 건 이 방콕 비행 후로 이 친구의 행동이었다.


"비행 어디로 갔어?"

"언제 쉬어?"

"언제 시간돼?"

"너 있는 곳으로 갈게."

"(SNS에 재밌는 한국영상을 보내며) 이거 봐봐!"



비행 하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다. 살면서 또 언제 다른 국적의 친구에게 이런 플러팅을 받아볼 수 있을까? 다른 크루들에게 들은 플러팅은 정말이지 다양한 국적만큼이나 제 각기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다. 그 친구 덕분에 다채로운 내 크루 라이프에 또 다른 색깔의 추억이 만들어졌다.



삭막한 중동의 크루 라이프.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더라. 그렇게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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