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도 좁다.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낯이 익었다. 분명히 아는 얼굴이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두둥.
생각났다.
나를 뽑아준 면접관이었다.
'승무원이 되면, 이런 것도 경험해보면 좋겠다!' 하고 상상만 했던 일이었다. 기내에서 나를 뽑아준 면접관을 다시 만난다는 것. 이보다 더 우연한 일이 있을까?
'리아'
그녀는 나를 처음으로 뽑아준 1차 면접관이었다. 승무원 고시라고 불리는 이 세계에서 첫번째 관문을 넘게 해 준 사람이었다.
면접 당시 나는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지정된 면접관도 없었다. 오픈된 장소, 여러 면접관 중 지원자가 없는 빈 자리가 생기면, 곧장 들어가 그 면접관과 면접을 보는 방식이었다.
'저 면접관에게 갔으면 좋겠다.'
금발의 리아를 멀리서 보며 마음속으로 바랬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나는 내 바람대로 그녀에게 가게 되었다. 이런 미래를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녀 앞에 섰다.
면접이었지만 내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내가 이전에 했던 내 사업에 대해 묻던 그녀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나도 진심으로 답했다. 그리고 합격증을 받았다. 1차 면접을 마치고 나와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정말 고마웠다.
몇년 후, 인도로 가는 비행이었다. 오늘도 역시 풀플라잇, 만석이었다.
승객들이 하나둘 탑승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 단정한 정장 차림에 금발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아우라.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누구였더라?'
마침 그녀는 내 서비스 존에 앉아 있었다. 정장을 입은 걸 보니 직원 티켓으로 탑승한 것 같았다. 당시 직원 티켓을 사용하는 경우 정장을 입어야 했기에 직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티켓은 직원뿐만 아니라 가족, 지인도 사용할 수 있었기에 확신은 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딘가 익숙한 그녀가 계속 신경 쓰였다.
'대체 어디서 봤을까?'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 앞에 섰다. 이번엔 승무원으로.
내 카트 밑에 떨어진 베개를 재빠르게 주워준 그녀. 카트가 잘 지나갈 수 있도록 센스있게 행동하는 모습에 확신이 들었다.
'우리 회사 직원이 맞구나.'
그녀가 내 서비스 존에 앉은 덕분에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베개 치워줘서 정말 고마워~ 나한테 줘. 내가 치울게!”
“아니야~ 내 발 밑에 두면 돼. 정말 괜찮아.”
몇마디를 주고받다 문득 물었다.
“혹시.. 우리 회사 직원 맞지?”
“응, 맞아. 그런데 지금은 그만뒀어.” (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녀의 미소와 함께 이어진 대화.
잠시 머뭇거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런데 우리, 분명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어디서 봤더라…”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내가 직원이었으니 어디선가 마주쳤겠지?”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확히 떠오르지 않아 아쉬운 마음을 삼켰다.
"그래. 맞아. 어쨌든 정말 반가워!”
대화를 마무리하며 그녀에게 서비스를 마치고, 지나가려고 하던 그 순간!
'아!! 리아다!!'
그녀다!! 나를 뽑아준 면접관!!
"리아!"
나도 모르게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기억났어! 1차 면접때 너가 내 면접관이었어. 너가 그때 날 뽑아줘서 나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어. 리아.. 정말 정말 고마워."
눈물이 차올랐다.
리아는 듣는 내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나를 부둥켜 안았다. 감격스러웠던 나는 리아의 눈을 마주하며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정말.. 정말 고마워.. 리아 덕분에 나 기회를 얻어서 이 세계를 경험하고 있어. 내 오래된 꿈이었거든.. 내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이렇게 다시 만나 너에게 서비스 할 수 있다니, 정말 기적 같아. 행운이라 생각해."
우리 둘은 두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리아는 내 등을 쓰다듬어주며 나에게 말했다.
"너가 잘한거야.”
짧은 대화였지만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리아는 멀리서 나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리고 랜딩 후 내릴 때에도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뽀뽀 세례를 날렸다. 비행이 끝난 뒤에도 그 따뜻한 여운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면접 당시, 면접관과 지원자로 만나 얘기했던 찰나의 순간이 스쳐지나갔다. 그때의 어리숙한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미래에 이 면접관을 기내에서 내 승객으로 만나, 서비스하는 순간이 기다리고 있을거라며. 좀 더 힘내보라며.
감사했다.
승무원이 되면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나를 뽑아준 면접관을 기내에서 만나 내가 서비스로 보답하는 것. 사실 이 버킷리스트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그러면 참 좋겠다.' 마음 속으로 바랬다.
그런데 꿈을 이루고 나니, 예상치 못한 신기하고 좋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비행기를 탈 지, 그리고 전 세계를 누비는 우리 회사 비행기 중, 내가 그 비행에 배정될 확률. 이 모든 건 우연과 우연이 닿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은 넓기만 한 줄 알았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