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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네 Apr 06. 2024

'배민'에 죄책감 느끼지 말기

쉽지 않지만, 그러기.

   그래. 이건 생존의 문제다. 좀 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한 과소비성 지출이 결단코 아니란 말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로 탈탈 털린 채 퇴근한 자가 기운을 짜내 싱크대 앞에 서 본다. 아이가 내어 놓은 수저통과 물통을 씻어 건조대에 올려놓고 비어 있는 밥통을 바라본다. 밥... 그래, 밥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문제는 반찬이다.

   냉장고를 스캔한다. 선반 위에는 익다 못해 쉬어가는 김치와 계란이 있다. 동그랗고 네모난 여러 반찬통에는 언젠가 먹다 애매하게 남아 혹시 다음에 한번 더 먹을까 하고 도로 넣어둔 반찬들이 들어있다. 아이는 먹지 않을 것이다. 탈락이다. 시선을 싱싱칸으로 돌려본다. 점점 반투명한 갈색으로 변하고 있지만 골라내어 보면 아직 좀 건질 게 있을 듯한 숙주나물과 날짜를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두부, 감자 몇 알과 양파, 팽이버섯, 애호박 조각이 있다. 아쉽지만 버섯과 호박은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가야 한다. 고체로 왔다가 액체가 되어 나간다.

   냉동실을 열어본다. 이쪽은 그래도 사정이 좀 낫다. 나의 희망, 냉동 볶음밥이 대기 중이다. 나만 빼고 몽땅 해물파인 가족을 위해 냉동 새우와 손질 오징어도 구비되어 있다. 볶음밥을 후라이팬에 달달 볶다가 새우랑 계란만 추가해도 훌륭한 한 끼가 되고 말고! 신나서 아이에게 묻는다.

   "우리 저녁에 새우 볶음밥 먹을까아~?"

   "아니?"

   "왜?"

   "오늘은 안 먹고 싶은데?"

   어... 그래. 이해해. 나도 사실 좀 지겨웠어. 이제 선택의 순간이다. 냉장고와 냉동실에 있는 각종 재료들은 간단한 세척과 해동 후 몇 번의 칼질을 거쳐 냄비 안에서 적당한 양념과 물, 기름 등과 함께 휘저어가며 가열하면 제법 먹을 만한 요리가 될 것이다. 대략 30분이면 되겠지. 문제는 이 모든 과정에 필요한 각종 조리 도구들과 음식을 담아낼 그릇이런저런 양념들을 묻힌 채 싱크대 안에 볼품없이 누워있다는 점이다. 냄비야, 넌 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니? 식기세척기는 분명 코 앞에 있는데,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을 기운이 없었다. 며칠 동안 쌓아 올린 그릇들을 보고 아이는 우리 집 싱크대가 폭발할  같다고 했다. 걱정 마, 폭발은 거야. 토는 할지도 몰라.

   이제 내 머릿속에서 저녁 식사 준비에 필요한 예상 시간이 십만칠천팔백 시간으로 늘어난다. 못하겠다. 꾸역꾸역 집안일하다 너무 힘들어 누구에겐지 모를 화가 자꾸만 치밀어 오르면 엉뚱한 사람에게 어이없이 짜증을 낼지도 모른다. 그럼 안되지. 밥 먹으래서 식탁에 앉았는데 반찬으로 욕을 주면 얼마나 억울한데.

   고민은 배달만 늦출 뿐. 신속하게 앱을 연다. 일말의 양심으로 패스트푸드는 가능한 한 지양한다. 반찬 가게, 청국장, 묵밥과 주꾸미, 콩나물 해장국... 가게와 메뉴를 훑으며 영양의 조화와 아이의 선호, 요금을 식구수대로 나누었을 때의 식사 비용 등을 빠르게 살펴본다. '이 정도면 내가 하나하나 장 봐다가 요리해 먹는 것보다 낫겠는데?' 하는 결론과 함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모두 절약한 자'는 만족스럽게 주문 버튼을 누른다. '조리 중 '표시를 초조하게 지켜보다 귀여운 민트색 오토바이가 우리 집 쪽으로 출발하면 그렇게 설렐 수가 없다. 지도 위에서 꼬물꼬물 전진하던 아이콘이 드디어 우리 집 근처에 다다랐는데 마침 창밖에서 부르릉~하는 오토바이 소리까지 들려오면 흥이 솟구친다. 도착이야!

   그렇게 나는 행복했다. '최근 1년간 주문한 금액이 궁금해요' 버튼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내가, 이걸, 진짜로, 다 먹었다고??"

   그래, 진짜로, 내가 다 시킨 거 맞았다. 아이랑 엄마표 공부한다고, 학원 안보내니 돈이 제법 절약되더라고, 이 좋은 길 함께 걷자고 주변에 홍보 많이 했는데. 그 돈 고스란히 배달의 민족에 쓰고 있었다. 물론 다 포장 음식은 아니었고 마트 배송도 꽤 있었으니 '배달 음식 이용금액'이 아니라 '연간 식비'라고 우겨볼까? 그러자. 쉽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해 보자.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다 완벽히 해낼 수 있겠어? 구멍도 있고 한 거지 말야...(흠흠! 그 빵꾸가 좀 큰 듯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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