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중단했던 심리 상담을 다시 시작했다. 이전처럼 괴로움에 빠져 사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그저 앞으로 다가올 '내 생의 어떠한 어려움'과 잘 마주하기 위해 나름의 대비를 하고 싶었다. 참가자가 단 한 명뿐인 전지훈련.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섀도우 복싱이 이루어질 그 현장에 함께 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직면해야 할 문제를 대충 얼버무리고 모른 척 드러누워버리고 싶을 때 죽비로 내 등짝을 후려쳐 줄 사람. 괜한 자기 연민이나 핑계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정신을 함빡 깨워 줄 사람. 발걸음이 언제나처럼 익숙한 곳으로 향할 때 슬쩍 내 몸을 돌려, 낯설지만 걸어야 할 길로 이끌어줄 사람. 나의 '오늘'을 온통 뒤흔들어 '내일'은 더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 신뢰할 수 있는 코치. 그 자리에 생각나는 이가 있었다.
몇 년 전 한창 수렁의 밑바닥을 기고 있을 때, 온전한 정신도 기운도 없이 동네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렸었다. 제 발로 찾아가 놓고도 막상 진단과 처방이 나오자 더럭 겁이 나 도망쳤다가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고서야 백기를 들 듯 치료를 시작했더랬다. 나중에는 '뭐라도 붙잡고 이 고통에서 빨리 헤어나리라'며 병원에연계된 상담 센터도 다니게 되었는데 거기서 나의 상담 선생님을 만났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만 심리학을 전공해 놓고도 상담사가 아니라 내담자가 되어 상담실에 앉게 되다니어찌 보면 기가 찰 일이었다. (하긴 지금은 교사가 되었는데도 내 자식 교육이 늘 고민 투성이니여전히 제 머리 깎기는 어렵구나!)
상담은 단순히 위로나 공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오래도록 외면해 온 상처를 드러내고 그 뿌리를 파헤쳐 결국 치유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르게 된다. 그때의 나도 그랬다. 나의 선생님은 질문하고 질문하고 또 질문하였으며 나는 생각하고 혼란스러워하고 폭포수처럼 토해내었다. 내면의 밑바닥에 꾹꾹 눌러 놓았던 묵은 감정과 기억들이 잔뜩 부유하여 나를 집어삼켰고 난 그 안에서 허우적대다 흙탕물을 왈칵왈칵 쏟았다. 드디어 오래전 그 어느 날 잔해 속에 자그맣게 웅크리고 있던 어린 나를 발견하고 더듬거리며 말을 걸던 날, 나는 나를 껴안고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눈물을 쏟아내었다. 반쯤은 후련하고 반쯤은 멍한 상태. 거기서 그만 상담을 멈추었다. 그만하면 된 것 같았다. 이만 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쩜 선생님이 제기하는 또 다른 질문과 이슈들은 나도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들이라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타인을 거절하거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도 두려워하던 나는 잔뜩 쪼그라든 마음으로 변명에 가까운 말을 붙여가며 상담을 그만두고 싶단 말을 전했다. 다룰 것이 아직 많이 남은 사람으로서 '내 맘대로' 과정을 끝내자고 하는 것에 뭐라고 반응을 하실지, 그때는 그것도 겁이 났었다. 놀랍게도 선생님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아채고 타인에게 표현하기 시작한 사람'에 대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었는데 너무도 담담한 작별이어서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누군가의 기대나 바람보다 내 뜻을 우선하는 것이 그를 온통 부정하고 거부하는 괘씸한 일이 아님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살면서 문득, 당시로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과제들 중 무언가를 지금의 내가 얼추 해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 타인과의 갈등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 마음을 바꾸어 내밀지 않을 용기가 생겼으며, 수천 갈래의 생각 끝에 닿은 부정적인 결론에 지레 겁먹고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일은 줄었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타인이고 그들 역시 나에게 그러하므로 '너'와 '나'는 마음에 안 드는 일 투성이인 것이 당연하다는 것, 그 마음에 들고자 끊임없이 누군가를 살피고 나를 뒤틀어 맞출 필요는 없다는 것, 물론 너 역시 그렇다는 것, 또한 이 모든 것들이 결코 우리 관계의 종말이나 파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제 조금 알겠다. 어쩜 이제 좀 컸는가 보다. 제법 단단해지고 살만해졌나 보다. 그때더 이상 열지 못하고 돌아섰던 문 앞에 다시 선 것을 보면. 아직 혼자 걸어 들어가기는 두려운 길, 그 앞에 서서 나의 오랜 상담 선생님의 손을 다시 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