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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네 Sep 28. 2024

그렇게도 지키고 싶은 것

서브웨이 우먼 파이터스

    경기도민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시작된 나의 지하철 여정은 이후 첫 직장, 두 번째 대학교를 거치는 동안 계속되었다. 모두 하루에 최소 3시간 이상을 대중교통 안에서 보내야 하는 제법 먼 거리였는데 그래도 그때는 젊었고, 버스가 아닌 지하철이라 다행히 견딜만했다. 일단 멀미가 나지 않았고, 지루하면 옆 승객이 활짝 펼쳐 들고 있는 '메트로'를 훔쳐볼 수도 있었으며(옆에서 너무 열심히 보았는지 들고 있던 아저씨가 내리면서 나한테 넘겨주신 적도 있다. 거 참 고맙고도 머쓱한 것), 무엇보다 혹시라도 진땀을 부르는 '급한' 사태가 찾아오면 어느 역에서든 내려 바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몇 번이고 날 살린 서울교통공사, 잊지 않을게요).


    이렇게 십수 년간 지겹게도 탔던 지하철을 요즘엔 딱히 이용할 일이 없었는데, 교사가 된 후로 주로 주거지 근처로 발령이 나 대체로 버스 몇 정거장이면 통근이 가능기 때문이다. 그러다 얼마 전,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문득 이어폰을 뚫고 소란스러운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저 목소리 큰 승객들이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나 했는데 고개를 돌려 상황을 살펴보니 이런, 싸움이 났다. 노인석에서 세 명의 할머니가 매우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는데 추정컨대 주제는 '노인석에 앉을 자격이 있는 자' 또는 '이 자리의 주인 된 자'인 듯했다. 앉아 있던 일행은 대략 80대 정도로 보이는-그리하여 노인석에 앉을 자격을 자타공인 득한-할머니와 60대가 아닐까 싶은 비교적 젊은 할머니였다. 그 앞에 선 노인은 역시 '노인석 착석 자격증'을 취득한 듯한 연세가 지긋한 분이었는데 '더 노인' 앞에서 '덜 노인'이 앉아있는 이 기가 막힌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화를 걸기 시작한 듯하다. 내 자리 내어놓으라고. 아찔하고 매콤한 단어를 써 가며.


    나는 사건의 '절정' 단계에서 이분들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점은 사람들이 '험한 꼴'을 피해 슬슬 다른 칸으로 이동하면서 세 분 모두가 당장이라도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주위에 수두룩하게 낫는데도 '이 자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은 더욱 열기를 더해갔다는 점이다. 하이라이트는 화려한 육두문자가 더지며 점차 격해지는 '언니들 싸움'에 그만 맘이 불편 '덜 노인'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이대로 사건이 '결말'을 맞나 했더니만 이게 웬걸? 차마 이렇게 패배의 굴욕을 맛볼 순 없었던 자리 '더 노인' '덜 노인' 팔을 잡아 도로 주저앉히며 넌 가만 앉아 있으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그래, 이제 이건 더 이상 단순한 자리의 문제가 아니다.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싸움, 내 모든 것을 걸고라도 지켜야만 하는 'my precious'가 되어버린 그 좌석 주위에는 텅텅 빈자리들이 멋쩍게 놓여있었다.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왜인지도 모른 채 내 자존심, 명예, 가치를 몽땅 올려놓고 지키려는 '절대 좌석'이 어쩜 나한테도 있을지 모른다. 누가 건드릴까, 혹여 빼앗아갈까 끝없이 두려워하고 경계하면서. 골룸이 되고 싶진 않으니,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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