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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May 12. 202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도 말했다

주절주절 #9.1


최근 독서 모임에 나갔다. 지난 모임의 주요 논제는 철학이었다. 관련 대담이 오가던 중, 명징한 사유가 있는 철학과 달리,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견이 있었다. 소설을 즐겨 읽으며, 소설가를 희망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흥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기성 작가나 타인의 말이 아닌, 온전히 나 스스로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모임을 파하고 집으로 향하며, 어둑해진 밤거리를 따라 나는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한동안 곱씹었다. 도대체 왜 나는 소설을 읽는가. 그리고 왜 나는 소설을 쓰려고 하는가.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철학의 관점에서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시작된 이 글은, 그간 골똘히 생각해 보지 않았던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내 나름의 자유로운 공상이자 대답이다.


근대 철학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아마도, 니체의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는 선언일 것이다. 사회적 인류의 태동 아래 신과 삶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각 시대와 사회별로 모습을 달리 한 신은, 그러나 어느 곳에서든 인간 세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신의 뜻을 전달하는 교황이 나라를 다스리는 제정일치가 진리로 여겨지던 사회에서, 신에 대한 사망 선고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폭발적인 화두인 것이다. 마치 지구는 돈다고 주장한 갈릴레이처럼, 니체의 발언은 그간 인류가 지녀온 인식을 송두리째 뒤엎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과연 니체가 그러한 사유의 시작점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니체 이전의 사람들은 과연 신의 죽음을 추호도 알지 못했을까. 나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전쟁과 역병, 부조리가 곳곳에서 발발하며, 신을 대리하는 사제와 교황의 비리와 착취가 만연하던 시대는 신의 생존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환경이다. 아마도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죽음을 의심하는 자들이 도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이를 소리 내어 공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되뇌는 것과 입 밖으로 발설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무수한 반격과 불경죄, 비난을 감수할 만큼의 용기를 내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니체의 대단함은 이를 공표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니체 역시 자신의 이름을 적나라하게 걸고 발언하기에는 아무래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민하던 니체는, 직접 말하는 것 대신에 부캐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피식대학이 한사랑산악회를 만들고, 이창호가 이택조로 분하여 백숙을 찾듯, 니체 역시 신의 사망을 알릴 캐릭터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왕 만들 거 이름도 있어 보이면 좋겠지. 그렇게, 우리가 익히 아는 차라투스트라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니체의 영리함이 다시 한번 발현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산꼭대기로 보낸다. 아무리 가상의 인물이라도, 곧바로 신이 죽었음을 알리기에는 왠지 부담스럽다. 등산가인 차라투스트라는, 하산하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정상에서 목격한 것을 넌지시 말한다. ‘아니, 자네. 그거 아는가. 내가 산꼭대기에 다녀왔는데, 글쎄 신이 죽어있지 뭔가!’ 이 능청스러운 발언은 다소 솔깃하게 들린다. 곧이어, 사람들은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차 씨의 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자, 이제 절반은 넘어왔다. 나머지는, 우리의 차 씨가 얼마나 유려하게 혓바닥을 놀리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니체는 이를 완벽하게 해낸다.

서서히 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기 시작한다. 그간 신의 죽음을 의심했지만서도 입 밖에 꺼내기 주저했던 이들이 이러한 유행에 편승한다. 것 봐라. 내가 뭐랬나, 나도 진작 이런 생각을 했다니깐! 이러한 유행에는, 물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가 개판이니, 신이 죽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를 받아들일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수천 년간 군림하던 신의 사망 소식은, 사회 전반에 걸쳐 극도의 혼란과 공허를 야기한다. 부조리 문학 역시 이 시기에 융성하며, 카뮈와 사르트르, 베케트와 카프카 등이 출현한다. 카뮈는 대낮에 사람을 찌르는가 하면, 베케트는 나무 아래 배우들을 세운 뒤 헛소리만 시킨다. 카프카는 사람을 벌레로 만들어버리기에 이른다.

자, 일단 말은 던졌고, 이제 이를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우리의 니체는 이러한 점에서 뒤가 없는 사람이다. 이왕 신이 죽은 거, 니체는 그냥 들이받으라 선언한다. 됐고, 그냥 받아버려! 그런데, 들이받으려면 힘이 필요하지 않은가.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천명한다. 받으려면 힘이 필요하고, 또 부숴버리려는 의지가 있어야지! 그러한 점에서, 니체의 사상은 다소 폭력적이다. 후대 예술가들의 작품에 있어 니체의 사상이 극단적 서사에 자주 차용되는 것도 이러한 점에 기인할 것이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여러 문학가들 역시 나름의 해법을 내놓는다. 카뮈는 이왕 돌을 굴릴 거 웃으면서 굴리자고 다독이며, 사르트르는 속도 안 좋을 텐데 시원하게 구토 한 번 하고 오라고 등을 떠민다. 그래도 이들은 양반이다. 카프카는 멀쩡한 사람을 성에 가둬 놓더니 별안간 요절하지 않는가.

임무를 완수한 차라투스트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산에 올라 전원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는 동안, 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으며, 또한 이를 어찌어찌 잘 수습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핵심 주동자였던 히틀러는 결국 사망에 이른다. 이후, 부역자에 대한 처단이 착실히 이루어진다. 개중에는 성실한 공무원이던 아이히만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절규하며 부르짖는다. 아니, 이 나라는 착실한 공무원을 이딴 식으로 대하는가! 물론, 직업윤리와 일반 도덕 윤리를 구분하지 못한 그의 무지는 확실한 죄목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악의 평범성’을 정의한다. 우리나라 역시, 시기는 다소 늦지만 이러한 혼란과 안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6.25 전쟁과 군부 독재,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를 겪으며 부지런히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가는 동안, 과학과 기술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세상은 새천년을 맞이한다.

한편, 물 좋고 공기 좋은 산에서 마음껏 요양하던 차라투스트라는 좀이 쑤시기 시작한다. 세상도 많이 변했고, 요즘 MZ 세대들은 아무래도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잘 모르겠지? 오랜만에 하산할 생각에 우리의 차 씨는 피가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간만에 마을로 내려가 볼까.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온 차 씨는, 차들과 건물로 번잡한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목을 가다듬고 크게 외친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 사람들이 차 씨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각자 갈 길 가기에 여념이 없다. 뭐야, 왜 이래? 자세히 보니, 다들 귀에 에어팟을 끼고 네모난 액정만 들여다보기 바쁘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마음이 조급해진 차 씨는 아무나 붙잡고 외쳐댄다. ‘이봐, 신이 죽었어! 신이 죽었다고!’ 엄마 따라 길을 걷던 10살짜리 아이가 짜증 섞인 얼굴로 쏘아붙인다. ‘아, 그래서 어쩌라고요!’ 머릿속이 멍해진 차 씨는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머리를 굴린다. ‘이래서 요즘 MZ 세대는 못 쓰겠다고 하는 건가. 이런 싸가지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아무래도, 말이 통하려면 나름 자기와 비슷한 연배를 찾는 게 상책일 것 같다. 마침 한복 차림의 백발이 성한 노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차 씨는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 노인을 붙잡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다. 아 글쎄, 신이 죽었네. 신이 죽었어! 그러나, 차 씨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그것은, 노인의 손에 들린 피켓에 ‘천신 숭배, 사탄 타도’라는 문장이 빨간 펜으로 크게 적혀 있다는 사실이다. 노인은 손에 든 피켓으로 차 씨의 머리통을 힘차게 후려친다. ‘예끼, 이 불경한 놈아!’ 별안간 머리를 급습당한 차 씨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달아난다. 한참을 달리다 멈춰 선 차 씨의 머릿속은 혼란스럽다. 대체 왜 이 세상은 이 모양 이 꼴인가. 차 씨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온 세상에 신이 즐비한다는 것이다.

머리에 두건을 쓴 노인들은 한 손에 태극기를 들고 정치인의 이름을 연호하며 힘차게 나아간다. 그들 옆으로 선거 유세 트럭이 쏜살같이 지나가며, 한 표를 부탁하는 내용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30대 직장인들은 와이셔츠 단추를 풀며 주식과 코인 장을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 옆으로 10대 학생들은 아이돌 직캠을 재생한다. 한 학생은 방금 전 터진 아이돌의 열애설에 분노하며 욕지거리를 퍼붓고는 망설임 없이 탈덕을 결정한다. 방금, 그의 신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건물 외벽 전광판에서는 팬더의 중국 송환 뉴스가 보도되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지하철 옥외 광고란에는 버추얼 아이돌의 1주년 축하 소식이 걸려 있다. 온 세상이 신이고 신도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신을 믿고 숭배하기 바쁘다. 그러니, 차 씨의 말 따위가 귀에 들려올 일이 없는 것이다. 차 씨는 과거 19세기처럼 하나의 신만을 상대해야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지금, 푸바오와 아이돌과 버추얼 유튜버와 허경영과 일론 머스크를 죽여야 한다. 그러니, 차 씨가 이를 감당할 여력이 있겠는가. 차 씨는 낙담하며 다시 산으로 오른다. 그래, 그래도 공기 좋은 전원생활이 저 어지러운 도시보다야 낫지. 차 씨는 힘없는 걸음으로 익숙한 산길을 밟으며 자조한다.

그런데, 차 씨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산 정상에나 다시 가 보자. 약 200년 전에 신의 죽음을 목격했던 그곳은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차 씨는 가쁜 호흡으로 힘겹게 산을 올라 이윽고 정상에 다다른다. 그런데, 200여 년이라는 세월은 산 정상에, 신의 사체 대신 다른 존재를 가져다 놓았다.

그것은 바로, 거울이다.

차 씨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거울 앞에 마주 선다. 거울 속에는, 그간 노쇠한 채 여기저기 주름이 자리한 차 씨의 얼굴과, 그 뒤로 펼쳐진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 차 씨는 한 걸음 더 다가간다. 그러자, 거울 옆에 연결된 센서는 차 씨의 존재를 인식하고 거울 속 화면에 명령이 담긴 전기 신호를 전달한다. 곧이어, 거울 속 화면은 차 씨의 얼굴에 필터를 덧입힌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차 씨의 모습은 어느새 젊었을 적 탄탄한 육신으로 돌아가 있다. 차 씨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진다. 화면은 빠르게 변주되며, 차 씨는 여자가 되고, 아이가 되기도 하며 독깨팔이 되기도 하고 틱톡 챌린지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차 씨는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와 그 속의 자신의 모습에 점점 빠져든다. 200년 전 그의 입으로 죽음을 선포했던 신은, 21세기가 되어 거울 속에서 환생했다. 차 씨는 거울 속 신에게 온 마음을 빼앗긴 채 오랜 시간을 그 앞에 머무른다. 시공간의 인식은 무화(無化)되고, 경건한 숭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넋을 잃는다. 호숫가에 맺힌 신에 대한 그의 숭배는, 결국 물속에 얼굴을 처박고 익사하는 파멸로 이어진다. 과거 나르시시즘은 필멸을 전제했다. 그러나, 21세기 나르시시즘의 매개물은 호수가 아닌 거울이다. 거울과 호수의 다른 점은 성질에 있다. 고체인 거울에 사람이 빠져 죽을 일은 없는 것이다. 거울 속에 한참 동안 정신이 팔린 차라투스트라는, 점점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기에 이른다. 이윽고, 거울의 매끈한 표면이 차 씨의 뭉툭한 코에 닿는다. 차라투스트라는 피부로 느껴지는 차가움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실재한다 여겼던 신의 존재에 영원히 다가가기란 불가능함을 깨달은 것이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차라투스트라는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에서 그와 세상의 모습은 여전히 빠르게 변주되며 생동한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비친 거울 속 풍경은 왠지 낯설다. 차 씨는 자신의 손을 들어 바라본다. 늙고 추레해진 손은 여기저기 주름이 가득하다. 아, 덧없는 시간의 흐름은 나를 결국 늙게 만들고야 말았구나. 문득, 거울 속 젊은 자신의 모습이 조롱처럼 여겨친다. 차 씨는 별안간 깊은 분노가 인다. 모든 게 허상이며 가짜다. 젊었을 적 성격이 어디 가지 않는 차 씨는 앙상한 주먹을 꽉 쥐고 힘껏 쳐든 후, 거울을 향해 힘차게 휘두른다.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이 깨지고 파편이 여기저기 튄다. 차 씨의 주먹 곳곳에 상처가 가득한 채 피가 흐른다. 이윽고 고통이 그의 손을 타고 몸속을 파고든다. 깊은 쓰라림을 느끼며, 차 씨는 깨진 거울을 바라본다. 화면 곳곳에서 노이즈가 발생하고, 간신히 붙어 있는 파편들에는 왜곡된 상들이 맺혀 있다. 곧이어 거울이 와르르 무너진다. 깨진 거울의 잔해 뒤에 펼쳐진 풍경을 차라투스트라는 응시한다. 그의 눈앞에 세상의 모습이 자리한다. 다시 죽음을 맞이한 신과 여전한 세상, 그리고 고통스러운 감각은 차 씨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끔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비로소 깨닫는다. 거울 속 허상과 무수한 신의 형상들, 그 모호함과 허위 속에서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임을. 그리고, 그 사실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살을 파고드는 깊은 고통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영역 안에 자리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인식은 이해가 아닌 감각의 차원에 있다.

차 씨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먹을 쥔 채 밖을 응시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저마다의 신을 추동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으며, 건물 곳곳에 붙어 있는 거울에서는 끊임없이 영상이 송출된다. 차라투스트라는 고민한다. 신의 죽음을 다시금 목격한, 아니, 신을 살해하고 나의 존재를 인식한 지금 자신이 할 일은 무엇인가. 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통찰한 바를 전달하는 철학가가 될 수도, 혹은 허상적 존재에 믿음을 주입하는 인간들을 계몽하고 선도하는 정치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앞에는 또 다른 하나의 선택지가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느낌으로써 인지했다. 살을 에는 고통과 손목을 타고 흐르는 피를 통해 감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감각하게끔 함으로써 존재를 인식하도록 할 수 있다. 감각은 공통된 경험이 선행할 필요는 없다.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먹어봐야 아는 것은 아니다. 감각은 존재의 내부에서 발원하기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할 것인가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피투성이인 손을 들며 자문한다. 사람들에게 신이 살해당했음을,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존재함을 어떻게 느끼도록 할 것인가. 그는 감각의 공유 방법을 고민하며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는 고통과 쾌감, 그 속에서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대상에 녹여내는 작업을 이어간다. 그는 무수한 작품들을 짓고 부수며 창작을 이어가고, 그러한 그의 행위를 우리는 예술로써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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