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이들에게 꿈을 묻는다. 굳이 ‘꿈’이라 명명하는 이유는, 장래희망이라고 하면 왠지 직업의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단어 선정이 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원하는 직업을 답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받은 아이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신이 나서 이런저런 답변을 펼친다. 의사, 수의사, 선생님, 유튜버, 운동선수, 요리사, 댄서 등등. 듣고 나면, 보통 이유를 묻곤 한다. 왜 그 직업을 가지고 싶니? 아이들은 또 신이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펼친다.(참고로, 우리 반 아이들은 10살이다.) 글을 쓰다 보니, 자기 집 강아지가 아프지 않고 오래 살도록 치료해 주고 싶어서 수의사가 되고 싶다는 귀여운 답변이 떠오른다. 나 또한 어릴 적 숱한 어른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아오곤 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꿈이 막연했던 나는, 순간마다 이런저런 답변을 임기응변 식으로 늘어놓곤 했다. 의사, 변호사, 교수, 기자, 심리학자 등등.(공교롭게도, 그중 교사는 없었다.) 매 순간 다른 답을 하며 어른들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렇게 교사가 되었고, 이제는 아이들에게 그런 질문을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
어릴 때는 그래도 꿈이 중요하지 싶었는데, 고등학생이 되자 입시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낡고 비좁은 기숙사에서 하루 서너 시간을 자며 미친 듯이 공부했던 이유는, 대학만 가면 모든 게 끝날 줄만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학 입학 후엔 임용만 합격하면 끝인 줄 알았다. 시험 경쟁률은 낮고 학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닥치는 대로 놀면서 시간의 소중함을 몰랐다. 입대 후엔 제대만 하면 다 끝날 줄 알았다. 그 모든 끝들을 지나왔는데, 문제가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삶은 여전히 이어졌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종료했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길 위에 있었다. 아직 시동이 걸린 차 안에서, 변한 거라곤 조금 줄어든 연료량뿐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에 설치된 박고은 작가의 <감각축적> 작품은 기계에 내장된 센서가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여 이진법으로 화면 위에 나타낸다. 지정된 위치에 서면 센서가 이를 인식하여 화면에 0과 1로 나타낸다. 내가 감각되면 1, 그렇지 않으면 0. 존재는 1, 부재는 0. 그렇게 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한 두 숫자로 증명된다. 나는 정해진 곳에 서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스크린 속 불빛들이 움직이더니 내 몸의 윤곽을 따라 수십 개의 1이 표시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사다난하게 지나온 삶이 그저 ‘1’이라니. 왠지 억울했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삶을 그렇게 간단히 나타낼 수 있을까. ‘1’을 온전한 삶이라 칭할 수 있을까.
삶이 전시될 때, 사건은 대개 이진법으로 구술된다. 역사와 언론은 사건의 인과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원인(시작)이 결국 저런 결과(끝)로 이어졌다.’ 그러나, 인생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삶의 1과 죽음의 0 사이에는, 센서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무수한 숫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삶과 세상을 이해해 보고자 인류는 1과 0의 사이와 바깥을 탐사했다. 0(죽음) 너머의 베일을 걷어내려 종교와 신화가 등장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를 통해 직접 그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했다. 1과 0 사이의 탐색은 예술의 몫이었다. 펜과 붓, 카메라와 악기 등 저마다의 돋보기를 손에 쥔 고고학자들이 이진법에 가려진 숫자들을 찾아내려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숙였다. 그들에게 삶이 1이라는 정의는 충분하지 않았다. 일률적인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소수점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그들 또한 언젠가는 0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그들의 작품 속에서 0이 아닌 고유한 숫자들을 발견했고, 부를 수 있었다.
방학에 돌입하고 약 일주일 간 이어진 서울 여행. 한낮의 열기 아래 이곳저곳 다니며 지하철에 몸을 싣곤 했다. 신림에서 출발해 마포, 성수, 종로를 오가며 여러 사람들을 보았다. 무더위에도 셔츠를 목깃까지 채우고 걸음을 옮기는 직장인, 교복 차림에 가방을 어깨에 걸쳐 매고 열차를 기다리는 학생. 커다란 쓰레기통을 옮기며 화장실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과 휠체어를 타고 조심스레 움직이며 역으로 향하는 시민. 사람들은 저마다의 치열한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1이 아니었다. 각각의 삶은 그 자체로 소설이고 사진이자 화집이며 영화였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열차에 몸을 싣는 동안 부지런히 읽었던 책들 속에도 다양한 삶이 있었다. 위독한 친구에게로 떠나는 영화감독, 고통에도 살아가려 몸부림치는 사내, 꿈을 위해 먼 타국으로 떠난 조향사와 슬픔을 찍는 사진작가. 1과 0 사이의 셀 수 없는 숫자들이 곳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삶은 소수점 너머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여행이 끝나고, 광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밖은 햇살이 비쳐드는가 싶더니 별안간 장대비가 내리고, 날씨의 변주에도 불구하고 기차는 묵묵히 철로를 따라 목적지로 향한다. 자리에 앉아 창 너머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나는 좋다. 출발지와 목적지, 각각의 시간만 기록되어 있는 열차표에는 미처 담기지 못한 순간들. 약 2시간의 이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이다. 머지않아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한 여행이 끝나면, 곧이어 다음 여행이 이어진다. 숫자는 여전히 1과 0 사이를 유영한다.
가끔 아이들에게 꿈을 묻는다. 요즘은 이유를 묻고 난 후, 그 꿈을 이룬 뒤에 하고 싶은 것을 질문한다. 아이들은 이전 질문보다 조금 더 공들여 숙고한 뒤에, 나름의 답을 건넨다. ‘의사가 되어 친구들을 치료하며 자기 이름이 적힌 병원을 만들고 싶어요.’, ‘요리사가 되어 엄마 아빠를 초대해서 엄청난 요리를 해 주고 싶어요.’ 전에는 꿈이 0인 줄만 알았다. 꿈에 이르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고, 소수점 따위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기에 길을 잃고 당황했으며 공허했다. 그러나, 삶은 이진법으로 단순하게 셈할 수 없기에, 나는 아이들에게 연거푸 질문을 건넨다. 1과 0이라는 냉정한 숫자의 안팍에서 저마다의 이름을 갖도록, 그래서 무너지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는 이진법의 세상에서 부지런히 각자의 소수점을 그려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