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놀이 시간. 여자아이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다가왔다. 아, 사건이 터졌구나. 일단 달래며 진정시킨 후,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안은 시간과 관련되어 있었다. 현행 20분 단위의 중간놀이 시간은 10시 30분부터 10시 50분까지로 정해져 있다. 벽시계의 분침이 45에 다다르자, 아이는 곧 중간놀이 시간이 끝날 것임을 지각하여 미처 반에 오지 못한 남학생들 무리를 데리러 바삐 걸음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렇게 아이들을 이끌고 반에 온 아이.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어라?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 모니터 화면에 표시된 디지털시계는 이제 막 45분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는 당황하여 벽시계를 봤다. 벽시계는 50분에 다다르고 있었다. 시계가 잘못 맞춰진 것이었다.
남학생들은 화를 냈다. 아니, 너 때문에 중간놀이 시간을 5분이나 놓쳤잖아! 선의로 감행한 행위가, 칭찬을 들어도 모자랄 판에 비난으로 이어지자 아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 내 앞에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여전히 딸꾹질이 한창인 아이가 자리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슬슬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일단, 음악 수업이 시작되었으므로 3교시 끝나고 이야기하자는 말과 함께 아이를 음악실로 보냈다. 교탁에 가만히 앉아 사건을 천천히 복기했다. 아이의 행위 동기는 선의였다. 친구가 늦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러나, 남자아이들의 불만은 정당했다. 20분 중 5분을 날렸으니 무려 1/4 만큼이나 손해를 입은 것이다. 이게 주식이었으면 땅을 치고도 남을 일이다. 행위 동기와 결과. 둘 중 갈피를 못 잡던 차에, 문득 시야에 벽시계가 잡혔다. 그래, 네놈이 문제였던 게로구나! 아이의 착각은 잘못 맞춰진 벽시계의 분침에 있었다. 거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책임 주체가 있어야 한다. 나는 벽시계를 중앙에 놓고 사건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3교시 후, 다소 진정된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나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들을 교탁 앞으로 소집했다.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들. 나는 우선 사건을 되짚었다. 아이들의 확인이 이어졌고, 이제는 책임을 가릴 때였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자, 그래서 이 사건의 책임은..’
아이들은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오래된 벽시계가 유유히 째깍거리고 있었다. 이게 뭔 소리야? 의문이 어린 얼굴들이 다시 나를 향했다.
‘자, 사건의 시작은 저 벽시계를 보고 유리(가명)가 시간을 착각해서 너희를 데리러 간 거야. 그렇다면, 잘못은 누구에게 있을까. 바로 저 벽시계야. 시계의 역할은 시간을 제대로 알려주는 거잖아. 저 시계가 시간을 잘 알려주지 못했기 때문에 유리(가명)는 착각을 했고, 너희는 아까운 중간놀이 시간을 버리게 된 거야. 그러니까, 저 시계가 잘못인 거지.’
아이들은 다소 찝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시계가 범인이었다. 그런데, 시계에게 사과를 어떻게 받을 것인가.
‘저 시계가 잘못했지만, 시계는 교실 안에 있으니까 결국 시계를 관리하는 책임은 선생님에게 있는 거야. 그래서 선생님이 시계 대신에 사과를 할게. 그리고, 저 시계는 시간을 맞춰 놓을게.’
나는 시계가 낼 법한 목소리 톤을 골라 아이들에게 사과를 했다.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피식 웃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하나의 과정이 더 남아 있었다.
‘우리는 저 시계가 잘못인 걸 알았어. 그런데, 우리가 대화하면서 우리도 모르게 서로에게 상처를 조금씩 준 것 같아. 물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선생님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말을 건넬 때 조금 부드럽지 못하게 한 것은 사과하면 좋을 것 같아. 유리(가명)도 유리가 나쁜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실수한 것은 미안하다고 하자.’
아이들은 서로 마주 보며 차례대로 사과를 건넸다. 나는 시계를 고쳐놓으마 다짐을 했고, 원성을(선생님! 시계가 이상해서 그런 거잖아요!) 들었다.(우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팔랑팔랑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긴장이 풀렸고, 퇴근 생각이 간절해졌다.
삶을 살면서,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닥치곤 한다. 그때그때 밀려오는 파도는,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눈앞을 가려 제대로 앞을 볼 수 없게끔 만든다. 한 발짝 물러나야 비로소 감각되는 파고와 물결은 멀어지기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시간은 더 이상 풍족하지 않은 재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현실이 밀려든다. 정신없이 보내는 하루는 고되고, 여유는 사치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시사IN> 제882호에 실린 한 기사(신선영 기자)에는 지적장애가 있는 김예준 군(10)과 홍미영 활동지원사(가명, 57)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서울시 사회서비스원에서 일하던 홍미영 지원사는 2년 7개월 동안 주 6일씩 예준이를 돌보곤 했다. 홍 씨 덕분에 예준이는 점차 독립적으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홍 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애 아이를 돌볼 때는 기다려주는 게 중요해요.” 홍 씨는 알았다. 돌봄은 마음을 나누며 신뢰를 구축해가는 일이고, 그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자원은 시간이라는 것을. 그러나, 한정된 시간은 인내를 견디지 못했다. 사회서비스원은 올해 7월 31일 문을 닫았다. 홍 씨는 결국 예준이와 이별했다.
시간의 결핍에 신음하는 사회에서 신뢰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매일 피로한 사람들은 점점 날이 선 채 예민해진다. 사소한 갈등조차 비극의 씨앗으로 기능한다. 지뢰밭을 건너듯 온 신경이 곤두선 채 관계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당장 학교만 보더라도 그렇다. 사소한 다툼조차 민원과 학교폭력의 대상이 된다. 학교는 점점 지친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사는 말한다. 서로 거리를 두라고. 아예 말을 주고받지 말라고. 관계 자체를 끊어버리는 해결책은 타인에 대한 공감의 결여로 이어진다. 개인주의의 문제점을 들먹이며 이를 희화화하는 사회가 오히려 개인주의를 유도한다. 그 이면에는 지쳐버린 사람들이 있다. 여유라는 걸 언제 가졌는지조차 제대로 감각할 수 없는.
그렇다면, 무수한 민원이 문제인가. 학부모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매일 밀려드는 업무와 노동 속에 허우적대는 사회인의 피로는 부모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는다. 너덜너덜해진 채 집으로 돌아온 부모가 아이에게 다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해결되기를 맘 편히 기다릴 인내심은 사치인 것이다. 여유가 사라진 피로 사회에서, 신뢰는 점차 흐려져 보이질 않는다. 사람들은 눈앞에 자리한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벽시계는 여전히 맞지 않는 시간을 가리키며 유유히 움직인다. 그 아래 얼굴을 맞댄 아이들이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건넨다.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 말려>의 에피소드 중에서, 짱구가 바쁜 아빠의 시간을 용돈으로 사려고 하는 내용이 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지만, 현실에서 시간은 짱구의 용돈으로 사기에는 너무나 비싼 재화가 되어버렸다. 살기 위해 돈을 벌고, 돈을 벌기 위해 시간과 노동력을 바친다. 단순한 삶의 사이클은,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수한 갈등과 아픔을 낳는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자! 이 말을 무책임하게 내뱉기에 현실은 엄혹하다. 위태로운 신뢰와 피로한 사람들. 냉정하게 흐르는 시간과 빠르게 변하는 낮과 밤. 한낱 초등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금 뒤섞여 놀고 있는 모습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말 없는 저 벽시계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 받는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벽시계의 침묵에 문득 감사함을 느끼며, 나는 유유히 흐르는 시간을 감각한다. 문득 예준이의 뒷일이 궁금하다. 기사의 말미에 적힌 예준이의 질문을 가만히 떠올린다. “저는 선생님이랑 영화 본 게 기억에 남아요. 근데 마음속에서 잊어버릴까 봐 걱정돼요. 선생님 9월에 다시 와요?”
* <시사IN> 제882호 기사(p33 “선생님, 9월에 다시 와요?”, 신선영 기자)를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