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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Sep 30. 2024

차(茶)

코고나다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 <애프터양>(2022)은 한 가정의 일원이었던 로봇 양의 고장과 수리의 과정에서 양에 대한 기억을 탐사하는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 동양 문화에 대한 진중한 탐구가 이어지는 영화에서, 특히 차(茶)는 가장인 제이크(인간)와 양(로봇)이 서로를 교감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차를 업으로 삼는 제이크에게 있어 차는 단순한 음료 이상의 추억과 감정이 녹아든 존재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양에게 있어, 차는 그저 찻잎을 추출하여 우려낸 음료다. 그러나, 제이크와의 대화를 통해 양에게 있어 차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차는 그가 사랑하는 가족의 일원인 제이크의 추억이 담긴 산물이다. 양에게 더 이상 차는 그저 음료가 아니다. 차는 그가 타인을 이해하게끔 하는 하나의 통로이자 소우주다.

웨이브 오리지널 예능인 <사상검증구역 : 더 커뮤니티>는 4가지로 분류된 기준에 의거한 다양한 사상을 지닌 참가자들이 공동체를 운영해가는 프로그램이다. 정당인, 군인, 변호사, 배우 등 각기 다른 직업과 경험, 사상을 지닌 이들은 커뮤니티 내에서 언어화된 제도 아래 경제 활동과 토론 등을 이어간다. 동시에, 그들은 그들 내에 존재하는 불순분자 색출을 도모하며, 사상 검증을 통해 서로를 탈락시킬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안게 된다.

8박 9일 동안 이어지는 프로그램의 마지막 미션은 ‘신뢰 게임’이다. 게임 이론을 토대로 한 이 미션의 본질은 타인에 대한 ‘신뢰’다. 불순분자는 커뮤니티 내의 오해와 불신을 야기함으로써 공동체의 균열을 유도해야 한다. 즉, 서로 간의 ‘신뢰’를 공격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커뮤니티의 최종 목적은 공동체의 신뢰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로 이어진다. 그러나, 처음에는 수호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이 신뢰 체계는 미션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점차 균열이 발생한다. 물밑에서 정치적 담합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속임수와 배신 또한 곳곳에서 자행된다. 미션의 중반을 넘어가는 과정에서 첫 탈락자의 발생은 합의된 사항에 대한 배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첫 탈락 이후, 신뢰는 당연한 전제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이 게임에서 가장 큰 적은, 표면적으로는 불순분자다. 그러나, 불순분자의 최종 목표는 구성원의 탈락에 있지 않다. 그의 미션은, 마지막 단계인 신뢰 게임에서 서로가 신뢰하지 못하게끔 주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알지 못하는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후반부에 배신자(신뢰를 깨뜨린 자)와 불순분자(신뢰를 깨뜨리는 목적을 지닌 자) 사이에서 구성원들은 자연스레 불순분자를 탈락시킨다. 판결과 처벌의 기준이 행위에서 가능성으로 전도되는 순간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왜 이들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인가. 이는, 불순분자라는 표상된 언어에 있다. ‘불순분자’라는 언어 자체가 대상을 적으로 규정하고 죄목을 부여한다. 즉, 이 게임의 적은 ‘불순분자’가 아니다. 커뮤니티의 본질적인 적은, 바로 ‘언어’ 그 자체다.

언어는 구성원의 신뢰 체계를 끊임없이 교란한다. 구성원의 사상을 임의의 기준으로 재단하며 편을 갈라 구별시킨다. 종종 첨예한 질문, 가령 존경하는 대통령은 누구인가, 을 제시하여 갈등을 야기한다. 불순분자를 명명하여 선험적으로 악을 규정한다. 한쪽 벽에 표시된 공금과 각자의 금액 및 호감도 등 수치화된 가치와 언어화된 제도가 비가시적인 신뢰 관계를 면밀히 조준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언어는 구성원 내의 관계를 수직화하기도 한다. 사상 제도 내에서 하마는 11점을 부여받는다. 높은 점수는 파악이 쉽기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결국, 하마는 가장 먼저 탈락된다.

이 부조리에 대해 가장 예민하게 감각하는 이 역시 하마다. 그녀는 미션 초반에 천으로 자신의 사상 점수가 적힌 모니터를 덮어버린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성원들에게 직접 우린 차를 대접한다. 그 순간, 그녀는 언어라는 그물의 빈틈을 통해 마음을 전달한다. 의심과 배신의 도구로 전락한 언어를 그녀는 내려놓기 시작한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다. 마이클을 반기는 다크나이트의 몸짓, 눈물을 흘리는 낭자에게 건네는 슈가의 휴지, 고애신과 슈퍼맨의 요리. 언어가 적으로 기능한다면, 이에 맞서는 신뢰의 도구는 언어와 제도 바깥에 자리한 마음이다. 백곰과 슈퍼맨의 정치학적 언어는 공동체의 신뢰를 수호하는 데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그들의 정제된 언어가 무용한 것으로 치부될 수는 없다. 언어로 직조된 그물의 빈틈을 감각하는 데서 마음의 필요가 생성된다. 그들은 모두 최선을 다했다.

대개 선악은 언어화된 제도 내에서 판단된다. 그러나, 끝없이 교류되는 언어는 그 과정에서 훼손과 변용이 발생한다. 이해가 오해로 변모하는 순간, 언어는 신뢰를 겨냥하는 칼끝이 된다. 어지럽히고 미끄러지는 언어의 세계에서 인간의 고통은 필연적이다. 불완전하고 추상적인 인간은 그 자체로 언어와 완벽히 합치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타인과 관계 맺는 인간이 지닌 도구는 언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행위, 눈빛과 말투, 언어의 바깥에 자리한 인간의 몸짓은 그 자체로 신뢰를 매개할 수 있다. 신뢰의 본질은, 결국 인간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보니 한 가지 생각이 틈입한다. 과연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있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괴물>(2023)에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적당히 착하고 때때로 나쁜 인간들이 상처를 주고받는 세상. 마음은 추상적이고 고통은 현실적이다. 그 마지막 질문에 대해 그럴듯한 이유를 대기 망설여진다. 마음의 증거를 언어로 채집하기에는 아직 내가 모자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인간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종교, 국가, 사회, 집단, 타인과 자아 그 모든 것들에 끝없는 의심을 투사하곤 했던 삶에서 여전히 나는 무언가에 대해 의심하고 생각하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마음이 있는 존재다. 우리는 타인과 마음으로 관계하며, 세상은 여전히 마음을 지닌 자들이 신뢰하며 살아가는 곳이라 나는 믿는다.



<사상검증구역 : 더 커뮤니티>, 출처 : 웨이브 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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