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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판 Jul 24. 2024

이 침이 다 내 침이라니

 오케스트라는 아무나 하나 _ 04화


첫 수업 시간

안내문을 따라서 발레연습실에 들어갔다. 합주실과 같은 크기의 공간이었다. 3면 벽 전체에 거울이 있었고 거울 바로 앞에는 발레 할 때 잡는 쇠막대가 있었다. 들어서면서 고개를 돌리자 낯선 사람들 속에서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이 보였다. 


내가 배드민턴 레슨 최소 인원을 확보하려고 보이는 사람마다 배드민턴 칠 생각 없냐고 물으러 다닐 때 방아쇠 증후군으로 손가락이 아파서 못 한다고 했던 분이다. 그럼 퇴근하고 그 긴 시간 동안 뭐 하시냐고, 오케스트라 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을 때 주중에 본가가 있는 지역으로 가서 주 1회 플룻 레슨을 받고 있다며 오케스트라에 지원할 마음이 없다고 했던 분이다. 그분이 유난히 반짝이는 플룻을 들고 자리에 앉아 계셨다(나보다 6세 연상). 아는 분과 같이 왔는지 옆자리에 계신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두 분은 면접 이후 추가로 들어온 것 같았다.


4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우리에게 플룻을 가르칠 강사님이었다. 강사님이 자기소개를 먼저 했다. 이 동네 출신이고 읍내 어디에 산다고 말했다. 유학도 다녀오고 대학 강사도 했다고 했다. 강사 일이 힘들고 돈이 적어서(이렇게 표현하셨음) 고향으로 돌아와 플룻 레슨도 하고 이웃 도시에서 플룻 학원도 운영했다고 했다. 그러다 코로나가 와서 다 그만두고 지금은 농공단지 어느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거리낌 없고 솔직한 자기소개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제일 안쪽에서부터 앉은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수강생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어떤 분은 자기 이름만, 어떤 분은 이름과 사는 곳 정도만 말했다. 서먹하고 어색한 분위기. 내 차례가 왔다.


"저는 저기 앉은 분(방아쇠 증후군 선생님을 가리키며)과 같은 OO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클라리넷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애들이 쓰던 플룻도 있고 해서 따라왔습니다"


본인 차례일 때 이름만 말하고 넘어갔던 방아쇠 증후군 선생님의 근무처가 나 때문에 덩달아 노출되었다.(어차피 몇 주 지나면 서로 다 알게 될 일이지만)



시작은 '솔라시'부터


강사님을 제외하고 남자는 면접 날 나와 함께 면접 대기실을 찾던 그분이 유일했다. 첫날이라 그런지 아니면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차분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직업을 밝히지 않았지만 일자리가 많지 않은 이 지역 특성상 대부분 교사 거나 공무원일 게 분명했다.


실력 차이가 나서 같은 공간에서 연습할 수 없다며 초급반은 발레연습실에서, 상급반은 복도에서 연습하겠다고 했다. 플룻을 끼우는 법도 모르고 간 나는 방아쇠 증후군 선생님께 플룻을 끼워달라고 부탁했다. 복도로 나간 상급반은 바로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초급반은 4명이었다. 세 분 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4명 중 플룻 소리를 제일 잘 내는 분께 플룻을 배운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단소를 분적이 있다고 했다. 단소? 그렇다면 초등교사겠군, 생각했다. 나머지 두 분은 첫날인데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서로 아는 사람인 듯했다. 


복도와 발레연습실을 오가며 플룻 강사님이 지도를 했다. 강사님이 플룻을 빼서 헤드 부분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복식호흡으로 소리 내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벽을 보며 연습을 했다. 힘이 좀 약해지긴 했지만 코로나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던 시기였다. 


그다음 '솔라시'를 배웠다. '솔라시' 세 음을 불었다는 말이 아니다. 세 음의 운지법을 배웠다는 말이다. 리코더처럼 입으로 분다고 바로 소리가 나는 게 아니었다. 


플룻의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입술 모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람의 세기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아랫입술로 구멍(립플레이트)을 어느 정도 덮어야 하는지, 플룻을 어느 정도 기울여야 하는지 감으로 익혀야 했다. 


'솔라시'는 오른손 5번 손가락을 계속 누르고 있는 것 빼고는 리코더의 솔라시와 운지법은 비슷했다(왼손 엄지가 누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라는 것도 다름). 오른손 5번을 누르고 2,3,4를 뗀 상태에서 왼손 1,2,3,4를 누르면 '솔', 솔에서 왼손 4를 떼면 '라', 라에서 왼손 3을 때면 '시'였다. 왜 '도레미'부터가 아니라 '솔라시'부터 배우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플룻은 고음악기라 저음역대 소리 내기가 더 어렵다는 설명을 나중에 들었다.


이 침이 다 내 침이라니


수업 정리 시간.

첫날이라 유의 사항 안내가 많았다. 먼저 자리 이동할 때 악기를 조심하라고 했다. 플룻은 다른 악기에 비해 가격이 좀 싼 편이지만 오케스트라에는 몇천만 원짜리 악기도 있으니 의자 위에 놓인 악기를 치고 지나가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강조했다. 


플룻을 정리할 때 청소봉(플룻 안을 닦는 도구)으로 침 닦는 법도 알려주셨다. 플룻의 헤드, 바디, 풋을 분리한 다음 청소봉을 악기에 여러 번 넣었다 뺐다 하지 말고 그냥 한번 쓱 지나가면서 닦으면 된다고 했다. 플룻 안에 생각보다 많은 침이 맺혀있어서 놀랐다. 플룻 안에 이 정도의 침이 들어갔으면 플룻 밖으로도 침이 이 정도는 튀었다는 건데. 플룻이 코로나에 취약한 악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수업을 마무리 하면서 플룻 강사님이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모두 끝까지 데리고 가려고 하니 결석만 하지 말아 주십시오"


결석 안 하기, 그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방아쇠수지증후군 : 손가락을 무리하게 사용해 손가락 인대와 인대막이 함께 부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발생하는 질병으로, '손가락 협착성 건초염'이라고 한다. 손가락을 구부릴 때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방아쇠를 당기는 느낌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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